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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

작가 작품

TV 피노키오(TV Pinocchio)

FRP, Camera, Monitor_1800×1000mm_2015

TV 피노키오(TV Pinocchio)

FRP, Camera, Monitor_1800×1000mm_2015

가난한 마음을 위하여(For the sake of poor)

Bronze_가변설치_1994

고흐 해바라기(Sunflower of Gogh)

Sculpture, Painting_800×960×240mm_2013

고흐 해바라기(Sunflower of Gogh)

Sculpture, Painting_800×960×240mm_2013

다비드 건담(David Gundam)

FRP, mother of pearl, 360×450×1600mm_2016

다비드 건담(David Gundam)

FRP, mother of pearl, 360×450×1600mm_2016

다시 태어나는 빛 2014(Reborn Light 2014)

CRT TV, LCD TV, Camera, Objets, Water 900×900×3400mm

다시 태어나는 빛 2014(Reborn Light 2014)

CRT TV, LCD TV, Camera, Objets, Water 900×900×3400mm

다시 태어나는 빛(Born again Light)

FRP, motor_3400×900×1600mm_2014

다시 태어나는 빛(Born again Light)

FRP, motor_3400×900×1600mm_2014

다시 태어나는 빛(Born again Light)

FRP, motor_3400×900×1600mm_2014

비너스 발견 2011(Find of Venus_Sculpture, Mother of Pearl

900×2200mm_2011

비너스 발견 2011(Find of Venus_Sculpture, Mother of Pearl

900×2200mm_2011

비너스 발견 2011(Find of Venus_Sculpture, Mother of Pearl

900×2200mm_2011

빛의 비너스(Light of Venus)

FRP, Mixed media_1100×550×1900mm_2014

빛의 비너스(Light of Venus)

FRP, Mixed media_1100×550×1900mm_2014

코뿔소는 왜 밀림에서 쫓겨났을까 (Why was the rhinoceros driven out of the jungle)

FRP, Mixed media_1900×550×1100mm_2014

코뿔소는 왜 밀림에서 쫓겨났을까 (Why was the rhinoceros driven out of the jungle)

FRP, Mixed media_1900×550×1100mm_2014

작가 프로필

이이남
2017 조선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 박사
1997 조선대학교 대학원 순수미술 석사
1995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개인전(60여회)
2019 다시 태어나는 빛–뿌리들의 일어섬 (IESA대학, 파리, 프랑스)
이이남, 빛의 조우 (서울식물원, 서울)
2018 Re-Animator (폰토니갤러리, 런던, 영국)
2016 UPDATE6 (지브라스트라트, 겐트, 벨기에)
Lee, Lee-Nam Selected Exhibition (카타르 아트센터, 카타르)
2015 키갈리 국경일 기념전 (주르완다 대한민국 대사관, 르완다)
2014 Heritage, Legacy and Light (파리유네스코 본부, 파리, 프랑스)

단체전(800여회)
2020 The Bunker (광주문화재단, 광주)
각자의 시선 (호랑가시나무아트폴리곤, 광주)
2019 ‘Flim & Arts’, 뿌리들의 일어섬전 (스타시네마, 테이트모던, 런던)
2018 4.27 남북정상회담 ‘평화, 새로운 시작’ (판문점 평화의 집, 경기도 파주)
백남준 · 이이남 미디어아트전 (카이스트, 대전)
2017 ‘taste of tea’, 이스탄불비엔날레 특별전 (hydarpasa 기차역, 이스탄불)
러시아 사이버페스트 (세인트 피터스버그, 러시아)
2016 빌비올라-이이남 2인전 (세인트 제이콥 교회, 겐트, 벨기에)
2015 ‘개인의 구축물’전, 베니스비엔날레 (팔라초모라, 이탈리아)
2014 동시적울림 (포르타밧 미술관, 아르헨티나)
2009 차 문화 대전 (예일대학교미술관, 코네티컷, 미국)
2007 아시아의 새로운 물결 (ZKM, 카를스루에, 독일)

작품 소장처
토마 파운데이션(미국), 지브라스트라트 미술관(벨기에), 아시아미술관(샌 프란시스코), 예일대학교(미국), 소더비(홍콩), 국립 중앙박물관(서울)
외 다수

작가 노트

				디지털 매체를 매개로 현대적인 관점과 이슈, 문화들을 접목시켜 현대인에게 삶의 가치와
행복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뉴미디어아트는 시·공간적 환영으로 인식되며, 시대와 공간의 의식 세계가 뒤얽혀 있어 여러
파편들의 중첩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의미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살아 숨 쉬는
뉴미디어아트의 특성일 것이다.
현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문화 간의 교류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인간의
미디어 활용은 정치와 문화 그리고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새로운 예술을 구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작가는 이곳에서 작품을 통한 고전과 현대, 인류와 자연, 동양과 서양, 창작과 복제,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기술 사이의 교차점에 있으며, 수시로 미술학을 거론하며 여러 가지
전통과 현대적인 미디어 기술, 문화적인 역사 간의 대화를 조성하고자 한다.

평론


                    이이남의 미디어 아트
레프 마노비치 (미디어 이론가/뉴욕시립대 교수)
이이남은 자신을 ‘뉴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뉴 미디어 아티스트’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1990년
대 미국, 유럽 그리고 일본에서 “뉴 미디어 아트”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컴퓨터를 사용한
다는 것은 명령어의 구성을 통해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명령어들은 모니터
에 보이는 화면을 변경하고, 컴퓨터에 연결된 다른 장치들을 제어하며, 주변 환경을 감지하여 관객 및 주변
공간과 상호작용하도록 한다. 1990년대 뉴 미디어 아트의 예로는 작가들의 웹사이트, CD-ROM을 이용한 인
터랙티브 인터페이스, 그리고 인터랙티브 설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동유럽과 남미에서는 작가들이
비디오 기기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뉴 미디어 아트’는 ‘비디오 아트’를 의미하기도 했다.
오늘날, 컴퓨터에 의존하지 않은 생산, 출판 그리고 감상을 위한 문화 상품이나 체험은 찾기 어려워 졌다. 예
를 들어 음악, 건축, 공간 디자인, 제품 디자인,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제작된
다. 또한 비디오게임, 수백만 개의 모바일 앱, 웹사이트, 그리고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에서 공유되는 이미지와
동영상은 서버, 모바일 기기, 인터넷, WIFI,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소프트웨어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뉴 미디어 아티스트’, 또는 간단히 ‘미디어 아티스트’는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할까? 이이남
은 다수의 작품에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설치, 퍼포먼스, 장소 특정적 예술이 발전하기도 전에, 이미 1950년대부터 컴퓨
터를 이용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따라서 컴퓨터 아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미술 양식만큼이나 오래되었
고, 최신의 미술 양식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이남은 좀더 깊은 의미에서의 (뉴)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는 스마트폰, 초고속 네트워크, 또는 오픈 소스
하드웨어와 같은 최신 미디어 기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의 미디어 기술들은 때로 향수를 불러 일으
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왜 TV를 짊어졌을까? (2014)에서 그리스도는 최신 삼성 평면 TV가 아
니라, 작가가 청소년기에 봤을 법한 오래된 옛날 TV를 옮기고 있다. 그가 미디어 아티스트로 평가 받는 이유
는 그의 작품이 미디어의 역사와 인간이 사용하는 미디어 기술들의 표현적이고 미학적인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이남은 마치 미디어 역사가(또는 미디어 고고학자)처럼, 두 개 또는 더 많은 매체를 병치하
는 비교 연구법을 사용하여 서로를 대면하도록 하고, 그것들의 한계를 드러내고, 매체의 성질들을 교환하고,
새로운 관계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병치는 ‘기존의 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 ‘아날로그’와 ‘디지털’, 또는 ‘조각’과 ‘애니메이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대립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이남의 예술에 적용되지 않는
다. 대신, 우리는 그가 다양한 미디어 재료를 이용한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 재료들은 권력, 전쟁, 종교,
천연자원 착취, 인간 간의 경쟁, 빈곤, 고통, 황홀과 연결된 그들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그
들 사이의 관계는 이이남의 미디어 아트를 통해 활성화된다.
신-수련 2 (2007)에서, 클로드 모네가 인생의 마지막 30년 동안 그의 정원에서 그린 250 점의 수련 중 한 점
을 배경으로 섬세한 애니메이션이 겹쳐져 있다. 모네는 유화물감의 성질을 최대한으로 연구하여, 물에 반사된
꽃의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한 번의 붓질을 통해 회화적인 흐름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에 더해진 섬세한 디지
털 애니메이션은 원작에서 캔버스 위의 마른 물감이라는 물성을 줄이고,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처럼
변화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모네가 수련을 그리는 동안 시력을 잃어 갔고, 다른 건강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
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유화 물감이라는 재료가 더 이상 작가의 제어를 받지 않고 새로운 활기를 얻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창조자의 제어 하에 있지 않을 때 재료는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회화 재료의 해방은 인간의 고통과 병을 동반하기도 한다.
다른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처럼, 모네는 또한 일본 판화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공간의 평면성, 우아하고 복
잡한 선들, 비대칭적 구성, 잉크에 적신 붓 자국, 일관된 원근법의 부재, 움직임의 강조, 풍경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의 재창조 등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전통 회화의 특성은 인상파의 시각적 언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후에 근대 서양 미술은 이러한 회화적 언어로부터 발전되었다.
동양화의 이미지들은 이이남의 작품에 자주 나타난다. 원래의 재료에서 벗어나서 빛으로 색을 표현하는 전자
모니터로 옮겨진 이미지는 새로운 힘과 강렬함으로 빛난다. 종이나 비단에서 전자 모니터상으로의 변화는 중
요하다. 이이남은 이미 다른 미디어 기술들간의 통로를 설립해놓은 것이다.
책-산수도(1)에서와 같이, 이이남은 고전 동양화에 움직임을 부여하는데 이는 대단한 역설을 만든다. 중국과
한국의 고전 화가들은 작품에서 움직임을 전달하고 끊임없는 변화감을 주기 위해 정교한 기술을 발전시켰다.
평면적인 배경으로 사라지는 언덕과 산의 모양, 고의적으로 보이는 붓 자국, 특정적인 풍경의 선택은 정적인
이미지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이러한 그림들을 이미 애니메이션의 한 종류로 본다면, 왜 현대 작가들은 여기
에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더해야만 할까?
나는 동양화와 결합된 애니메이션의 역할 중 하나는, 예전에는 삶의 흐름 - 즉 오늘날 애니메이션이 가진 역
할 - 을 보여줬던 전통 동양화가 이제는 유리 케이스와 경비원, 경비 시스템으로 보호되는 박물관의 소장품
이 되어버린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들은 또한 미술 시장, 화랑 시스템, 박물관과 소장가
들의 포로가 되었다. 실제 동양화가 미술관에 갇혀 있는 동안, 이이남의 장난기 많고 유머러스한 애니메이션
들은 원작의 흐름과 움직임을 재창조한다. (게다가 책-산수화에서는 두 개의 고전 그림들이 미술품 경매 도록
에 인쇄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책-산수화에서는 그림 전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Dreamscape 1)(2)
작고 뚜렷한 요소들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조그만 인물들이 그림을 가로지르고 새들은 그 위를 날아다닌다.
작은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제한된 애니메이션은 스트로보스코프 stroboscope, 페나키스토스코프
phenakistoscope, 주프락시스코프 zoopraxiscope, 조에트로프 zoetrope 등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 19세기의
다양한 미디어 기술을 생각나게끔 한다. 이이남의 작품에서 보이는, 고전 회화에 덧붙여진 움직이는 디테일처
럼, 이러한 기술들은 오직 한 개 또는 몇 개의 움직이는 인물들을 가끔 컬러 배경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이남의 작품들은 다양한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미디어 기술과 그들의 문화사 간의 소통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림의 역사를 논하는 ‘화가’나 조각의 역사를 말하는 ‘조각가’와는 달리, 이것이 이이남이 미디어 아티스트인
이유이다. 이이남의 작품에서는 서양의 유화나 동양화, 조각, 영화, TV, 금속, 물, 빛, 전기 등 다양한 매체를
만나게 된다. 그의 작품을 즐긴다면, 그것들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세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http://www.seditionart.com/lee_lee_nam/book-landscape.
2. http://www.seditionart.com/lee_lee_nam/dreamscape_1.


살아있는 그림(les peintures vivantes)
류병학(미술평론가)

세인들은 그를 ‘제2의 백남준’이라 부른다.
그는 컨버전스 분야 세계 석학인 존 라이크만(John Rajchman)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로부터 극찬을
받아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모션 포스터를
제작하여 세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삼성전자와 5년 동안 콘텐츠 제공 전속계약을 맺고 55인치와
46인치 LED TV에 자신의 작품 3점을 내장하여 출시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작년 G20 서울정상회담 때
주요 회의장과 각국 정상이 머무는 호텔 숙소에 비치된 TV와 아이패드, 갤럭시탭 등을 통해 작품을
설치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작년 말부터 애플 앱스토어에서 유료로 서비스되고 있다. 그는
최근 영국의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과 함께 《동화책 속 세계여행》전을 개최했다. 그의 작품들은
올해 발행된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전 세계 미술작가 500명의 작품 가격을 순위별로
기록한 ‘아트 프라이스’에 그는 363위를 차지했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광주 토박이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이다. 그의 작품은 여타의 미디어 아티스트 작품과 달리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와이? 왜 그의 미디어 아트가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는 대중의 코드와 동양/서양의 코드를 읽어내는 ‘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의 코드와 동양/서양의 코드란 대중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동양/서양의 명화를
차용한다는 것에 국한되기보다 그 동양/서양의 명화에 대한 현실인식을 관통한 탁월한 분석력을
뜻한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 구체적인 작품을 사례로 들어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의
일명 ‘디지털-명화’를 언급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디지털-명화가 태동하게 된 초기 작업을 살펴보아야만
할 것 같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광주 조선대와 동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 후 조각 작품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과 전국조각가협회 특별상도 받았다. 그런 조각가 이이남을 미디어 아티스트로
전이시킨 ‘사건’은 무엇일까? 그가 1997년 순천대 애니메이션학과에서 미술해부학 강의를 맡았을 때,
학생들이 찰흙으로 스톱 애니메이션 작업하는 것을 보고 ‘움직이는 조각’에 삘이 꽂힌다. 그는 곧
17인치짜리 작은 모니터를 구입해, 그의 전공인 조각을 살려 클레이 스톱 애니메이션, 즉 ‘움직이는
조각’ 영상을 만든다.
1998년 제작된 이이남의 클레이 아트 애니메이션 <4학년>은 플라스틱에 담겨있던 찰흙 덩어리로 당시
순천대 애니메이션학과 4학년 학생들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작업이다. 찰흙 덩어리로 만들어진
남학생은 다시 찰흙 덩어리로 돌아가 곧 여학생으로 변신한다. 물론 이이남은 찰흙 덩어리로 학생들
이외에 다양한 동물들(개, 고양이, 호랑이)들도 만들었다. 특히 호랑이가 자신의 꼬리를 잘라 먹는
장면을 보면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찰흙 스톱 애니메이션은 이이남의 작업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를테면 이이남은 찰흙 스톱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전의 ‘무거운’ 조각에서 해방되어) ‘가볍게’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은 우리 상식을 뒤집는 ‘유머 감각’을 뜻한다.
그 ‘가벼움’은 그의 디지털-명화에서 대중적 호응을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0년대 말 다양한 클레이 아트 애니메이션을 작업했던 이이남은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래픽
애니메이션 작업에 몰두한다. 그는 2002년 SK텔레콤 애니메이션 공모전에 <자살>을 출품하여 대상을
받는다. <자살>은 선비와 물고기의 자살법을 그린 것인데, 선비가 돌에 매달려 물속으로 들어가는
반면, 물고기는 풍선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간다. 너무나도 참을 수 없는 자살의 가벼움이 아닌가?
<선악과>는 사과를 사이에 두고 하와와 뱀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던
‘선악과’와 달리 이이남의 <선악과>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하와는 사과가 아닌 뱀을 잡아
먹으면서 관객에게 윙크하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무를 자르는 남자에 대한 나무의 복수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나무를 자르던 남자가 나무의 그늘에서 누워 잠잔다. 그런데 나무는 자신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나무를 자른 남자에게 복수한다. 은 사격표지판에 대한 엉뚱한 발상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총알에 맞은 표지판들은 모두 울상이다. 그런데 총알을 맞지 않은 표지판은
낄낄거린다. 왜냐하면 그 웃는 표지판은 날라오는 총알들을 모두 피했기 때문이다. 총알을 피할 수
없는 표지판이 총알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발상은 이후 ‘그림의 떡’으로 알려진 명화를 움직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 한다.
이이남은 2004년에 오브제에 모니터를 접목시킨 다양한 작품을 제작한다. 〈밥 먹고 잠자라〉는 옛
교실 의자 위에 놓인 도시락의 뚫린 구멍으로 하늘의 구름이 떠가는 영상이 나오는 작품이다.
〈호주머니 속 풍경〉은 옷걸이에 걸린 자킷 호주머니 속에 모니터를 장착해 마치 호주머니 속에
동전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생명으로부터>는 고목에 모니터를 장착해 초록 꽃잎들이 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브제와 모니터의 접목 작업은 2005년까지 이어진다. 이이남의 <아이 러브 골프>는
골프장 영상과 (홀컵의 위치를 알려주는) 실제 깃발로 접목된 일종의 영상설치작업이다. 전시장 벽면에
골프를 치고 있는 골프장 영상이 투사된다. 그리고 그 골프장 영상 앞에 실재 깃발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라이트로 인해 그 깃발의 그림자가 영상에 겹쳐진다. 따라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마치 그
그림자-깃발을 향해 스윙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이이남은 2005년 <실상과 허상> 시리즈 작품을 제작한다. 이이남은 '에스파냐의 카라바조'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의 <정물화(Bodegon)>(1636)에서 가운데 화병 2개
대신에 장미꽃과 유리잔을 교체시켜 놓았다. 그런데 유리잔을 보면 영상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그
영상은 어느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실상과
허상>을 보고 있는 관객은 유리잔 속에 담겨있는 관객과 다르지 않단 말인가? 그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관객은 작품 앞에서 단 5초도 서있지 않는다. 관객들은 전시장의 작품을 마치
지나가면서 보듯이 지나친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실상과 허상>은 마치 금욕적인 수르바란의
정물화처럼 관객에게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라고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전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이이남은 “제 작품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때
가슴이 쓰립니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알 수 없는 작품 앞에서 시간을
할애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우리가 축구경기를 즐기려면 최소한 축구 룰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객이 미술작품을 즐기고자 한다면 미술의 룰(미술사의 문맥)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가 "관객이 한 그림 앞에 최소한 5분만 서있었으면 좋겠다"고
원했다. 그러나 관객은 작품 앞에서 5분은 고사하고 5초도 서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이남은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니엘 아라스가 기대한 5분 동안 서있도록 하기위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지나가는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이남은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 위해
우리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디지털 기술에 주목한다.
이이남의 ‘명화는 살아있다!’
이이남은 2004년 이이남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명화의 재매개(remediation) 작품을 제작한다. <김홍도,
신-묵죽도>가 그것이다. 김홍도의 <묵죽도>는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그린
것이다. 김홍도는 대나무 줄기를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쳤다. 조선시대 대부분 ‘묵죽도’가
오른쪽으로 쳤다는 점을 참조한다면, 김홍도의 <묵죽도>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민환은
어디선가 김정희의 난초 화법을 빌려 대나무를 오른쪽으로 치는 것보다 왼쪽으로 치는 것이 몇 배
어려운 기술이라고 말하면서 왼쪽으로 순식간에 처내려간 김홍도의 <묵죽도>를 놀라운 기교를 과시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단원에게 대나무는 흔히 말하는 ‘군자’의 상징으로서의 고결한 대나무가 아니라
필치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소재일 뿐이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대나무 줄기의 필치를 보면 밑에서 위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의 농담은 줄기 하단보다 상단이 진하다. 그렇다면 대나무는 바람에
대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자, 이제 이이남의 <신-묵죽도>를 보자. 오잉? 이이남의 <신-묵죽도> 대나무는 마치 ‘절개’를 비웃듯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움직일 수 없다고 확신한 그림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흔들리는 대나무 위로 눈이 내리는 것이다.
눈은 대나무 위에 서서히 쌓인다. 그리고 대나무 위의 쌓인 눈은 차츰 녹아 원래의 모습으로 컴백하는
것이 아닌가?
이이남의 <신-묵죽도>는 김홍도의 <묵죽도>를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다. 여기서 재매개는 기존
미디어(회화)를 디지털로 미디어화 시킨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이이남의 디지털 아트는 회화(명화)를
디지털로 재구현(Refashion)시킨 것이라고 말이다. 마치 절개를 지키듯 움직이지 않는 김홍도의
<묵죽도>는 디지털을 통해 마치 절개를 버린 듯 바람에 흔들린다. 이이남의 <신-묵죽도>를 보는
관객은 사색에 잠기기는커녕 오히려 놀란다. 그렇다! 관객은 이이남의 <신-묵죽도> 앞에서 4분을
즐긴다.
이이남의 재매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6년이다. 이이남의 대표작들 중 하나인 <8폭
병풍>도 2006년에 제작된다. 잔잔한 가야금 소리와 함께 소치 허련의 <홍매도>의 텍스트(제발)이
바람에 날리듯 의제 허백련의 <묵죽도> 화폭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나비를 전문적으로 그렸다고 하여
‘남나비’로 불렸던 남계우의 <화접도>에 그려진 나비가 갑자기 날개 짓을 하더니 의제의 <산수화>
화폭으로 사뿐사뿐 날아간다. 도대체 ‘그림의 떡’인 나비가 어떻게 날개 짓을 하면서 날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8폭 병풍의 화폭이 화선지가 아니라 LCD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기 스위치를 켜면
병풍에서 가야금 소리가 나오고 나비가 날아다니고, 꽃잎과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일반 관객은 21세기 미디어 병풍 앞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런닝타임 5분 30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즐긴다. 그렇다! 이이남은 다니엘 아라스가 일반 관객에게 기대했던 5분을 돌파한 것이다! 이것은
감상적 측면에서 보자면 혁명이 아닌가?
2006년 이이남은 동양과 서양의 심장이 멈춘 명화들에 전기 충격을 주어 살린다. 그렇다면 이이남이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종의 ‘심장전기충격기(defibrillator)’가 아닌가? 이이남은 ‘명화충격기’로
모네의 <수련>과 <해돋이, 인상>, 김홍도의 <황묘롱접도>, 김정희의 <세한도>, 신사임당의 <초충도>,
허백련의 <수묵>을 환생시킨다. 1874년 모네는 안개 낀 르아브르(Le Havre) 항의 일출 풍경을 그린
<해돋이, 인상(Impression, Sunrise)>을 ‘예술가 협회전’에 출품한다. 당시 풍경화의 대가로 알려진
조셉 뱅상이 모네의 그림을 보고 옆에 있던 샤리봐리 신문 미술부 기자 루이 르를와에게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루이 르를와는 “‘해돋이, 인상’이라고 합니다”고 답변했다.
조셉 뱅상 왈, “인상? 아이들의 색종이 쪽이 더 나을 것 같군요.” 루이 르를와 기자는 뱅상의 말을 빌려
‘예술가 협회전’에 전시된 그림들에 대해 단지 인상만을 그렸다는 의미로 (모네의 그림 제목을 빌려)
’인상파 전람회‘라고 기사화 했던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프랑스 미술계 사람들 눈에는 모네의 <해돋이, 인상>이 미완성의 그림으로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모네는 막 떠오르는 해와 어선들 그리고 공장의 연기와 안개가 서로 어우러져 경계가
불분명한 순간의 느낌(인상)을 화폭에 담았다. 소설가 모파상 왈, “모네는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다섯 개의 캔버스 위에 포착하는 포수였다.” 하지만 모네의 <해돋이,
인상>은 한 폭의 캔버스에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르아브르 항의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다섯 개의 캔버스 위에 포착한 포수는 다름아닌 이이남이다. 이이남의 <모네, 신-해돋이 인상>(2006)은
마치 모파상이 말한 것을 제시하듯 다섯 개의 캔버스가 아닌 하나의 모니터에 르아브르 항의 순간순간
변하는 빛과 색의 조화를 표현해 놓았다.
오만원권 지폐(뒷면) 도안에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가 사용되었다. 필자는 한국 근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으로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관념세계가 아닌 현실세계를 표현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이남의 <신사임당, 신-초충도>(2006)는
신사임당의 <초충도> 2점을 스캔 받아 제작한 영상작품이다. 수박 위를 날고 있는 나비를 박제시킨
신사임당의 나비 그림에 이이남은 생명을 주어 날개 짓을 하면서 가지가 그려진 그림으로 날아가게
한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가지 위에 그려놓은 나비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려진 수박으로 날도록 만든다.
이이남은 마치 하느님처럼 정지된 나비(그림), 즉 박제된 나비 이미지를 부활시킨다.

1990년대 말 컴맹으로 시작한 이이남은 2000년 중반 디지털 시대의 대표 아티스트가 되었다.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아날로그의 일루전을 디지털로 재매개한 디지털-
일루전으로 재구현되었다. 이이남의 ‘디지털-명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2006년 흥미롭게도
숀 레비(Shaun Levy)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Night At The Museum)>가 개봉되었다. 물론
이이남은 디지털-명화를 2004년 <신묵죽도>에서 이미 시도했었지만 말이다. ‘박물관’ 하면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의 <상상의 박물관(Le Musee Imaginaire)>(1947)이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다.
앙드레 말로는 <침묵의 소리(The Voices of Silence)>(1953)에서 박물관을 미술의 신전으로 명명했다.
왜냐하면 박물관은 ‘아직’ 예술작품이 아니었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십자가’나 치마부에의 ‘마돈나’
그리고 페이디아스의 ‘아테네 여신’ 등 유물을 예술작품으로 전이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물관이 모든 유물들을 예술작품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점에 앙드레 말로는
주목한다. 박물관은 박물관의 물리적 한계(크기) 때문이 아니라 건축물과 한 몸인 벽화나 모자이크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박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유물들은 박물관으로 운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 각국에 있는 모든 박물관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작품을 볼 수 없다.
앙드레 말로 왈, “오늘날 대학생은 대부분 컬러 사진 복제품인 훌륭한 작품들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또
사진 복제품을 통해 인류의 많은 그림들, 오래된 고대의 예술들, 먼 옛날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인도와
중국의 조각 작품들, 일부 비잔틴 미술품, 로마의 벽화들, 원시적이고 대중적인 예술들을 만날 수 있다.”
앙드레 말로는 사진 복제품을 통해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작품을 볼 수 있음을 간파한다. 따라서
그에게 ‘도록’은 일종의 ‘벽 없는 박물관(Museum without Walls)’이 되는 셈이다. 앙드레 말로는 ‘벽 없는
미술관’을 ‘상상의 박물관’으로 명명했다. 왜냐하면 상상의 박물관은 죽은 유물에 생명력(상상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숀 레비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영화로 재매개한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명화 복제품을 통해 명화를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 아닌가? 숀 레비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마찬가지로 이이남의 디지털-
명화 역시 디지털 기술로 상상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명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이남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모나리자, 모나리자라고 사람들은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당신은 신비의 미소를 떠올리는 숙녀를 꼭
닮았어요. 당신의 모나리자를 닮은 쌀쌀한 미소 때문에, 사내들이 당신을 책망하여 쓸쓸하게
만드는가? 그 미소는 사랑의 유혹인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인가? 많은 꿈이 당신의
집 문을 찾아갔다가 죽었어요. 그대는 따뜻한 사람인가, 차가운 예술품인가?”
냇 킹 콜의 <모나리자(Mona Lisa)> 레코드는 밀리언히트를 했다. 팝 <모나리자>의 작사를 맡은 레이
에반스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를 신비의 미소, 즉 사랑의 유혹인지 아니면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기 위한 미소인지 알 수 없다고 보았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수수께끼는 미소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나리자> 모델이 누군지 그리고 눈썹 부재로 인한 완성/미완성 논란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모나리자의 ‘모나(Mona)’는 이탈리어에서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라고 한다. 국산말로 하자면 ‘리자 여사’가 되겠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의 수수께끼는 표현 기법으로도 논의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배경을
보면 마치 모네의 <해돋이, 인상>처럼 엷은 안개가 덮인 듯 윤곽선이 불분명하게 표현되어 깊이감을
더한다. 윤곽선이 연기처럼 사라지듯 표현한 기법을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라고 부른다. 그
스푸마토 기법이 <모나리자>의 미소에도 사용되어 모호한 미소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이남의 <신-모나리자>(2007)를 보자. 평화롭고 온화하게 보이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이이남의 <신-모나리자>에서 전쟁터로 전이된다. 피아노 연주와 함께 모나리자의 뒷 배경 위로
느닷없이 비행기가 출현한다. 그리고 낙하산이 내려오는가 하면 폭탄이 투여되어 폭발음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 파괴된다. 지금까지는 모나리자 배경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런데 비행기가 갑자기
모나리자 유방 앞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모나리자 배경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모나리자의 눈동자가 그녀의 앞으로 비행기가 등장하자 그 비행기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이이남의 <신-모나리자>를 보면서 필자는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가 떠올랐다.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등장하는 악당이 무섭기는커녕 귀엽게 보이듯이 이이남의 <신-
모나리자>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참혹하기는커녕 귀엽게 느껴진다. 이이남의 <신-모나리자>에서
발생한 전쟁이 참혹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이남의 <신-모나리자> 전쟁이 끝났을 때
원래의 모습으로 컴백되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이이남의 모든 작품들을 조회하게 된다면 문득
떠오르게 될 것이다.
자, 이번에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자. 소녀의
표정이 다빈치의 ‘모나리자’만큼이나 알쏭달쏭하다.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눈은 마치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우리를 향하고 있다.
그것이 궁금했던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제목을 소설을 썼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터 웨버 감독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2003)는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각색한 것이다.
영화는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콜린 퍼스)와 그의 하녀인 그리트(스칼렛 요한슨 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이이남의 <신-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7)는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압축판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이남의 <신-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화가와 모델 사이의 절대적
간격(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아무런 말없이 단 한줄기 눈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당 필자, 이이남의
<신-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
자, 이번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선의 <금강전도>를 보자. 정선의 <금강전도>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마치 활짝 핀 한 떨기 꽃처럼 그려낸 진경산수화의 결정체로 간주된다. 정선은 암산과
숲을 마치 여성의 자궁처럼 절묘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이남의 <신-금강전도>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함께 정선의 수묵 <금강전도>를 푸르게 변화시킨다.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헬리콥터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파리 떼처럼 헬리콥터가 금강산 위를 비행한다. ‘금강산 개발’을 하는 것일까?
망치 소리와 함께 금강산 골짜기 마다 건물이 세워지고, 헬리콥터는 여전히 금강산을 가로지른다.
어디서 강력한 폭탄이라도 터진 듯 하얀 연기는 뭉개 뭉개 피어난다. 어느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 쌓인 금강산의 골짜기 마다 세워진 건물들은 불빛을 반짝인다. 물론 헬리콥터는 여전히 사운드와
함께 금강산 주변을 떠돌고 다닌다. 찬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헬리콥터 소리는 사라진다.
이이남은 <신-금강전도>를 ‘금강전투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흔히 ‘관념적인
산수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을 관통하여 정선 자신만의 시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 ‘금강전도’를 작업한다면 ‘지금 여기’를 관통하여 작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이이남이 본 오늘날의 금강산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그리고 경제적
측면으로 복잡하게 얽힌 곳이다. 이이남의 <신-금강전도>는 그런 복잡한 현실인식을 관통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이남의 탁월한 분석력은 동양과 서양의 명화 선정에도 나타난다. 이이남의 <모네와 소치의 대화>가
그것이다. 이이남은 모네의 <해돋이, 인상>과 소치의 <추경산수화>를 옆으로 나란히 배치해 놓았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에서 해와 배가 소치의 <추경산수화>로 서서히 흘러가고, 소치의 <추경산수화>
전경에 있는 배와 섬이 모네의 <해돋이, 인상>으로 천천히 흘러간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 해가
소치의 <추경산수화> 산 뒤로 은폐되자 모두 밤으로 바뀐다. 밤이 되자 건물들에 불빛이 밝혀진다.
흥미롭게도 소치의 <추경산수화> 전경에 있는 섬의 집에도 불빛이 밝혀진다. 소치의 <추경산수화>에

쓰여진 텍스트(화제)가 마치 바람에 날리듯 모네의 <해돋이, 인상>으로 날라 간다.
이이남의 <모네와 소치의 대화>는 서로 다른 공간/시간에 제작된 모네와 소치의 그림들을 마치 서로
선물을 주고받듯이 디지털로 ‘이동’시켜 자연스럽게 교감한다. 마르셀 뒤샹 이후 급진적인 작품을
하고자 하는 작가라면 ‘빌려쓰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남은 명화를 일종의 ‘레디-메이드’로
사용한다. 물론 그는 명화를 그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명화를 그대로 제시한 것으로
만족했다면, 그는 뒤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명화를 ‘되돌려-먹이기’ 한다,
어떻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가 그것이다.
차도살인지계? 유하는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 밑에 ‘차도살인지계’를 “남의 칼로
적을 침”이라고 언급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신-금강전도>는 이이남 자신의 손이 아니라 ‘남의
손을 빌려 상대방을 치는 작품’이란 말인가? 남의 손을 빌린다? ‘남의 손 빌려쓰기’의 최초 사례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의 <샘>은 남의 손을 빌려 제작한 작품이지만 ‘적’을
치는 작품은 아니다. ‘적’을 치는 작품? 혹 그것인 기존 작품에 똥침을 놓는 작품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그것을 ‘패러디(parody)’로 부른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패러디는 미술작품에서부터 시나 문학 그리고
음악이나 영화 또한 광고에 이르기까지 주로 명작을 모방(인용 혹은 차용)하여 그것을 풍자 또는
조롱하는 작품으로 이해하곤 한다.
패러디의 어원은 paradia이다. 근데 paradia의 접두사 'para'는 이중의 뜻을 지닌다. 하나는
‘대응하는(counter) 혹은 반하는(against)’ 뜻으로 두 작품의 대립 또는 비교로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존 작품을 조롱하거나 우습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 작품을 모방(인용 혹은 차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립이 아닌 ‘이외의(beside)’라는 뜻으로 ‘참조’의 뜻을 지닌다. 오늘날 어느 작가가 기존
작품(혹은 ‘사건’)에 ‘대응’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기존 작품을 분석해야만 할 것이다. 근데 기존
작품을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장난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존 작품(혹은
사건)에 ‘의외의’ 작품을 제작한다? 글타!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기존 명화에 ‘똥침’을 놓는
작품이라기보다 기존 명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이외의’ 작품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차도살인지계'는 해체(deconstruction)의 훌륭한 '무기(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데리다가
싸부의 글을 인용하여 싸부의 폐부를 찌르듯이/해체시키듯이, 이이남은 명화를 차용하여 명화를
해체시킨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이남의 '차도살인지계'는 무엇보다 '옛 작품을 해체'시키기 위해서라도
바로 그 옛 작품을 긍정해야만 한다. 특히 기존 문화에 대한 '똥침'은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때
가능케 되는 것처럼, ‘차도살인지계’ 역시 우리 명화에 대한 자부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부심만 갖고는 2%가 부족하다.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전략! 당신도 알다시피 전략을 구상할
때 상대방의 허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허점? 흔히 그러듯 종교인의 허점은 신앙이듯이 이념을 가진
자의 허점은 그의 신념이다. 그럼 경제인의 허점은? 이윤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허점은? 진실? 만약
예술가의 허점이 진실이라면 아티스트는 진실의 허점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진실의 허점을 어케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놈, 진실은 무슨 얼어 죽을... 모션그래픽 작업이나
열심히 배워라! 껄껄껄.
디지털 팝 아티스트 이이남
아름다운 선녀 그림을 보고 우리는 (특히 넘덜은) ‘그림의 떡’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런 것일까?
북한에서 ‘그림의 떡’을 ‘그림의 선녀’로 쓴다. 미국에서는 그림의 떡을 ‘하늘의 파이(pie in the sky)’로
표기한다. 와이? 미국인들은 하늘의 파이를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 고사성어 중에
화병충기(畵餠充飢)가 있다. 그 고사성어는 ’그림의 떡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다‘라는 뜻한다. 따라서
’화병충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아무런 실속도 없는 일 또는 허황된 상상이나 공상으로서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그 ’화병충기‘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그림의 떡‘으로 사용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림의 떡’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이용할 수 없거나 차지할 수 없는 경우를
뜻한다. 왜냐하면 그려진 떡은 먹을 수 없는 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허황된 생각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그림의 떡은 입이 아닌 눈(시각)으로는 먹을 수 있는
떡이 아닌가? 이를테면 그림의 떡은 시나 영화처럼 우리에게 시각적 허기를 채워준다고 말이다.
그렇다! 그림의 떡은 육체적 배고픔을 채워주지는 못하겠지만 정신적 배고픔을 채워줄 수는 있을
것이다. 원모아, 그림의 떡은 물질적 결핍을 채우지 못하지만 비물질적 결핍을 채워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허황된 상상이나 공상으로 그려진 그림의 떡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아무런 실속도 없는
행위가 아니지 않은가?
필자는 먹을 수 있는 떡만 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로 부르고자 한다.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그림의 떡’을 마치 스스로 위안 삼기위한 구실로 간주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배’는 채울 수 있겠지만 ‘머리’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자신의 ‘머리’ 결핍을 은폐하기 위해 ‘그림의 떡’을 평가절하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떡 중심주의자는 그림의 떡으로 굶주린 머리를 채워야 하지 않을까?
각설(却說), 이번에는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고 그린 정선의 <단발령 망금강>을 보자. 단발령은
금강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고개라고 한다. 단발령? 머리를 깎는다? 단발령의 이름은 단발령에서
바라본 사람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을까? 정선의 <단발령
망금강>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의 시 혹은 아름다운 가야금 소리를 연상케 하는 정선의 <단발령
망금강>은 단발령과 금강산 사이를 광활한 여백으로 처리해 놓았다. 그 여백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느껴진다.
이이남의 <신-단발령 망금강>(2009)은 마치 가야금 운율처럼 느껴지는 피아노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단발령 고개에 당도한 선비들은 아름다운 금강산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금강산과
단발령 사이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더니 최첨단 도시가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선비들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도시 풍경을 보고 놀란다. 몇 선비는 그 소문을 알리기
위해서인 듯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갑자기 단발령 고개에 케이블카가 등장한다. 선비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환상도시 위를 지나 금강산을 향한다. 관객은 이이남의 <신-단발령 망금강>을 보면서 폭소를
터트린다. 하지만 이이남의 <신-단발령 망금강>은 관객에게 케이블카를 탄 선비들이 최첨단 도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조용히 자문하게 한다.
개성시 북부 박연리에 있는 박연폭포는 명유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한다. 박연폭포는 높이 37m, 너비 1.5m로 우리나라 3대 명폭의
하나이다. 정선의 <박연폭포> 높이는 선비의 크기에 비유할 경우 족히 100m가 되어 보이고, 너비는
4m 정도로 보인다. 혹자는 정신의 <박연폭포>를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듣는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이를테면 정선의 <박연폭포>는 청각의 시각화라고 말이다. 물론 정선의 <박연폭포> 크기는 세로
119.4㎝, 가로 51.9㎝이다.
그런데 이이남의 <신-박연폭포> 크기는 46인치 LED TV 여섯 대를 세로로 쌓아 올려 6M에 달한다.
따라서 관객이 이이남의 <신-박연폭포> 앞에 서면 폭포소리와 함께 LED TV로 물줄기가 흘러내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느껴 압도당한다. 물론 이이남의 <신-박연폭포>는 폭포의 장엄함 이외에도
쏠쏠한 재미도 삽입되어 있다. 폭포수 위에 쓰여진 화제와 호 그리고 낙관인이 너럭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어 이루어진 박연 연못에서 폭포수를 따라 용바위가 있는 고모담(姑母潭)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보고 선비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는다. 반면 동자는 무슨 일인지 그림 밖으로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등장해 범사정(泛斯亭) 앞을 배회하기도 한다. 왜 이이남은 정선(이름)을 폭포수로 떨어트린
것일까?
한 선비 왈,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박진사가 그 폭포에 놀러왔다가 폭포 밑 못 속에 사는 용녀(龍女)에게
한눈에 반해 부모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모른 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귀가하지 않자 그 폭포에서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폭포 밑 담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담을 고모담이라 하고, 박씨의 성을 따서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다른
선비 왈, “다른 전설에 의하면 박진사가 폭포의 장관에 반해 폭포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주변을

배회하는 동자가 중얼거리기를 “겸재 선생님께서 박연폭포의 장관을 그리고 나서 빠져 죽은 것은
아닐까?”
2009년 이이남은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모델 삼아 작업하기도 했다.
이이남의 <신-마를린 먼로>는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를 디지털로 재매개 시킨다. 흔히 마를린
먼론의 트레이드마크로 입술 위의 점을 든다. 이이남은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의 점을 천천히
움직여 이마에 위치시켜 놓았다. 이마에 점이 있는 마를린 먼로? 이이남이 마를린 먼로의 점에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팝 아티스로 리히텐슈타인의 <우는 여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의 상징은 바로 일종의 ‘망점’이다. 이이남의 <신-우는 소녀>는 눈물을
흘리는데, 바로 그 흘린 눈물 때문에 망점들이 사라진다(날아간다)는 점이다. 마치 눈물 때문에 화장이
지워지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우는 여자’인가?
2008년 <모네와 소치의 대화>를 시도했던 이이남은 2009년 <겸재 정선과 세잔>의 교감을 시도한다.
이이남의 <겸재 정선과 세잔>은 정선의 <장안연월>과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을 모델로 삼은
작업이다. 정선이 1741년경 안개 낀 밤의 남산의 풍경을 그린 <장안연월>과 세잔이 1904년경 그린 <생
빅투아르 산>이 만난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모네와 소치의 대화>처럼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한 화면에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우선 정선의 <장안연월>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마치
먹이 번지듯이 풍경이 번진다. 그 번진 자국에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이 오버랩 되어 결국 정선의
<장안연월>은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으로 전이된다. 흥미롭게도 정선의 <장안연월>과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선의 <장안연월>은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보다
100년이 넘는 시기에 그려졌다.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에 제작된 그림들이 이이남의 디지털 아트로
서로 스며든다.
이이남이 차용한 명화들은 대부분 자연을 그린 그림들이다. 왜일까? 왜 그는 자연을 그린 명화를 즐겨
차용한 것일까? 그는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대학시절까지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다. 물론 그는
당시 "농삿일이 죽도록 싫었다“고 한다. 그는 ”왜 시골에서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할까“를 입에 달고
살았단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의 ”시골 경험이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의제 허백련의 그림을 적잖이 차용했는데, 허백련 그림에 그려진 풍경이 이이남의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을 그린 그림들을 자연스럽게 즐겨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온화하고 서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이남의 작품들을 보고 ‘착하고’ ‘예쁘고’ ‘범생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아냥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는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아트’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무거움’을
‘어깨’에 짊어지게 하기보다 오히려 웃음(가벼움)을 선사하는 ‘행복전도사’를 자처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이남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디지털
팝 아티스트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디지털 팝 아티스트인 이이남은 좀 더 대중에게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유통문화’를 만들고 있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저렴한 가격으로 작품을 구입해서 벌 수
있는 유통구조 말이다.
앙드레 말로는 “상상의 미술관이 자신의 변모를 계속 추구한다”고 진술했다. 백남준은 미술관을
방문했던 관객들이 TV 앞에 모여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그는 1984년 서울과 뉴욕,
파리, 베를린의 TV를 통해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방영했다. 그는 미래의
미술관을 대중매체로 보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것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제2의
백남준으로 불리는 이이남은 서두에서 중얼거렸듯이 스마트 TV뿐만 아니라 모바일과 아이패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물론 당신은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여 소장할
수도 있다. 아이폰 어플에 있는 10작품은 단 1.99달러에 구입할 수 있고, 아이패드 어플에서는 12점의
작품을 3.99달러에 소장할 수 있다. 만약 아날로그 아트가 희소성을 지향했다면, 디지털 아트는 대중성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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