Sculptor's biographical dictionary

  • HOME
  • Sculptor's biographical dictionary

권치규

작가 작품

Bio-Resilience - Landscape 2020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화강석 201 x 59.5 x 12cm

Bio-Resilience - Rainbow 2020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light 15 x 20 x 120cm (6 pieces)

Bio-Resilience - Universe 2020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204 x 204 x 50cm

Bio-Resilience - Water drop 2020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77 x 77 x 178.5cm

Bio-Resilience - 반딧불이 2020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Dimensions variable

Bio-Resilience - 서정적풍경(미루나무) 2020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Bio-Resilience - 숲 2020 Stainless steel, urethane paint 70 x 70 x 15cm (3 pieces)

Resilience-flow, 500×500×100(D)mm, 스테인리스 스틸, 우레탄 도장,2016년,각5,000,000원

Resilience-Forest(Circle Black-White), Ø58x8cm, Stainless Steel, 2016년,3,000,000원

사계절_50 x 50 x 10(D) cm, 4EA,스테인리스스틸,2018년,각3,000,000원

작가 프로필

개인전

1998
제1회 “전환기의 인간들”전 (인사 갤러리)
2000
제2회 2000 “Clonze"전 (공 갤러리)
2001
제3회 아미아트 갤러리 기획 초대전 (아미 아트 갤러리)
2001
제4회 중국 상하이 아트페어 (상하이, 중국)
2002
제5회 대한민국 미술 축전 (예술의 전당)
제6회 청담 미술제 아미화랑 기획 초대전 (아미화랑)
2003
제7회 정글북 갤러리(일산 정글북)
제8회 Art seoul전 (예술의 전당)
2004
제9회 "Life"전 (갤러리 라메르)
2005
제10회 Osaca art fair(osaca-Japan)
제11회 마니프 서울 국제 아트페어 (예술의 전당)
2006
제12회 갤러리 아이오 (파주출판단지)
제13회 문화지구 4주년기념 인사동 현대미술축제 개인전(인사 아트센터)
2007
제14회 Life-욕망 (빛갤러리) - 박사학위 청구전
2008
제15회 선화랑 기획초대전 (서울 인사동)
2009
제16회 갤러리 아미 초대개인전 (서울 청담동)
2010
제17회 권치규 조각개인전 (인사아트센터)
2011
제18회 선화랑 기획초대전(서울, 인사동)
2013
제19회 DELLA-PACE GALLERY (일본 코베)
2014
제20회 아트스페이스 H 기획초대전 (서울, 원서동)
2015
제21회 아트스페이스 H 기획초대전 (서울, 원서동)
2016
제22회 서울국제조각페스타 개인전 (서울 예술의전당)
2020
제23회 개인전“Bio-Resilience“(서울, 본화랑)

외 국내외 아트페어,단체전 다수

수상경력

1977
경향신문 대구지사 아동미술 실기대회 ‘준특선’
무릉초등학교 교내 미술실기대회 ‘장려상’
1983
영남대학교 전국 남녀고등학교 학생미술 실기대회 조소부 ‘입선’
홍익대학교 전국남녀 고등학교 학생 미술실기대회 ‘입선’
1984
영남대학교 전국 남녀고등학교 학생미술실기대회 조소부 ‘금상’
홍익대학교 학생 미술실기대회 ‘미술대학장상’
1987
이안장학회 장학생 선정
1988
스포츠 미술공모전 ‘입선’
1989
제 158 야공대대 진중창작품 경연대회 조각1등
1989
제 1175 야공단 진중창작전시회 최우수상
1990
동아대학교 전국대학미전 금상
1991
MBC 한국구상조각대전 특선
1992
MBC 한국구상조각대전 특선
1995
대한민국미술대전 조각부문 특선
1996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회 우수상
2002
대한민국미술축전 최우수상
2005
Osaca art fair 우수작가상
2011
마니프 서울국제아트페어전 우수작가상
2011
서울문화투데이 최우수상
2012
알파청년작가전 심사위원회 우수상

작가 노트

				                         힘의 아포리즘-긍정의 힘 


Resilience

‘회복탄력성’, 아주 재밌는 말을 찾아냈다. 나의 작업을 대변하여 말하기에 아주 적당한 말이다. 이 말은 물질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기도 하고, 심리학에서는 이 물리학의 용어를 정신에 빗대어 쓰곤 한다. 이른바 심리적 회복탄력성이다. 물질에 적용될 때는 그 물질이 어떤 변형의 힘을 받을 때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려는 힘을 말한다. 심리적으로 사용될 때는 정신의 스트레스 대항력, 삶의 본원적 의지와 같은 의미로 쓰는가 보다. 밑바닥에 떨어져서도 우리는 다시 재기의 희망을 본다. 심지어 물도 자리를 내주었던 것이 떠나면 다시 그곳을 채운다. 부정과 해체, 억압의 힘은 꼭 그만큼의 반대급부의 힘, 즉 긍정, 생성, 자유의 힘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일종의 리듬이다. 이는 자연의 한 진리이다. 부정이 일방적인 힘이라면 회복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부정은 꼭 그만큼의 긍정의 잠재력을 축적시킨다. 이것은 힘의 진리이다. 궁극적으로 나에게 있어 욕망은 위기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는 인간에게는 잠재된 에너지로서의 긍정의 힘, 즉 회복탄력성이 있음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함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힘은 힘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힘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형식

형식이란 질서이기도 하고, 조건 내지 제약이기도 하며, 그것은 우리의 편에서 보면 지각의 틀, 도식이며, 존재의 편에서 보면, 존재를 조건이다. 물론 존재로서 우리 자신도 이 형식 속에서 살며, 틀을 만들며 산다. 사회의 질서, 도덕, 기존의 문화, 관습, 관행 나아가 환경이나 우주도 틀이다. 형식은 제약하지만, 동시에 틀은 다른 틀을 위한 토대가 된다. 無로부터 자유란 없다. 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형식지우는 틀, 틀을 해체하려는 힘, 또 새로운 틀을 만드려는 힘이 공존한다. 나는 그 힘을 언제나 ‘욕망’이라고 불러왔고, 틀을 지우고 해체하고, 그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를 ‘생명’이라고 불러왔다. life-desire라는 주제는 계속 해서 변주한다.
욕망은 제약하는 힘과 제약을 벗어나려는 힘의 단순한 대립의 관계가 아니다. 욕망은 오히려 긍정의 힘을 새롭게 창조한다. 無로부터의 창조도 없는 것이다. 일종의 투조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숲시리즈 작품에서 나무들은 자연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입방체 형태 속에 있다. ‘속에 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나무들은 이 틀 안에 있는 게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나무들은 오히려 틀을 만들고 있다. 아니 틀 속에 보호되고 있다. 모든 알이 모든 허물이 그렇지 않은가? 집은 틀이지만, 보호자이며, 우주는 법칙이지만 무대이다. 자연은 자기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또 다시 자기 자신을 해체할 생명을 움트이고 있다. 나의 작업에서 나무는 자연이고, 집은 문명이고 질서이자 구조이며, 인간의 형태는 말 그대로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존재이다. 나는 이 단순한 기호들을 오랜 동안 써왔다. 그러나 내가 탐구해 온 것은 이 들의 관계이며, 이를 관통하고 있는 욕망이다. 욕망은 한낱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움과 창조가 일어나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생명 그 자체의 활력이다. 그래서
그것은 힘이다.


힘-“visualize the invisible”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라”. 이러한 문구가 문화 저변에 깔려지고 있다. 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힘은 그런 것이다. 나에게 힘은 모든 존재들이 갖는 자기생성의 힘이다. 회복탄성력 역시 힘이다. <선화랑>에서 열였던 개인전 이후 나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을 드러내 보이는 데 힘을 써왔다. 힘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힘이 보여지고 느껴질 때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힘이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형태화되어야 한다. 융기하는 형태가 있다면, 무엇인가 밀고 올라오려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당기는 힘이 동시에 있다. 힘은 항상 운동 속에 있다. 정지 속에서 우리는 힘을 느끼지 못한다.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지만 우리가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힘의 가시화는 환기되거나 직접 느껴져야 한다. 나는 어떤 사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극단의 힘, 그 사물이 허용할 수 있는 최대의 회복탄력성을 실험한다. 최고의 회복탄력성, 그것이 그 사물이 갖는 힘의 크기이다. 우리는 더 무거운 것을 들어보기 전까지 우리의 힘을 잘 알지 못한다. 모든 운동에는 힘이 들지만, 힘을 애써 쓰기 전까지는 힘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힘의 상대성, 이것이 힘을 가시화하는 데 있어 핵심이다.
나는 한시대의 예술가로서 인간의 근원적 힘의 가시화를 통해 발언한다.
긍정의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色∙形

색을 한낱 감각이나 기호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색에 대해서 피상적인 것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들이 갖는 의지와 힘의 가시적 표명이다. 각각의 색은 어떤 느낌을 준다. 나는 언제부턴가 색을 더 이상 재현을 위해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색을 ‘의미있는 형식’적 요소로 쓴 것도 아니다.
상징인가? 일면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나의 색은 색이 주는 어떤 독특한 느낌을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것은 상징이라기보다는 어떤 잠재성이다. 각각의 오브제들은 어떤 색으로 입혀질 때 비로소 그것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색은 그래서 그 오브제에 맞는 옷과 같은 것이다. 형태가 잡히고 고된 연마를 견딘 재료들은 색을 통해 비로소 그것의 의미를 내보인다. 어떻게 보면 색은 그들의 존재방식이고 그들의 기분이고, 그들의 표정이며, 성격이다. 왜 봄의 새싹들은 연두빛인가? 특정 영역의 파장일 뿐인가? 그 색은 빛을 머금고 싶다는 풀의 의지이며 생의 욕망이며, 빛을 먹고 난후 만족의 표정이다.
검정과 백색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닮은꼴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흡수하고 생성할수 있는 광야이다. 색의 이런 의미를 위해 나는 사물과 완전히 일체화되어 있는 색을 좋아한다. 색이 본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단색의 비비드하고 티 없는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팝의 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편, 형태는 그 힘과 욕망의 지표index이며 의지이다.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형태는 더욱 단순해지고 추상적인 것으로 되어 왔다. 어째서 ‘주름’이라는 형태에 그리 오래 끌렸는지, 주름은 왜 여전히 나를 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것은 주름은 상징적 의미에서 보다 실재성을 갖는 것으로 이행해왔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주름들은 잠재적인 힘의 흔적들, 힘의 형상들이다.

소멸과 생성

이별하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소멸하지 않는 것도 다시 생성될 수 없다. 무엇인가 죽어야만 다른 무엇인가가 산다. 이것이 萬物流轉,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 어느 것도 그저 소멸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단지 에너지의 형태만 바뀐 것이라 하지 않는가. 자연은 언제나 예술가들의 스승이다. 강조하지만 無로부터의 창조란 없다. 나무가 탄다. 검게 그을린다. 그것은 소멸하는 것 같지만 일정한 형태와 색을 만든다. 흑색은 소멸의 힘이자 그것의 흔적이다. 나무에게 불은 붓이고 끌이다. 흔적은 나무와 불의 흔적이지, 불의 흔적만도 나무의 흔적만도 아니다. 그래서 대립하는 것들은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한다. 죽음과 삶이 그렇고, 소멸과 생성이 그렇다.


사유

오늘날 예술은 더 이상 그것이 그것 자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나 역시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보는 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시사 받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상대론자는 아니지만, 관객 없이는 작품도 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관객이 어떻게 느낄지의 문제다. 나 역시 관객이다. 관객은 느끼고 사유한다. 설치는 온몸으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작업이다. 이 때문에 개인전을 열 때면 항상 설치작업을 메인으로 한다. 존재하는 것은 사유한다. 작품은 조각가로서의 사유, 나와 작품존재 사이에 놓인 시간의 단면이다. 이제 나는 이 조각품을 더 이상 이상으로서 바라보지 않으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건 내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넘을 필요는 없다. 전유하면 되는 것이다.

평론


                    연두빛 투각(透刻): 생명의 은유


현대의 예술작품은 관객에게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이제 작품은 관객 없이도 존재하는 상징적 이미지나 질적 형식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관객이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고 느끼면서 비로소 의미가 만들어지는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관객들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자신들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내보인다. 그러니, 애초 작품에 관객의 몫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라는 이번 전시에서 권치규의 작업도 팜플렛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는 전시장을 하나의 숲이나 자연 풍경처럼 만들어 놓았다. 전시장 안은 새 소리, 물 소리가 잔잔히 흐르고, 은은한 조명이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투각 작업 안에 감싸인 연두빛 색채와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지만 메타세콰이어의 울창한 숲 그늘 안에 들어와 있을 때 느끼는 따스한 청량함 같은 것이었다. 그의 투각 작업은 나뭇잎의 초록빛과 햇살로 만들어진 그림자가 어우러진 장면을 연상케 했다. 전시장 전체의 이런 분위기는 그저 작업이 어떤 이미지와 형태로 되어 있는지를 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경험은 대번에 작가가 전시장을 어떤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는지 알게 했고, 작품들의 의미를 선명하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작가는 전시장을 숲과 자연, 정령과 생명의 은유로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관객에게 자연의 생명력, 그 원천적 회복탄력성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싶은 것이다.
전시장엔 나비 날개 모양 같은 미루나무 조형물, 하단의 물을 빨아들여 생명을 싹틔우는 이수목(梨水木), 다이아몬드 형태의 조명으로 표현된 반딧불이, 우주를 상징하는 듯 무수한 가지를 뻗치는 타원형 투각 구조물, 마치 나무들이 겹겹이 우거진 울창한 숲의 풍경을 내다보는 듯한 투각 작품, 그 풍경을 스펙터클처럼 길게 펼쳐 놓은 작업 등이 놓여져 있었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분위기 안에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매우 섬세하게 투각된 형상이 주는 지극한 기술적 요소 때문에 감탄을 주지만 사람들을 위압하거나 의미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조각은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졌지만 그 질량에 비해 감각적으로는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데 이는 양감을 줄 수 있는 표면의 면적과 부피를 덜고 안을 비워내는 투각 방식과 산뜻하고 밝은 연두빛, 더 정확히는 에메랄드 그린에 가까운 색채 때문이다. 대부분 작업에서 어두운 숲 초록, 그린, 연두빛 색채의 조합은 투각 작업의 내겹층들의 색조를 이루었고, 구조물의 겉면을 싸고 있는 다크 그레이의 색채에 가려져 색대비가 주는 직접적인 명시성은 은근한 대비가 되고, 자칫 가볍고 경쾌할 수 있는 연두빛은 자신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한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오늘날 예술작품은 애써 사물과 세계, 우리의 현실에 대해 우리가 갖는 태도에 대해 직시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의 눈과 마음에 변화를 주려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현실이 주는 시공간의 체계와 의미를 뒤틀거나, 의도적으로 우리의 일상적 감각에 비해 매우 이질적으로 나타나면서 우리의 일상적 눈과 마음을 자극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사유와 반성으로 이끈다. 그러나 권치규의 이번 작업들은 감각에 대한 침범이나 사유나 반성의 조작보단 느낌이나 분위기로 다가오려 한다. 집과 거실이 삭막할 때 살아 있는 화분을 넣어 생기를 주는 것처럼, 그의 작업은 마치 콘트리트, 대리석과 금속들로 이루어진 차가운 도시에 영구적인 생기를 지닌 조각적 식물과 숲을 배치하려는 것 같았다.

과거로부터 : 인간적 욕망의 딜레마

한 작가의 예술적 행보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모종의 일관성이나 연속성을 보이는 것도, 또 그 안에서 굵직굵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예술작품을 그것을 창작하는 개인적 측면과 연관시키는 일을 여러 이유에서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술가가 예술작품에 많은 몫을 차지하고, 그의 작품에 그의 인식과 삶의 변화, 그리고 삶과 사물에 대한 태도가 자연스럽게 반영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권치규도 그렇다. 그의 지난 행보를 간략히라도 살펴보는 건 현재의 작업을 들여다보는 눈이 되어 준다.
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 그가 본격적으로 예술계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의 화두는 ‘욕망’이었다. 그것은 『문명과 불만』에서 인간의 본능, 욕망, 자연을 문명과의 투쟁으로 논하던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며 여러 의미를 함의했다. 이를테면, 자연성(자연적, 본능적 욕망)으로부터 이를 사회와 문명적 층위에서 억압하고 승화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순화된 욕망, 카르마와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현세계로부터 이를 초월하려는 일탈의 욕망, 그 자신의 말처럼, “자신이 처한 운명이나 현실에서 더 나은 이상을 향한 상향적 승진이자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며 삶의 고뇌로부터 돌파구를 찾으려는 교두보”(작가노트)를 의미했다. 그의 초창기 작업은 욕망이라는 개념을 지향하고 이를 구체적인 현상과 물질을 통해 상징적으로 조립하는 과정이었으며, 그는 이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실존을 확립하려 했다. 당시 작업들의 제목도 ‘욕망’을 중심으로 , , , <욕망-욕망> 등을 조합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그에게 욕망은 삶 그 자체, 혹은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의 ‘욕망’ 개념은 인간을 규정하는 제 1의 원리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란 무엇보다 욕망하는 인간homo cupiens이었다. 그에게 인간의 욕망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이해하고 탐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모든 존재의 삶은 우선은 살아 남고, 더better 잘 살고, 더욱 더better and better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지극한 현실이고 지향성이다. 권치규가 말하는 욕망이도 바로 존재가 스스로 존재하려는 의지, 나아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향상 의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작업에 접근하려면 우선 그의 작업의 형식적 구조와 조각적 수사rhetoric에 접근해야 한다. 예술은 단순한 추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고 구체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 즉 작품을 통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욕망’이라는 큰 키워드 아래 ‘구조의 딜레마’를 조각 언어로 표현해 왔다. 구조의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실존임에도 사회적 구조와 체계 속에 산다. 우리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기능할 때 안도한다. 그러나 그 구조 안의 기능에 충실할 때 우리는 구조의 부속품이 되고 우리 자신은 사라진다. 반면, 이 구조를 벗어나는 순간 상징적, 사회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라캉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본래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의 선택지에 있는지 모른다. 그의 작업은 한 동안 이 딜레마를 사유하고 이로부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실존적 몸부림을 담고 있다.
이 예술적 행위엔 그가 생각하는 욕망이 무엇인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작업은 조형적, 형식적 구조나 상황적, 개념적 요소의 대립을 기본적 구조로 하며, 이 구조는 매우 상징적 수사로 드러난다. 작업에 구조적 선명함과 상징성을 주는 일은 예술가의 오랜 미적 덕목 중 하나인데, 그는 이런 일에 탁월하다. 그 프로토타입이 「일탈Ⅲ」(2004)이며, 이후 이 주제와 구조는 하나의 양식처럼 나타난다. 이 작업은 인간의 실루엣 모양을 한 터널형 관 형태를 자신의 외형의 잔상을 짙게 드리우며 빠져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터널은 그 육중한 양감만큼이나 구조와 체계의 굴레를 상징하며, 인간이 빠져나온 만큼의 여백의 공간은 구조 자체가 바로 인간의 외피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인간과 구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나 이 무게를 짊어진 인간은 어떻게든 거기서 빠져나오려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며, 그로부터 문명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 상황이고 곧 인간의 조건이다. 이후 몇 년 동안 인간-자연-문명-욕망을 둘러싼 문제의식은 그의 조각 언어를 지배했다. 아마도 그 절정에 도달한 작업이 (2010)일 것이다. 우주를 상징하는 원형 원반 위에 반쯤만 내민 반가사유상의 얼굴, 충격적이게도 석가의 나발을 대신하고 있는 바벨탑, 바벨탑의 맨 꼭대기에 올려진 나무 한그루. 이 작업은 관객을 깊은 명상과 사유의 세계로 이끈다.

인간의 ‘욕망’에서 존재의 ‘힘’으로

그러나, 그가 이 대립을 모순적 딜레마로만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개념적 대립의 세계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2007년 이후 그의 작품은 대립되는 것들 간의 연속성과 종합의 가능성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에서 줄곧 나타났던 주름의 패턴들은 개념적으로나 겉보기에 대립하는 것, 즉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음과 양, 자연, 인간, 문명, 욕망, 그리고 사물과 세계 자체에 내재한 연속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 주름은 마치 들뢰즈의 주름처럼, 펼쳐지면서 접혀지고, 분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분화하는 것, 내보이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 나타나면서 동시에 물러나는 것의 이중성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겉보기에 개념적으로 대립하지만, 실은 그것은 인식과 개념 안에서의 대립일 뿐 그것을 낳는 더 근본적인 것의 두 측면일 뿐일 수 있다. 그것은 대립이라기보다는 한 몸의 분화이자 상생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조각 그 자체는 권치규의 의식과 개념을 앞서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각적 전개는 이미 현재의 작업이 나아갈 길을 예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대립이라는 관념을 온전히 버리지는 못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2010년에 조각적 형태였던 주름을 실제의 고무줄로 대체한 작업에서는 여전히 <생명-대립>이라는 주제, 인간-자연-문명의 표면적 대립은 나타나고 있었다.
평론가 김윤섭의 말처럼, 고무줄은 그 자체로 “긴장과 이완이 한 몸에서 반복된다는 점에서” 권치규의 작업은 이 질료가 가진 성질 덕분에 어떤 전기를 마련하는 듯하다. 양극단에 위치한 대립적 형상을 이어주던 주름의 구조물을 실제 고무줄로 대체한 것은 대립되는 것 간의 역동적이고 실제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 전의 작업이 정적이었다면, 이 동적인 작업들은 대립되고 있는 양극단(인간-문명, 문명-자연)의 대립이 언제든 수축하고 이완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또한 이 역동적 긴장은 곧 실제적인 힘을 가리킨다. 추측건대, 고무줄 작업 이후 욕망을 대립의 관점에서 이해했던 방식은 고무줄이라는 실제적인 질료와 만나 욕망의 보편적 이름, 즉 ‘힘’으로 개화한다. 이는 또 다른 중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힘의 보편성은 이미 욕망의 인간중심적 관점을 벗어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그러니까 존재론적 입장에서 보면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감각과 인식의 변화는 2011년에서 13년에 이르는 작업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마치 비닐과 같은 탄력적인 섬유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채 총기나 기계 부품과 같은 사물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만들어진 작업들에서 더는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예술적 탐구는 사물들 자체에 집중된다. 이 작업에서 욕망은 확실히 ‘힘’에 대한 개념으로 바뀌었고, 당장 드러나 있는 현실적인 것보다는 보이지 않고 현실화되지 않지만 있는 것, 즉 잠재적인 것에 대한 관념으로 이동했다. 잠재적 힘에 대한 관념과 고무줄의 탄력성에 대한 물성의 실험은 이제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으로 종합되면서 2014년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제목과 주제로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금번의 展은 이 회복탄력성 연작의 일환이다.

생명의 힘 : 회복탄력성

회복탄력성의 개념은 여러 분야에 사용된다. 사물의 형상이 변형된 후 원래대로 되돌아가려는 형상복원력, 인간이 트라우마나 비극과 같은 여러 스트레스 상황에 잘 적응하고 건강한 상태로 회복하는 심리적 능력, 이를 더 확장한 bio-resilience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 가는 유기체의 능력 일반을 의미한다. 이쯤에 이르면 그의 작업에서 욕망이라는 인간적 표제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 왜 생물학적인 것인가. 회복탄력성은 단순히 기존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변화하고 나아가 환경을 다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권치규는 인류에게 큰 시련과 비극으로 다가온 코로나 환경, 그로부터 생긴 코로나 블루의 심리적 상황에 사람들이 자연의 대처능력을 몸으로 느끼고 환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예술적 관심은 자신의 삶의 문제로부터 시작해 인간과 문명 세계, 마지막으로 자연과 존재 일반으로 진행해 왔다. 인간-자연-문명 간의 욕망의 힘겨루기는 사라지고 근원적 종합에 이른 것이다. 욕망의 근원은 생명성 그 자체이다. 대립의 개념은 본능 에너지와 자연의 거대한 힘을 억압하려는 사회와 문명이 만들어 낸 허위의식일 뿐이다. 인간, 자연, 그리고 사물은 생명과 존재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종합 의식은 그의 조각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Bio-resilience展에서 대립과 연속성의 이중성은 이제 연속성과 전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그가 이제 세계를 대립적 투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는 세계나 자연과 맞서지 않는다. 이 관념과 태도의 변화는 작품 구조의 두 가지 굵직한 변화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는 역시 형식적 구조에서고 다른 하나는 수사법에서다. 그의 전 작업들은 양극의 상징적 대립을 내세우는 데 탁월한 면모를 보였지만, 이제 그러한 대립은 사라지고, 대신 이 구조적 대립은 안과 밖, 외피와 내피, 외층과 내층,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 간의 층층의 연속성으로 변화했다. 이 겹층의 투각 구조에서 위에서 나열한 것들은 대립이 아니라 연속성의 층위들이다. 그것은 과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우주를 하위 체계, 체계, 상위체계의 단절 없는 전체wholeness라고 말할 때의 것, 하나와 전체가 유기적으로 얽힌 세계를 함축한다. 나의 몸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수한 층들의 동시적 존재이다. 나의 몸은 양자적 세계이기도 하며, 원자, 분자, 세포, 조직, 기관, 뼈, 피부와 같은 공간적, 구조적 층들의 전체이며, 이 층들은 서로 다른 시간의 층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층들을 우리는 대립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적 연속성은 투각의 구조물들은 물론 빨아들여 싹을 틔우는 이수목 조형물에서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대립이 아니라 흐름과 연속이 있다. 결과적으로, 투각 구조는 곧 연속적 층위의 전체성이다.
그의 작업의 기본적인 수사에도 역시 다소간 변화가 일어났다. 상징성이 강한 작업에서 이제는 관객의 경험과 느낌에 직접 주어지는 효과와 그 효과의 은유적인 방식이 더해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는 기본적으로 한 사물에게 유나 종의 이동에 의해 다른 사물의 이름을 주는 방식이다. ‘아킬레스는 사자다’도 하나의 은유다. 그러나, 은유는 아킬레스를 온전히 사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은유는 아킬레스와 사자의 유사성에 의해서도 작동하지만, 거기엔 항상 차이가 남겨지기 때문에 항상 숨겨진 것이 있다. 또 은유는 ‘행복은 위’, ‘인생의 여정’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체험이나 구조로 그 의미가 손에 잡힐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번 Bio-resilience展에서 은유의 핵심은 색채다. 그는 “각각의 오브제들은 어떤 색으로 입혀질 때 비로소 그것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즉 색은 그들의 존재방식, 기분, 표정, 성격을 보여주는, 오브제에 맞는 옷”이라고 말한다. 스테인리스 투각 구조물 안의 내층을 이루는 형광빛 연두색, 에메랄드 그린은 자연과 생명의 존재 방식과 표정을 은유한다. 그래서 연두빛 색채들은 생명의 은유이기에 생명 그 자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생명의 한 특성이나 모습을 그 색채들의 특성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권치규 작업에서 최종적 은유는 이렇게 표현된다. ‘생명은 연두색이다.’ 그의 작품들 전체와 전시장은 바로 이 은유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생명 있는 것들의 힘, 회복탄력성은 그 자체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외부의 힘이 압박하건, 환경이 우리를 시험하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건, 역경이 존재에게 고통을 가할 때 비로소 그때 그 힘이 자신을 발휘할 수 있고, 우리도 그제서야 그 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권치규의 작업에서도 연두빛 생명의 힘과 그 표정은 투각의 겹층 구조 때문에 반쯤 가려지고 반쯤 드러난다. 어쨌건 그것들은 직접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외피 밖의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지만, 그에 화답하고 느끼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의 몫이다. 필자는 가끔 식물들을 볼 때 그 존재 자체에 경이로움을 느끼곤 한다. 모든 있는 것들은 있는 것들 그 자체로도 하나의 경이다. 있을 이유가 없었다면 없었을테니 말이다. 어떤 모습이건 이 현실 안에 우리에게 자신들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시시때때로 변하고 우리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숨 가뿐 도시 일상은 이들을 하나의 존재로 볼 여유도, 그들을 온전히 느낄 시간과 공간도 주지 않는다. 도시공간 안의 자연물들은 도시의 장식품처럼, 마치 산소를 제공하는 기능품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들이 주는 생명의 존재감은 이런 개념과 기능, 도시 구조의 일부가 되고 만다. 예술작품이라는 독특한 사물들이 없을 때 우리의 바쁜 걸음은 늘 그렇듯 가로수나 화분의 식물들을 지나치고 말 것이다. 권치규는 딱딱한 껍질로 덮인 그 사물들 안에 실은 우리 자신을 치유할 생명의 원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어 한다. 예술가는 존재의 이 미세한 표정에 공감하고 우리 앞에 어떤 이유가 있게 나타나게 만든다. 권치규의 염원처럼, 코로나 블루에 침식되길 거부하고 자연과 우리의 회복탄력성을 믿는다면, 코로나 시대를 무사히 헤쳐갈 수 있을 것이다.


조경진(미술비평, 철학박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