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 HOME
  • 조각가 인명사전

김성수

작가 작품

The Octagon

2.5 x 2.5 x 1.6m Stainless steel, copper 2016

Octagon x Cosmos

8 x 8 x 3m Stainless steel, copper 2017

Moonwalker

3 x 2 x 2.45m stainless steel, copper 2014

Timetraveler

3 x 4.5 x 3.25m stainless steel, copper 2014

Boxkeeper

70 x 70 x 220cm stainless steel, copper 2014

Racehorse

70 x 220 x 200cm stainless steel, copper 2014

Sculptor_s deskSculptor_s desk

40 x 60 x 160cm stainless steel, stand light, LED 2014

The town musician of Bremen

120 x 170 x 245cm stainless steel, copper 2013-1

Little red riding hood

96 x 160 x 167cm stainless steel, copper 2013-1

Puss in Boots

75 x 90 x 146cm stainless steel, copper, glass 2013-1

나른한오후

5m x 2.4m x 3.7m stainless steel, copper 2013-

달마중

3m x 2.7m x 3.4m stainless steel, copper 2015

작가 프로필

학력
2015 전북대학교 대학원 미술학 박사수료 (조소전공)
2012 전북대학교 대학원 미술학 석사졸업 (조소전공)
2010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조소전공)

개인전 10회(전주,서울,뉴욕) 및 기획단체전 150여회

개인전
2019 “전라청년미술상” 초대전 (한국전통문화전당, 전주)
2017 “The Passengers” 초대전 (숨갤러리. 전주)
2016 “Directed Diorama” (Art Mora Gallery, 뉴욕)
2015 “Gallery PIU” 초대전 (복합외식공간 담, 전주)
2015 “Memorial Vintage” 초대전 (삼성래미안갤러리, 서울)
2014 “Amusement Park in Box”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2014 “Amusement Park in Box” 초대전 (우진문화공간, 전주)
2014 “My Childhood” 초대전 (교동미술관, 전주)
2013 “The Story of Nothing” (교동미술관, 전주)
2011 “On Your Mark” (우진문화공간, 전주)

단체전(주요전시)
2020 팔복예술공장 3기 입주작가 프리뷰전 (팔복예술공장/전주)
2019 Beyond The Line 기획전 (코갤러리/독일 베를린)
2019 팔우展 (팔복예술공장/전주)
2019 한중문화예술교류전 (정주대학교/중국 정주시)
2018 광주시립 하정웅 청년작가초대전 (광주시립 하정웅미술관/광주)
2018 변방의 파토스 (전북도립미술관/전주)
2018 전북도립미술관 청년미술가 선정작가전 (전북도립미술관/전주)
2018 평창 문화올림픽 파이어아트페스타 (경포대해변/강릉)
2017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옛연초제조창/청주)
2017 로터스 랜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광주)
2017 메탈리스트 (익산예술의전당/익산, 경주예술의전당/경주)
2017 꿈나무 울타리 (정읍시립미술관/정읍)
2016 쇼콘 (오산시립미술관/오산)
2016 서른들의 다른 이야기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전주)
2016 Retro Scene 김성수, 이상원, 정재호 3인전 (스페이스 케이/과천)
2015 The Great Artist 선정작가전 (포스코미술관/서울)
2015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전(예술의 전당/서울)
2015 어린이를 위한 성찬展 (전북도립미술관/전주)
2015 익산예술의 전당 개관초대전 (익산예술의전당/익산)
2014 양평의 꿈 (양평군립미술관/양평)
2014 광화문 국제아트페스티발 (세종미술관/서울)
2014 서울국제조각페스타 (예술의전당/서울)
2013 한국현대조각초대전 (춘천MBC/춘천)
2013 대교국제조각심포지엄 (중앙대학교 아트센터/서울)
2013 Play Ground 8인 기획전 (유리섬 맥아트 미술관/안산)
2011 상상바이러스 (전북도립미술관/전주)

수상
2019 전라청년미술상 (전라청년미술상 운영위원회)
2018 하정웅 청년작가초대전 선정작가 (광주시립미술관)
2018 전북도립미술관 청년미술가 선정작가 (전북도립미술관)
2017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선정작가 (청주시)
2015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중앙일보 문화사업부)
2015 포스코 미술관 The Great Artist 선정작가 (POSCO)
2015 아시아 현대미술청년작가공모전 국회의장상 (대한민국국회)
2014 교동아트 젊은 미술전 선정작가 (교동아트미술관)
2014 전라북도 미술대전 대상 (한국미술협회)
2014 우진문화재단 청년작가초대전 선정작가 (우진문화재단)
2013 대교 국제조각 심포지엄 선정작가 (대교문화재단)
2013 평창 비엔날레 국민공모전 최우수상 (강원문화재단)
2012 전국 온고을 미술대전 우수상 (한국미술협회)
2010 미사리 야외조각공모전 장려상 (국민체육진흥공단)

레지던시
2020 팔복예술공장 3기 레지던시 (전주)
2016 공동창조공간 '누에' 2기 레지던시 (완주)
2016 Art Mora 레지던시 (뉴저지, 미국)
2015 평촌305 레지던시 (대전)

작품소장
세종 정부종합청사 교육부, 대교그룹본사, 전북도립미술관

현재
전북대학교 출강
한국미술협회, 한국조각가협회, 전북조각가협회 회원

작가 노트

				나는 오래된 낙서장에서 발굴해낸 과거의 흔적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포함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조각적 매체를 통해 그것들을 기록한다. 유년기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동물, 일러스트북, 놀이공원, 디오라마의 기억들을 발굴하여 조각으로 재현하고 나름의 레트로 씬(Retro Scene)을 구현해 나가고 있다. 금속재료와 전동장치, 프로젝션 맵핑을 사용하여 입상으로서의 조각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만지거나 탑승할 수 있는 작품을 통해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새로운 접촉을 시도하였다. 최근에는 유년기 시절 본인을 고립시켰지만 반대로 소통의 도구가 되었던 그림책과 스토리보드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인의 기록과 역사적 사건들을 연결시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제작하고 표현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평론


                    김성수의 조각설치 

삶의 축도, 유년의 놀이를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Octagon과 Cosmos. 팔각형과 우주 혹은 팔각형의 우주. 지구의 축소판? 삶의 축도? 작가 김성수가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다. 조각은 물성이 강해, 보기에 따라선 물성 자체가 형식이고 주제이기도 한 것이어서 따로 주제를 가정하거나 전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굳이 주제를 가정하고 전제한 것은 작가의 작업이 서사적임을 말해준다. 문학적임을 말해준다. 어떤 메시지를 특정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자신의 작업으로 하여금 사회적 조각이 되고 존재론적 조각이 되게끔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서사는 이야기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매개로 공감을 얻는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자신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는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건너온 이야기, 현실을 각색한 이야기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엔 사회를 보는 자신의 관점과 현실을 대하는 저만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
그렇게 옥타곤과 코스모스로 나타난 주제에는 작가의 관점과 태도가 함축된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우주와 함께 질서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우주를 창조한 신의 섭리를 질서로 본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신은 질서와 함께 로고스(말씀 혹은 이성)로 표상되기도 하는데, 그 의미가 대동소이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옥타곤은 팔각 변으로 이루어진 평면이다. 옛날에 사람들은 지구가 평면이라고 생각했고, 그 평면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낭떠러지 밑에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각 평면은 지구를 상징한다.
여기에 작가는 팔각 평면을 삶의 축도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평면의 바닥에는 격자 패턴의 금이 그어져 있어서 체스 판이나 바둑판을 연상시킨다. 말에 해당하는 군소조각들이 등장하는 걸로 치자면 바둑판보다는 체스 판에 가깝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가 않은데,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바둑판을 그리고 서양에서는 체스 판을 삶의 축소판으로 봤다. 그런 점에서 팔각형의 우주 혹은 팔각형으로 한정된 공간을 우리가 사는 지구로 보고 삶의 축도로 본 작가의 입장은 전통적인 상징형식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보통 삶의 축도라고 하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우호적이기보다는 공격적인 경우로 보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삶은 이타주의보다는 이기주의에 의해 견인되고, 존재론적으로 삶은 부조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팔각형은 격투기경기장을 의미하기도 한다는데, 삶을 탈출구가 없는 링으로 보고 정글로 본 것일 터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가 그렇고, 존재론적인 경우로는 존재를 세계에 (내)던져진다고 표현한 하이데거의 경우에서 확인해볼 수가 있다. 존재는 특정의 의미와 가치관으로 이미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이에 따른 부조리한 인간이며 비극적인 인간조건을 의미한다. 팔각형의 한정공간으로 축도된 작가의 세계 역시 이런 현실, 이런 존재론적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지가 않다. 얼핏 동화적 판타지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이전투구와 아비규환을 재현한 것이고, 장난감처럼 보이는 말들이 알고 보면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병정들이다.
이처럼 작가는 팔각형의 한정된 공간 속에 삶의 축도를 옮겨놓았다. 조각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상황의 알레고리를 재현한 상황조각으로 보면 되겠다. 작가의 조각엔 말하자면 연극이 있고 연출이 있고 상황이 있다. 이러한 사실 역시 상식에 부합하는데, 흔히 삶을 삶이라는 무대에서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역할극으로 보는 것이 그렇다. 앞서 말했듯 비록 동화적 판타지로 각색된 탓에 실제로 피바람은 불지 않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박 터지는 경쟁이 있고 아비규환이 있다. 지옥이 있고 비극이 있다. 예컨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원작을 패러디한 <메두사의 뗏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식인행위가 자행되고 있고, 화산섬에선 삶의 무분별한 욕망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실제로는 피어오르는 인공연무로 대신한 것이지만(사실상 같은 테마를 다룬 2016년 전시에서 보듯), 부나방처럼 저 죽는 줄도 모르고 화산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의 무리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말들도 알고 보면 장난감 병정인형을 조형한 것이다.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논리를 순진무구하게 혹은 천진난만하게(?) 표현한 것이다.
순진무구하게? 천진난만하게? 순진무구한 폭력? 천진난만한 부조리? 역설이다. 역설적 표현이다. 역설적 표현을 통한 강조화법이다. 역설을 통한 강조 화법? 일종의 잔혹동화를 생각하면 되겠다. 원래 동화는 우호적인 이야기와 폭력적인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 행복한 결말과 비극적인 종말 이야기가 날씨와 씨실로 직조돼 있었다. 그렇게 삶의 원형적 성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이런 원형적 이야기를 각색하고 억압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동화를 교육적으로 권장할 만한 이야기로 각색하면서 억압이 일어난다. 그렇게 동화는 우호적인 이야기와 재밌는 이야기 그리고 행복한 결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에 전수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동화에는 폭력적인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 그리고 비극적인 종말 이야기가 억압돼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한 것이, 이로써 부조리한 삶의 현실을 폭로한 것이 잔혹동화다. 판타지가 부조리한 현실을 억압하는 것처럼 잔혹동화는 동화의 억압된 그림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잔혹동화가 현실보다 더 잔혹하다. 사실이 극화되는 과정을 통해 부조리한 삶, 비극적인 삶의 실재가 더 잘 부각되기 때문에 그렇고, 더욱이 이때의 부각이 적어도 외적으로는 여전히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세상만사 모든 일은 이중적이다. 겉보기와 실제가 다르다. 동화도 그렇지만 장난감도 꼬마들의 놀이도 사실을 알고 보면 어른들의 폭력을 전수하는 경우들이 많다. 더욱이 가상현실이 보편적인 현실이 된 작금의 현실에서는 더 그렇다. 이를테면 인터넷게임에선 폭력경쟁이 게임의 성패를 좌우한다. 마치 어른들의 놀이에 해당하는 대중문화와 특히 성인영화에서 선정성경쟁이 결정적이듯. 그렇다면 이처럼 동화의 얼굴을 한 잔혹동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폭력, 천진난만한 얼굴을 한 아비규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프로이트는 이처럼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 이중적인 현실, 현실의 그림자를 캐니의 얼굴을 한 언캐니라고 부르고(언캐니는 캐니의 잠재적인 한 속성이었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자크 라캉은 복수를 위해 상징계의 틈새로 출몰하는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 돌발적인 출현(이를테면 세월호?)이라고 부르고, 슬라보예 지첵은 질서가 구축한 현실을 일소하는 사막,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작가는 팔각형의 한정된 정글과 링 속에 삶의 축도를 옮겨 놓았다. 순진무구해서 더 잔인한 폭력을, 천진난만해서 더 무서운 부조리를 옮겨놓았다. 동화의 얼굴을 한 잔혹동화의 실재를 옮겨놓았고, 판타지의 얼굴을 한 억압적인 현실의 민낯 그대로를 옮겨다 놓았다.
보기에 따라서 이 작업은 그동안 제작되고 진행된 일련의 작업들이 집대성된 것이고, 그런 만큼 작가 작업의 결정판일 수 있다. 팔각평면을 체스 판에 비유되는 삶의 축도라고 했다. 그리고 체스 판에는 이러저런 말들이 등장하는데, 저마다 개별성을 유지하다가도 이처럼 한데 모이면 상황조각의 일부로서 편입된다. 말들 자체는 완결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 보아야 하고, 그런 만큼 차후에 말들이 다른 말들로 대체 연출되면서 지금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줄 것이지만, 삶의 축도에서 벌어지는 세상사를 재현한다는 큰 개념의 틀은 당분간 지속 변주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인간사의 스펙트럼을 전개해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는 조각가임을 넘어 연출가가 된다. 마치 체스 판에서 말들의 운용이 게임의 성패를 좌우하듯 어떤 말들이 출현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말들과 말들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다양한 현실, 가변적인 현실, 비결정적인 현실표현이 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전작에서처럼 용암분출을 대신한 인공연무나, 근작에서와 같은 우주를 대신한 영상스크린과 같은 장치들이 조각에 부수되면서 조각을 확장할 것이다. 영상스크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근작의 경우에 속이 비쳐 보이는, 그래서 설치작업과 영상이 겹쳐 보이는 투명스크린을 설치작업 둘레에 둘러쳐 감각적 효과를 강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영상에는 그래픽으로 재현된 거대한 고래 한마리가 유영하면서 전시공간을 물속환경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고래는 재차 별자리로 환원되면서 공간 역시 밤하늘과 같은 우주환경으로 변주된다. 그리고 마침내 고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무한대 기호로 환치되면서 존재론적인 환경, 상징적이고 도상학적인 환경을 펼쳐 보인다.
마치 한편의 잘 짜인 영상 쇼를 보듯 느리게 흐르다가도 불현듯 빠르게 전환되는, 블랙홀처럼 이미지를 빨아들이다가도 문득 화이트홀처럼 이미지를 뱉어내는 반복 순환과정과 더불어서 이 모든 이미지들의 변주가 행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고래가 동시에 별자리로 그리고 무한대기호로 변주되면서 덩달아 공간 환경 역시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물속환경은 아마도 생명의 기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모든 존재는 물에서 왔다). 그리고 우주환경은 막막한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고독한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모든 존재는 고독하다). 그리고 무한대기호는 이처럼 고독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무한순환 반복될 것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끝이 없다). 존재론적으로는 생과 사가 순환 반복되는 자연의 섭리를, 그리고 불교적으로는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윤회(업?)의 고리를 떠올리게 된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영상을 매개로 서사가 눈에 띠게 확장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고, 모르긴 해도 이런 매체를 매개로 한 서사의 확장은 추후 작가의 작업에서도 당분간 지속 변주될 것이다.
이 모든 서사의 발단은 작가의 유년시절 장난감 놀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최초 장난감 놀이에 억압된(은폐된?) 어른들의 놀이(전쟁놀이?)를 조망하던 서사가 삶의 축도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와 아비규환의 현실을 조망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재차 존재의 근원과 유래를 예시해주는 예지적 비전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의 표면과 이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은폐된 현실, 억압된 현실을 폭로하고, 현실과는 다른 현실,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을 열어서 보여준다.
조각에선 조형감각이 절대적이지만 설치작업에선 연출력이 결정적이다. 상황논리에 대한 이해, 관계에 대한 이해, 확장된 서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공간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이다. 조각을 아우르면서 설치로 확장되는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런 조형감각과 함께 연출력이 요구되고 있고, 작가는 이에 꼭 필요한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개념미술 이후 조각은 이전처럼 매력적이지도 않고 작가 층도 두텁지가 않다. 특히 노동과 물성이 강조되는 직조에 매진하는 작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조각 역시 변화된 개념과 달라진 환경에 부응해야할 것이지만, 직조를 도외시하면서까지 조각의 확장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직조는 여전히 조각의 핵심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고 오히려 더 경쟁력 있는 경우, 대체 불가능한 경우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직조에 대한 남다른 근성과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그리고 여기에 확장된 서사에 대한 이해마저 견지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에 신뢰가 간다.





동물형상을 통한 무의식의 표출과 현대적 시각으로서의 토템의식


이 태 호(미술평론가, 익산문화재단 정책연구실장)



일상(日常), 그 너머의 낯선 상상력과 조우(遭遇)하다.

조각가 김성수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제 자리에, On your Mark>展에서 갈라파고스 육지 거북, 대왕 아르마딜로, 고양이, 돌고래 등 주로 다양한 ‘동물형상’들을 통하여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동물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거나 혹은 일상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있는 동물들이다. 하지만 이런 낯익은 소재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은 어딘지 낯설다. 평범한 현실세계의 소재는 다시금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상상의 나래가 더해져 작가는 무의식과 상상력의 세계를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초현실주의 작품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적이면서도 상상적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가 일반적으로 사실주의나 추상예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보통 사실성과 함께 추상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 상상력의 세계를 형상화했던 초현실주의 대표적인 작가 르네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과 같은 천재적 영감을 지녔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현실의 실재(實在)와 그 실재를 바탕으로 한 무의식과 상상 속에서, 혹은 무감각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그 내면에 감추어진 ‘비범함’을 찾아냄으로써 현실 너머에 존재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들을 우리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저 너머(beyond)’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죽은 자로부터 온 ‘메시지’와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무의식이나 환상적인 감각상태에서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김성수의 이번 개인전 <제 자리에, On your Mark>展에 등장하고 있는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일종의 ‘동물 공포증’ 때문에 유년시절부터 두려워했으면서도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다양한 동물들을 소재로 지금까지 꾸준히 연작(連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런 소재는 바로 김성수 작품만의 외형적인 특징이 되고 있다. 하지만 김성수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외형적인 특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가가 동물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려는 다양한 ‘내적 상징성’에 기인하고 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치유(治癒)로서 기능’과 ‘현대적인 토템(Totem)적 시각’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처럼, 김성수의 작품은 사실적인 표현성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 발상의 전환 등의 특징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 속의 동물형상, 심리적인 치유로 전환되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김성수 작품의 특징이 되고 있는 다양한 동물 이미지들은 작가의 유년시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동물 공포증’으로 인해 유년시절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다양한 동물들은 작가에게는 점차적으로 ‘상상의 대상이자 친구’가 되었고,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인지하고 있든, 혹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든지 간에 그것들은 작가에게 ‘일종의 심리치료’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 속의 동물들이 심리적인 치유의 기제로 전환되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동물들이 이제는 동경의 대상이자 작가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들을 우리는 김성수 작품의 외형적인 특징이나 기법적인 특징, 그리고 색채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동물의 외형적인 특징은 이제 더 이상 작가를 괴롭히는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형상이 아니고 오히려 귀엽고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기법적으로도 날카롭고 차가운 직선보다는 곡선적인 형태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김성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인 곡선은 ‘원(圓, Circle)’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만다라(曼茶羅)’와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원(圓)’을 뜻하는 ‘만다라’는 우리나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유럽, 북미 대륙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암각화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서 고대로부터 인류의 삶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만다라를 통합적인 정신의 중심인 자아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만다라가 통합적인 정신의 패턴을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의 정신을 가장 자연스럽게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무의식의 상징으로서 꿈속이나 상상의 세계 혹은 예술작품에서도 자연스럽게 만다라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작가 김성수에게 있어 곡선으로 이루어진 ‘원(圓, Circle)’은 단순한 의미로서의 곡선이 아니라 날카롭고 차가운 직선을 극복하는 ‘따뜻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아울러 어린 시절부터 줄곧 괴롭혀왔던 동물들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는 ‘심리적인 치유’로서의 의미 역시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치유로서의 자아에 대한 인식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색채들 역시 초록색 계열의 민트나 갈색 톤, 연한 베이지 색 등 파스텔 계열의 색상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표현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선처럼 부풀려진 동물 이미지들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마을이나, 달, 구름, 비행기 같은 요소들은 마치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꿈속 세계 혹은 동경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동화적이고 몽환적이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달 벌레>와 <조지의 섬>, <반달곰 마을>에서는 마을과 달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고 고래의 뱃속에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상상했던 마을을 담아내고 있는 대형작품 <고래의 꿈>은 이탈리아의 작가 콜로디의 1883년 동화작품인 <피노키오의 모험, Le adventure di Pinocchio>에 등장하는 피노키오의 아버지 제페토(Giuseppe Geppetto)가 피노키오를 찾아 헤매던 중 고래에게 잡아먹힌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사실적인 동물형상을 통하여 꿈과 상상력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작가 김성수만의 무의식의 세계, 상상력의 세계를 그가 두려워했던 ‘동물형상’을 빌어서 표현한 것으로서 이것은 심리치유의 과정을 거쳐 파생된 결과물들인 것이다.



동물형상, 현대적인 시각으로서의 새로운 토템(totem)의식과 만나다.

김성수의 첫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의 주제는 <제 자리에, On your Mark>이다. 김성수 작품의 주된 모티브가 되고 있는 동물 형상들은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제 자리에>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생각해본다면 개인적인 경험과 상상력의 표출, 치유의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동물형상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가 <제 자리에, On your Mark>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음미(吟味)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차례이다.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요셉보이스의 한 작품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1965년 한 작은 방에서 이색적인 퍼포먼스가 열렸다. 젊은 남자는 꿀과 금박을 얼굴에 바르고, 죽은 토끼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펠트 구두를 신고, 구두 밑창에는 강철을 댔다. 그 남자는 3시간이나 토끼에게 자신의 드로잉 작품에 대해 속삭였다. 이 퍼포먼스가 바로 세계적인 거장 요셉 보이스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작품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한 것인가?>의 장면들이다. 고대 원시시대의 영매(靈媒) 혹은 주술사가 그랬던 것처럼, 요셉보이스가 자신의 얼굴에 꿀과 금박을 잔뜩 바르고 죽은 토끼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던 이유는 물질만능주의의 탐욕과 폭력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차가운 세계에 따뜻함을 주는 존재자로서의 행위이자 미술행위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토끼라는 동물은 하나의 존재 단계에서 다른 존재의 단계로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한 매개체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영역에 접근해 있는 영적(靈的)인 존재의 현세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김성수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동물 이미지들 역시 현실세계와는 다른 무의식의 세계, 상상력의 세계에 접근하고자 하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더 나아가 동물은 자연이라는 커다란 의미의 공동체를 위한 하나의 요소들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특정 개인과 연관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超自然力)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시되는 토템(Totem)적인 시각과도 연결된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토템이라는 개념 역시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작가 김성수에게 있어 동물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은 자연과 연관을 맺고 변화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제 자리에>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가 가지는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연과 기본으로의 환원과 복귀이다. 작가는 다양한 동물형상을 통하여 그 터전이 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사유(思惟)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따라서 김성수의 동물형상 작품은 ‘자연속의 공동체’를 바라보는 현대적인 시각으로서의 새로운 토템의식은 아닐까.


나는 오래된 낙서장에서 발굴해낸 과거의 흔적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포함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조각적 매체를 통해 그것들을 기록한다. 유년기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동물, 일러스트북, 놀이공원, 디오라마의 기억들을 발굴하여 조각으로 재현하고 나름의 레트로 씬(Retro Scene)을 구현해 나가고 있다. 금속재료와 전동장치, 프로젝션 맵핑을 사용하여 입상으로서의 조각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만지거나 탑승할 수 있는 작품을 통해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새로운 접촉을 시도하였다. 최근에는 유년기 시절 본인을 고립시켰지만 반대로 소통의 도구가 되었던 그림책과 스토리보드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인의 기록과 역사적 사건들을 연결시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제작하고 표현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