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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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휘봉

작가 작품

비상

60x100x300cm bronze 대구일보사옥조형물

비상

100x90x500cm 거창석, beonze 대구과학고 시계탑

1987 120x120x500cm bronze 경북고분수대

팔광대놀이

2002 150x150x240cm bronze,거창석 자인팔광대놀이기념비

한장군.오누이와 여원화

2002 150x120x450cm 자인읍기념비

도시인

1999 18x21x45-70cm자연석

도시인

2005 12x10x45-50cm 자연석,숫키와

도시인

2006 120x80x5cm 폐목판,철판,아연사,피스,아크리릭

도시인

2013 112x85x300cm 철핀

도시인

2015 190x250x210cm 철근

무제

2019-2 400x264x40 폐철근,수조,합판,각목

무제19-1

2019 95x45x210 폐철근,자연석

무제20-1

2020 1000x500x30-65cm 폐철근,수조,폐콘크리트,수중펌프,합판,각목,흙

비상

1994 35x11x70cm bronze,오석

1984 35x35x125cm bronze

잔영

1989 120x60x240cm 철판,스테인레스

작가 프로필

◆학 력
1947~1948 서울쳥계초등학교
1948~1953 경북영양초등학교
1953~1956 경북영양중학교
1956~1957 경북안동고등학교
1957~1959 강원도원주고등학교
1960~1962 국립부산사범대학 미술과
1981~1983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학사과정)
1985~1987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석사과정)


◆수상경력 :
대구광역시미술대전 특선2회(1981, 1983), 금상(1982), 대상(1984)
신라미술대상전 입선(1981)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3회(1982, 1983, 1989)


◆전시경력
■ 개인전 ■
1964 수채화(영일 기계)
1967 수채화(경북 영양)
1987 조각(대구 대백문화관)
1994 조각(서울 조형갤러리)
1994 조각(대구 맥향화랑)
1999 설치(대구 대백프라자갤러리)
2003 설치(대구 문화예술회관)
2005 조각(서울 모란갤러리)
2005 조각(대구 문화예술회관)
2006 조각(경남 창원 갤러리 본)
2007 조각(대구 갤러리 로)
2008 조각(경남 바람흔적미술관)
2009 조각(서울 비움갤러리)
2009 조각(대구 갤러리 오늘)
2015 조각(대구 달성문화센타 백년갤러리)
2016 조각(대구 해태제과쿠오리아 갤러리)
2017 조각(대구 제이원 갤러리)
2019 설치(대구 봉산문화회관)
2019 조각(일본 사가현 시루쿠로 갤러리)

■ 초대전 ■
1984 ’84-12개 시도미술대전수상작품전(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89 제2회 아주미술협회연맹미전(말레시아)
1996, 11 대한민국환경조각대전(익산환경조형예술공원)
1997, 12 ’97대구아시아 미술전(대구문화예술회관)
2003. 9-11 EAST MEETS WEST: A DIALOGUE
(미국 버지니아주 포츠머스시 고트하우스갤러리)
2003. 11 SEOUL, A LANDSCAPE전(박휘봉, 유서형, 이강모. 서울세종문화회관)
2004. 7 한-일입체조형미술전(일본 도쿄 모토아자부)
2005. 8 울산한일현대미술제(울산문화예술회관)
2006. 3 2006 NewYork ARTEXPO 참가(뉴욕 쟈비스 컴밴션센타)
2006. 5 KIAF 2006 ARTEXPO 참가(삼성 코엑스 태평양홀)
2006. 9 KOAS-월간미술세계 창간 22주년 특별기획 초대전(공평아트센타)
2007. 3 아세아국제ARTS FAIR 참가(홍콩)
2007. 11 상해 ARTS FAIR 참가(상해)
2013. 8-10 대구미술의 사색전(대구미술관)
2015. 8-9 강정대구현대미술제(강정보 디아크 광장)
2015. 10 포항스틸아트페스티발(포항 해도근린공원)
2020. 5-6 박휘봉 작업 40년, 1981−2020(대구문화예술회관 원로작가 회고전)
외 다수


■ 단체전 ■
1981~1999 대구시중등미협전
1983~1997 경북조각회전
1984~2020 대구미술협회전(초대, 심사, 운영위원)
1986~2008 영남조각전
1989~2016 한국조각가협회전
1991~2005 한국미술협회전(서울)
1994~2009 한국신구상회전
1999~2019 대구조각가협회전
2010~2013 정동인전
2011~2019 일월산맥전
2014~2019 한국조각가협회 대구지부

◆현 재 : 한국조각가협회회원(고문),

1993~1995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출강

■ 야외 및 실내 조각 설치장소 ■
유성스포츠프라자 [율(1984)]
대구문화예술회관 [율(1984)] [율(1988)]
경북고등학교 [율(분수,1986)] [율(1987)]
태영건물 [율(1989)]
대구일보사옥 [비상(1995)]
대구과학고등학교 [비상(시계탑,1996)]
대구구암고등학교 [비상(2007)]
경북 경산시 자인면 계정숲 [표지석(기념비,2002)] [팔광대놀이(기념비,2002)]
[한 장군․오누이와 여원화 상(기념비,2002)]
[계정들소리(기념비,2002)]
봉산문화회관 [도시풍경(2004)]
몽골 울란바타르대학 [서 있는 여인(1982)](본인 기증)
경산해태제과 [도시풍경(2010)]
대한중석(TaeguTec) [불의 시간(2013)]

작가 노트

				[토르소]
정감이 넘쳐 흐르고
매끄러운 피부 깊숙히 흐르는 율동
요염(애증)스럽기도 하다.
아름다운 여인의 나상에서 오는
길지도, 부피에 비해 굵지도 않는
나상 전신의 비례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다.
[구성]
-아무렇게나 사방을 돌의 표면을 깨어 높게 길죽한 형태로 쌓은 후
-스텐레스 봉을 이리저리 휘어서 감아 놓는다.
기하학적 곡선이 아니다.
바로크적 동세가 있으면서 형식적 질서를 갖는다.
완만한 곡선 그러나 갑자기 꺾이는 곡선들의 융합(발산되는 힘은)
즉 핵 에너지라고 할까
(중국의 용트림과는 다른 동세)
아무렇게나 깨트린 돌의 적(쌓은)
1997. 7. 15
[쓰레기의 미학]
-내부 재질; 여러 가지
-겉 재질; 투명유리. 반투명 유리(우유 유리)
현대사회의 썩어가는 내부를 감추려 하는 심리를 표현.
1997. 12. 3
[날지 못하는 새의 공명]
-골 스레이트로 나는 새의 비스듬한 실루엣으로
-자연석
1997. 12. 4
[거석문화 사유 이미지]
-자연석을 반으로 쪼개고
-작은 자연석을 스텐레스 망에 끼워 넣는다.
1998. 5. 1
[질고의 역사(사랑의 역사)]
철조망의 가시를 몸속에 묻어 합쳐진 형상
1998. 5. 1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을 한복을 곱게 입고 쪽 머리를 한 모습으로 표현한다고
‘한국적’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겉치레가 아닐까? 전통 형상의 겉치레가 한국적

인 것인가?
조선시대 유물들의 형상을 나열하는 것으로 전통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일까? 그
것이 “전통적인 미의 표현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먹이나 유채나 어
떠한 재료로도 표현한다 하더라도 “한국인의 심상을 담아 그려진 형상이 한국적
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한국적 표현이라 한 X의 그림을 보고 --
1998. 5. 3
[도시의 변(辯)]
“한국적 민주주의”
-부서진 인형의 머리에 쇠망치(함마)-----못 밖는 망치
-잘려나가는 썩은 사과에 칼-----
-동상 걸린 발을 잘라내는 톱-----
-구두 발굽에 밟혀 깨어지는 전구(또는 항아리;정의)
-구두를 탄(목마 탄) 위정자
배는 앞산만한 비계살에, 얼굴 피부는 개기름이 흐르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두
상(위정자),
번들거리는 구두 한쪽 구석에는 썩은 내장 쓰레기.
정말 유치한 생각을 했다.
1998. 5. 5
[내면의 진실 --- 허실
위장 --- 가면]
-외부; 광택 스테인레스 관
-내부; 파편 거울
흙 색깔(썩은 색) 사이사이에 파편 거울
-접착제; 호마이카
1998. 5. 5

[가로수] == 도시의 변 ==
잘리고 찔리고 박히고 제대로 뻗어 클 수 없다.
공해에 찌들고 썩어가고 그래서 죽어가고
-나무둥치 사이에 전선, 철조망 등이 끼어 있다.
아픔을 품고 묵묵히 자란다.
[도시인(민초)의 자화상(내 모습은?);잔영]
-판유리를 적당한 온도로 녹여서 쭈글쭈글하게 만들고 거울처리한 조각을 붙힌
다.
*나의 이 ‘도시인’을 민중이 아닌 민초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민중 군중에 앞서
힘없고 기델곳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여기 김진홍 목사의 글을 빌려본다.
OKLOS와 DEMOS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
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마가복음 6장 34절)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할 때의 "무리"란 말이 중요하
다. “무리”란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서는 OKLOS란 단어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춥고 배고픈 백성, 기댈 곳 없는 백성 곧 민초(民草)를 일컫는
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비슷한 두 단어가 등장한다. OKLOS란 단어와 DEMOS
란 단어이다. DEMOS란 단어는 기댈 언덕이 있고 빽이 있고 힘이 있는 백성이다.
DEMOCRASY 민주주의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OKLOS는 다르다 빽
도 없고 힘도 없는 백성들이다.“
[도시인의 얼굴]
-투명 프라스틱판을 머리모양으로 잘라서 배경으로부터 층이 나게 배치,
-철사를 같은 방법으로 배치
-조명등으로 비춰 여러 개의 그늘이 생기도록 한다.
1998. 9. 21
[도시의 변]도시인의 얼굴
얼굴은 창백하다.
병자는 아니다.
시선의 방향은
오직 정면뿐이다.
얼굴마다 모양은 다르다.
무표정이다.
무디어진 표피다.
너무나 길들여졌다.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스스로가 펼 생각조차도 않는다.
이젠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귀마저
적어져 버리고 오므라들었다.
무엇에 놀랐는지 떠진 눈 사이로
저 먼
영혼의 하늘 아래 먹구름이 내려
이제 영상은, 기억은 사라져 버렸다.
1998. 9. 23
-철망 집(건축)
-통나무로 건물모양을 한 후 태워서
-건물마다 인체의 부분을 창문 속에 배치
-자동차 바퀴에 찢이겨진 동물시체도 배치
-꿰메어진 입술
-굳게 닫겨진(의지의 의해 닫겨 진) 입술
귓구멍은 크게 뚫려 있고 귀 기우려 듣기만 하고
또는 자의나 타의에 의해 막혀진 귀

숨을 죽이고 있다.-긴장감-
현실을 직시하고 조심스러이 작은 소리마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코구멍이 적다.
아니 없다.

[도시인== 도시의 변(辯)==]

도시
인간의 삶을 가장 화려하게 갖고자하는 욕망과 언제까지나 영위하려는 욕망에
의해 오랜 역사의 애환 속에 성장된 도시, 그에 따른 일상과 상식 뒤에 있는 삶의
부조리와 모순된 현실 이러한 애환, 울분의 세월 속에서 달관되어진, 도시인
육체는 누더기고
얼굴은 창백하다
병자는 아니다
정면을 향하여 저마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무디어진 표피
구겨질대로 구겨졌다
스스로가 펼 생각조차도 않는다
너무나 길들여졌다
꽉 다문 입
귀는 듣지 않아 오므라들었다
숨은 막히고 심장도 멎었다
놀라 떠진 눈 사이로
저 먼 영혼의 하늘에 먹구름이 내리고
이제
영상은
기억은 사라져 버렸다.
허공을 향한 초점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1998. 9. 23
[도시인의 대화(나 만이 옳다)]
-쫙 벌어진 입에 까시 돗고, 화살촉이 돋고
-여러개를 무질서하게 배치
눈은 감고
필요 없으니 아예 없애 버리고
마주보며 진정한 대화가 아닌
자기 주장만 떠들어대는
오직 나만이 옳다.
1998. 9. 30
[무덤(잔영)]
-깨진 돌 조각
-사이에 거울조각(다이아몬드)
-스테인 봉으로 만든 철창
-내부에 도시인의 두상 배치
-빨강, 파랑, 주황빛의 조명
어둡고 그늘지고 찌든 생활의 고달픔은 이미 떠난 지 오래된
무감각, 무심한
눈이 쾡한 얼굴

1998. 9. 30
[도시인]
죽음의 색깔 속에
거만하고 난 체하는 거대한 물체가
인간인 듯 괴물인 듯
꼼짝 않고 버티어 서 있다
만물을 지배하려는 듯한 모습에
이제 다리에 힘마저 빠져버린
모든 것을 체념 해버린 인간들
물질문화에 길들어져
사색과 사고와
즉 뇌가 빠져나간 텅 빈 머리통
멍한 눈
코만 벌름거리며 힘들게 숨쉬고 있다.
1998. 10. 14
[제 3의 형상적 이미지]
-둥근 공 ; 스테인레스 광을 냄
그 영상
인간의 눈에 나타난 형상
인간 자신의 망막에 나타난 형상이 아니라
눈동자에 비쳐진 형상
제 3자가 시각자의 눈을 통해서 보는 형상
[거울]
-평면유리를 적당한 온도에 녹여 찌그러지게 하고 거울처리를 한다.
끌어드린 재질에 따라,
재질의 상태(찌그러진)에 따라 천태만상의 형상,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보습, 자아 발견
인간은 아주 평평한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려한다.
---찌그러진 자기 형상을 싫어하니까---
또한 겉모습에 티가 묻지 않았나 싶어 자기 스스로를 깨끗이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이 거울을 본다는 것은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이 형상대로 찌그러진 형상일까?
진실로 인간의 형상은 어떤 모습일까?
=도시의 변=
[허수아비]
-재질; 종이, 납판을 줄에 걸고 날리도록 배치
공중에 매달린 체로 껍질만 남은
조각에 불과한
바람에 따라 흐느적 거리는
...... 허무와 공허와 채념과 공포와,
아니 공포가 아닌 단념된 마음

부르조아적이 아닌
이미 진실마저도 떠나버린
자아의 의식마저 버린
삶의 존재마저 포기한
약으로 치료될 수 있다면
아니 약의 존재를 깨우치게 해줄 수 있다면
그래 이것이 내가 깨우치고 있는 것이구나
매말랐어
뼈까지 말라 붙었어
무게마저 상실 했어
물기하나 없이
하늘거리는 깃털이야
1999. 1. 2
[가하학적인 형상과 휴메니즘적 형상과의 차이점]
레제는 이 두 가지를 믹서 했고
피카소는 기하학적 형상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휴메니즘적인 형상으로 흘렀다.
그러나 몽드리앙은 자연주의적 휴메니즘적인 형상에서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표
현하였다. 너무나 질서적이고 딱딱한 형상이다. 자연주의적 색으로서의 탈피를
시도했는지는 몰라도 그가 표현한 색의 단순함에는 오묘한 색감이 배어 나오고
있다. 단순한 색의 구성적 배열이지만.
1999. 4. 17
[생의 태초(기원, 기초); Composition]
-큰바위에 깔려 깔린데로 성장하는 나무
-바위와 철봉
누르면 눌린데로 막으면 막힌데로
오직 태양을 항하는 염원
삶의 작태
깨어진 바위 틈사이로 삐어져 솟아나는 가지들(저항적 관점)
우주생성의 과학적인 측면과는 다른 양상일지도 모르겠다.
1999. 4. 30

[공항 검시문(나로부터 무엇을 찾아 낼 것인가?)]
-봉으로 정육면체를 만들고 뒤에 거울을 붙인 후 거울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문처
럼 쌓아 만든다.
99. 10. 1
==깡통 전==
[캔을 먹는 사람]
-이빨이 드러난 큰 입
-속에 빈 캔을 쌓는다.
[정치인]

-캔을 얼기설기 묶어서 달아매고
-바닥에 의자에 앉아 있는 인간 머리와 연결시킨다.
[??????????]
-캔 속에 뻥 티긴 강냉이를 넣고 얇은 프라스틱을 바른다.
-쌓아 놓는다.
99. 10. 1
[쓰레기 하치장]
-쓰레기 통(국회의사당?)
-캔을 머리, 팔, 다리를 만들어 붙이고 국회마크를 단다.
-걸어가는 모습, 버려진 모습
99. 10. 2
도시의 변
[도시인(한국 시민)]
동자가 없다.
귀구멍만 뻥 뚫려 있고 귀바퀴는 없다.(흔적만 남아 있다)
들리는 것, 듣는 것 체념 해 진 상태, 구별이 필요 없는(판단력 마져 희미해져 버
린) 것으로 변조되어 버리고.
동자 없는 눈은 바라보는 목적이 있다.
초점이 없다 시력 마져 잃어버린
그러나 바라보고 있다.
관념 개념 이념 등에서 승화되어진
이미 공허한 허공뿐인 눈.
모든 것을 채념해버린
오직 미이라로만 남은
그러나 초점 없는 눈은 오히려 인내를 통한 자기의 해탈은 아닐까?
그러면서 내면의 세계를 응시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다린다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것일까?
이제는 말이 필요 없다.
영혼의 세계에서 그들은 비판(단죄)할까?
반듯하고 우뚝 선 콧날은 고귀했던 과거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
1999. 4. 9
[도시인]
입술은 철사로 꿰메어지고
굳게 닫혀진 입술
귀 구멍은 크게 뚫려져 있고 오직 귀 귀울어 듣기만 한다.
그리고 막혀진 귀
숨을 죽이고 있다. --- 긴장감 --- 현시를 직시하고
조심스러이 조그만 소리마져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 코 구멍이 적다. 아니 없다. ===
도시의 변

[길거리의 풍경]
-차바퀴에 치어 죽은 개, 고양이
-주인 손에 쥐어진 끈에 묶인 개, 고양이
-주인 품에 안겨 있는 개, 고양이를
동시대비 한다. 99. 10. 1

[그 개는 차에 치어 죽어야만 했는가?]
---바퀴에 치어 갈기갈기 짖어지고 압사된 개 --- 나 --- 우리가 아닐까? ---
도시라는(법이라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 카테고리 아래에서
차바퀴(법=대한민국의 법=민주시민 위의 법)에 치어 죽은 개(민주시민).
그 앞에 거울(잔영)을 배치,
거울 앞에 들여다보는 도시인, 그리고
땅을 치며 탄식하는 도시인.
[도시인의 일상(망각)]
끼익
자동차의 급정거 소리와 함께 길바닥에 사람이 쓰러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리고 잠시 적막이 흐른다.
차에서 내린 사람이 황당스레 뛰어간다.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같은 일행인 듯한 여자는 종종거린다.
전화를 건다.
애는 듯한 적막이 다시 스치고
멀리 에앵 에앵 소리에 제자리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수선거린다.
경찰이 길바닥에 표시를 한다.
곧이어 흰 까운 입은 사람이 들것으로 쓰러진 사람을 앰블렌스에 싣고
다시 앵앵거리며 멀어져간다.
소란스럽던 소리도 낱낱이 흩어져가고
길은 멍든 체 버려지고
다시 적막이 흐른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며칠 후 목격자를 찾는 현수막이 걸린다.
흰색은 바래지고 비바람에 찢긴 체 펄럭거린다.
목격자는 나타났었을까?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 자리는 지금 오리발만 남았다.
그리고 공허만이 남았다.
99. 10. 1
도시
인간의 삶을 가장 화려하게(영화 영달, 최대한의 휴머니즘을)
갖고자하는 욕망, 그리고 언제까지나 영위하려는 욕망에 의해
오랜 역사의 애환 속에 성장되어진 도시(역설적으로).
그에 따른 일상과 상식 뒤에 있는 삶의 부조리와 모순된 현실(윤리 도덕의 결핍)
이러한 애환, 울분의 세월 속에서 달관되어진, 도시인

몸은 갈기갈기 찢기고 뭉게져 더 이상 상처받을 여유 없고
코 구멍은 아예 없고
심장도 멈춰버렸고
귀도 퇴화되어가고 또는 막혀버리고
입은 꿰메어지고, 다문지 오래고
오직 눈만 살았다.
그러나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눈은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과거로부터 발달된 인간의 역사(도시), 그에 수반하는 뒤안길에 흘러온 모순에
의해 황폐화되어 가는 인간상, 그러나 그 도시를 지켜나가는 시민, 회색 벽 속에
조용히 흐르는 인간의 내면적 진실성과 휴머니즘, 도시인의 영혼과 정신을 차가
운 ‘자연석’에 담아본다.

1999. 10. 15. 세 번 째 작업전에 부쳐

도시의 변=도시인(辯, dark side of city=the people) -제3회 개인전에 부쳐-
도시가 형성되어져 온 그 역사의 뒤편에 선(standing),

모순과 부조리에 지칠 대로 지치고 황폐화되어 가는 인간상을 얼굴에 초점은 맞
추고 인간 애환의 역사 속에의 인간상을 대신할 수 있는 자연석-강변이나 해변
등지에서 온갖 풍상에 의해 다듬어진 형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수 많은 핍박과 억압, 억울함, 울분을 삭인 채 오직 바라보기만 하는, 귀도 닫히고
입도 막히고 숨도 막히는 상황에서,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눈을 표현하려 했다.
로댕은 인간의 가장 절박한 고통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으나 이것은 극한 고통의
순간을 넘어서 이미 지칠대로 지쳐서 스스로 달관되어진 도가적인 해탈의 경지
를 넘어선 도시인을, 즉 [카레의 시민(로뎅)]이 저항적인 자세, 도전적 자세라면
[도시인]은 수용적 자세, 관용적 자세라 할 수 있다.
도시의 이데올로기에 잘 길들어져가는 인간상, 그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의 파멸
[그 개는 왜 죽어야만 했는가?(차에 치어 만신창이 된 죽은 개)]-등, 그리고 망각
해버리는.......
이러한 상황을 대변할 수 있는 배경으로 도시의 밤 풍경을 선택했다.

1999. 11 박휘봉

▶「거기 있었다」(도시의 변)
선죽교 절개의 아픔이
사육신의 처절한 외마디가
한산도의 애절함이
빼앗긴 들녘에 봄을 기다리는 사무침이
미아리 고개의 쓰라림이
국화꽃 사랑의 간절함이
거기 있었다
자식 잃은 어미의 저민 가슴이
신발 잃어 애통하는 어린 마음이
사슬의 고통이
서러움이
억울함이
굴욕이
살을 애는 삶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인내와 사랑이
거기 있었다 ◀
2003. 2. 5. 15:00 인도여행 중에
▶ 사진 작가들이 심혈을 기우려 포착한 영상을 보여줄 때 그 사진들이 좋았다. 그
래서 자주 사진전시회를 찾아 다니기를 즐겼다.
그런데 오늘 병실 벽에 걸린 비단 잉어들이 물 표면에 부상하여 유유히 해엄치
는 장면의 사진을 보고 그 고기에서 생동감이 느껴지지가 않는 것은 왜일까?
그렇다 생명은 있어도 생동감이 없다. 굵은 길죽한 둥치에 뒤룩하게 살이 쪘고
뒷 꼬리가 휘청 꺽여 있어도 생동감을 느낄 수 없다. 낚시에 채여 뒤치닥더리는
감각은 휘어져 내린 낚시대를 통한 낚시꾼의 손 맛에는 짜릿한 생동감을 맛 보지
만, 채쳐 올려진 물고기, 바닥에 떨어져 뒤치닥거리는, 눈을 굴리며 입을 벙긋거
리며 억지 숨을 쉬려는 물고기에도 생명은 느낄 수 있으나 생동감을 느낄 수 없
다.
차라리 화가들이 그린 물고기에서는 생동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늘씬한 몸
매에 물이 휘감기도록 감아 붙인 꼬리며, 우리를 보고 빙그레 웃는 모습을, 부릅
뜬 콩알만한 눈으로 유유자적함에서의 생동감을 느낌은 어쩐 것인가?
낙엽이 뒹구는 나무 그늘 풀밭에 앉아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정신없이 들여
다보는 남여 아동의 사진에서도 아동감의 느낌이 없다. 오히려 물가에 돌맹이를
주어 귀에 대고 바로선 자세에서 머리만 옆으로 기우려 쿵쿵 바닥을 울리는 아
이, 소매와 바지가랭이를 둥둥 걷어 올리고 낚싯대를 높이 쳐들고 냅다 휘어 내
리치는 그림에서는 어릴적 낭만과 스며드는 생동감, 소박한 아동들의 순수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래 그림만이 그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일까?
아름다움은 자연 현실에 그대로의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심상에 의해
서 그려진(만들어진) 것이랄 수 있겠다.
그래서 작가는 사실을 두고 사실대로 표현한다 해도 그것을 아름답게 걸러내기
때문이리라.◀
2002. 8. 31.
경대병원 입원실 벽면에 걸려있는 물고기, 어린이 사진을 보고 적는다.

흐드러지게 널려진 동그스레 다듬어진 조약돌이
마냥 신기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강변을 누비며 줍던 기억들
세월에 묻혀 까마득히 잊혀진 그 돌!
섭리에 순응하여 풍상으로 다듬어진 형상과 표피는
우리 인간의 삶과 너무나 닮았다.
자연은 우주다. 그 우주를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생명)이
곧 우주이리라.
하 많은 세월을 겪으며 스스로가 닦고 닦이어 지극한 인간의 삶을 연상케 하는
저 돌!
그 어느 보석에 비하랴!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팽개쳐져 있지만 그것에 눈, 코, 입

아니 눈 하나 없든 코가 비틀어졌든 입이 한 쪽 떨어져 나간들 어떠랴!
나는 다만 그들의 내재된 생명을 일깨운다.
자연은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말하고 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의 눈과 입에선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5. 9. 작가 노트 제5회 개인전에 부쳐

겉치레에서 멀어지고 싶다. 그런 형식은 많은 사람의 공유에서 시작되고 그것에
매인다. 그리고 형식주의는 자유스럽지 못하다.
자유는 나 자신으로 모든 개개인의 무한한 이미지 창출의 원동력이다. 그것을 공
유할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가 나의 주제다. 동그라미(어린이
가 연필을 쥐고 끼적거리기 시작한 얼마 후, 원을 그릴 수 있는 시기의 동그라미)
는 얼굴이며 눈이 될 수도 있듯이, 더 나아가서 이리저리 뜯겨진 형상을 표현한
조각도 얼굴일 수도 있다. 김창열의 물방울도 다르게 보면 얼굴일 수 있다.
‘회화적이다.’, ‘조각적이다.’ 라고 규정하기 싫다. 표현에는 장르를 구분하면 내
용이 좁아지기 쉬우므로 규정에 관계하지를 않는다. 주로 형식이 ‘평면이다.’ ‘입
체다.’를 따져 형식에 맞추려 한다. 나는 그러한 구분에 구속되는 것이 싫다.
‘자연적이든.’ ‘심상적이든.’ 표현된 형상이 있는 한 그 형상에서의 반향은 누구에
게나 감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감성을 자극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無意味)
다. 백화(白花)
“나는 조각가가 아니다.” “작업하는 사람이다.”
서민을 위한 미술, 서민이 즐기는 미술이어야겠다.
2005. 2. 1.
노동자 계급에서의 투쟁은 결과 그것을 앞세워(즉 노동자의 권리를) 입 빠르게
투쟁을 외쳐대는 몇몇이 부르조아적인 계층에 오르려 하는, 즉 모순덩어리의 물
체가 그 속(투쟁)에 존재하는 것인가? 결국 부르조아 계급이 되고자 투쟁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론 몇몇에 지나지 않는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은
보다 더 부르조아가 즐기는 생활 그자체이며 부정 그 자체다.
[상(像)
---깨어진 머리들의 조합---
옆으로 비스듬히 잘려져 나간
약간 수직으로 머리를 꿰맨
망치로 두드려서 부서진 머리
한 쪽 눈은 깨어져버린
눈망울은 항상 두려움 보다 맑은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
2005. 2. 1

정(正)
바르고 질서 정연하고 비뚤어지지 말아야하고 거짓이 없고 반듯해야하고 사선보
다는 수평 수직이고 표면도 매끄러워야 하는(물론 유리면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입체의 형상에서 정확한 표면을 말한다) 이것이 나의 정신적 사회적 도덕적 기준
이다. 그로 나의 작업도 그렇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깨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 이리라.
2005.2.4

상(像)
(원시적인 것)
아무렇게나 던져진 형태에
아무렇게나 놓여 진 눈과 코와 입으로
(원시적인 것도 아니고 무의식적인 것도 아니고 우연적인 것도 아닌)
-철판을 자를 때 가위로 자르지 말고 프라즈마 절단기와 산소 절단기를 사용한
다.
울퉁불퉁한 나무결에 펄프를 압착시켜 콜라쥬 작업을 시도해 보자.
어떤 형상(환영과 재현)으로 표현한 것인가 앞서, 보다 손 가는 데로 칼이 가는 데
로 붓이 그어지는 데로, 그렇다고 자동법은(얼토당토 않다) 아니다. 나의 감성이
붓에 칼에 사물에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작업해야 할 것이다.
2005. 2. 17
......위대했던......
‘레제의 쇠퇴는 ...... 그가 같은 작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술과 문화] 그린버그, 조주연 역, 경성대학교출판부, 페이지 126 하단.=글에

위대한 작품을 그 같은 기법으로 되풀이해야 위대함이 존속 되는 것인가?
2005.2.17
장식성은 도안적 디자인 영역 공예적이라는 것으로 결부되는 것인가?
공예적이라는 것은? - 끝마무리의 철저한 처리에 가까운 즉 제작상의 재료의 다
루기의 기법에 가까운 해석인가?
장식성이란 것은? - 재질과 재료의 다루기의 기법이 아닌 꾸밈, plane으로 해석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엄연한 구분이 된다.
2005.2.17.
[내려다보고 있는 백성]=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재력 없고 권력 없고 명예도 없고 그로인해 핍박 받는 자. 그들로부터 탈취당하
는 자. 자유와 권리가 아예 박탈당한 자. 그러면서 재력과 권력을 가지려하는 자.
그리고 그것으로 군림하려는 자. 갈등하는 자. = 21세기의 노예 - 문명화한 자아
의 파괴
어떤 자가 가난한 자인가?
-각목을 스크류 모양으로, 못 피스 등으로 접합하고 모래 섞인 테라코트로 마디
를 감싸 붙이고 난 뒤 엷은 먹색으로 처리한다.
2005.3.11전 6:00

상(像)-평면
-여러 폐기물로 접합한 인간상
-철사로 용접, 꿰매기, 역기 등으로
2005.3.11
케테콜비츠의 목판화<카를 리프크에히트 추도>를 보고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는 그들은] 그들의 눈은 하늘에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찾아 해매는가? 눈엔 무엇이 담겨 있는가?
2005. 3. 12 6:00
“전도는 모두가 형제라는 사회사상이 있어야 한다”
타우트의 <알프스 건축(1919)>에서
▶영혼의 소리, 영혼의 형상, 마음의 소리, 마음의 형상
형상은 자기 마음속에 그려지는 영상이다. 그것은 마음을 시각에서 읽고 있기 때
문이다. 사물은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봐야한다. 영혼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바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자연의 질서가 있을 뿐이다. 질서가 있는 것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다. 구속이 있을 수 없다.
2008. 4. 8 서유럽여행 중 런던에서
▶자연의 소리에서 음(음율)을 느낀다. 모든 형상에서 음률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음율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다.
찾아지는 것, 그것을 공유(公有)하거나 공감(共感) 할 수 있을까?
2008. 4. 8 서유럽여행 중 런던에서

▶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아니한다.
내가 가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고프면 초목근피가 있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서경덕의 시 (저서 화담집 조선 성종 때 철학자)
[나는 이 시에서 쾌활(快活)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만년에 쓴 현판의 글이 생각난
다. 현판은 남평 문씨 세거지에 있는 건물 안쪽에 걸려 있는 것으로 노원이라는
호로 마무리한 것이다. 모든 것 다 내려놓고 거침없이 거리낌 없이 즐기는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 무엇이 어렵겠는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양식에? 형식에? 이즘에? 아니다 아무 것에도 메이지 않고 거침없이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고 싶다.]
2010. 어느 날
‘불의 시간’
작년 이맘 때
함께 일하는 작가들과

점심 먹으러 식당에 들어서는데
다급하게 울리는 벨소리
“네? 박달예술인촌 동쪽 끝이 불 탄다구요?”
동쪽 끝이라면 바로 내 작업실
한 순간 가슴속에서 들리는 쿵쾅 소리
갈피를 잃은 내 정신
황급히 달려가는데
하늘로 솟구치는 연기가
저 멀리 한눈에 들어온다
예술인촌 정문으로 들어서면서
혹시나 했던 내 마음 속 기대는 산산조각
불길은 콘크리트 벽과 기둥만 남기고
지붕까지 폭삭 주저앉혔다
현장에 남은 불씨에선
물먹은 연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
한 순간 내 귀를 틀어막는 적막
정지한 영상이
줄곧 물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갈라진 가슴 속으로
젖어든다
모든 것은 허무
70여 성상의
온갖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빙빙 지나간다
불의 기억을 덮고
시계바늘도 다시 담담하게 돌아간다
하루 이틀 사흘...
그날 이후로도
세월은 그저 무심하게 흘러간다
2013. 8. 10 박휘봉

평론


                    단순소박성으로 표현된 비상의 형상
삼국시대 고분벽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체 중의 하나가 비천상이다 특히 삼실총 무용총우현리 대묘 등의 고구려시대 고분벽화를 보면 주악천인도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 벽화 속에 등장하는 도상들의 양식을 보아 고구려 사람들이 도교의 신선사상에 영향을 받아 하늘을 날아다니는 인물의 형상을 통해 불로장생의 염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비상의 이미지는 비단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뿐만 아니라 ‘에밀레종’이나 선덕대왕신종으로 잘 알려진 봉덕사종에 새겨진 <비천상>이나 고려시대에 재작된 거창의 둔마리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주악천여도>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진파리 1호분(고구려)의 <수목도>와 능산리고분벽화(백제)를 보면 하늘을 가르며 날으는 구름의 운동감을 매우 역동적으로 그려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박진하는 동세와 날렵한 비상의 이미지가 생동감 넘치게 표현된 그림은 경주 155호 고분에서 발굴된 <천마도>의 한 방향으로 흩날리는 말의 갈기일 것이다. 실제로 삼국시대의 미술 중 대중을 이루는 불상이나 불탑 등이 영원성, 부동성을 보여주는 반면 회화의 경우 매우 약동하는 동세를 표현하고 있다.
필자가 한 조각가의 추상화된 조각작품을 논의하는 이 글의 머리부분에 왜 갑자기 우리 옛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이러한 벽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로 기억되는데 박휘봉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필자로서는 그의 작품이 현대조각의 일반적인 표현의 관습을 따르고 있는, 즉 하등 새로운 것이 없는 평범한 내용과 방법에 충실한 것으로 파악했다. 단지 작업에 임하는 그의 성실성이 더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부지런히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료를 보내오거나 혹은 작업의 개념에 대해 필자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에 의하자면 인체를 형상화함에 있어서 ‘기다림’이란 애틋한 염원이 담겨 있는 산라의 망부석과 은근과 끈기, 인고의 정신을 보여주는 조선의 여인상에 기초하여 <서 있는 여인>과 <율>이란 제목의 연작을 재작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팔자가 본 작품들은 대체로 이런 종류의 것들이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작품의 애토스를 발견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무의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작품들은 매우 정형화된 평범한 것에 불과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른바 현재조각의 양식화된 범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그는 필자에게 새로운 작업방향에 대해 알려주었다. 비상이란 주제로 제작된 추상화된 그 작품들을 외관상 그의 과거의 작품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기 보다 그것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 출발에 있어서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사실 ‘서 있는 여인’이나 ‘율’이니 ‘비상’이니 하는 언어들은 한국조각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로서 지나치게 상부적으로 사용한 나머지 식상한 언어, 죽어버린 말이기도 하다. 특히 아카데믹한 작품을 보면 이런 단어들을 제목으로 달고 있어 사문화된 언어를 통해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정서를 은근히 드러내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박휘봉의 작품 역시 그런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작업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최소한의 표지에 불과하며 조각으로 성취하지 못한 부분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존하고자하는 직품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두어야겠다.
그가 비상이란 내용으로 작업을 한 것은 1982년이었는데 그때 작품은 구상인체조각으로서 한 소녀가 마치 무용하듯 날렵하게 지면으로부터 도약하고 있는 형상을 보여준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은 구상조각의 일반적인 모델링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예사롭게 넘겨버렸다. 그런데 최근에 그가 제작한 일련의 <비상>이란 작품이 이 소녀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다시한번 이 작품의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늘을 향해 뻗은 손과 대지 위에서 사뿐하게 돋음하고 있는 한 발, 마치 활시위처럼 탄력적으로 팽팽하게 휘어진 인체의 곡선을 단순추상화하면 이 전시에 보여줄 그의 추상화된 작품이 나온다. 이런 기본적인 형태로의 환원은 현대조각, 특히 브랑쿠지(C. Brancusi)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순화의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브랑쿠지의 <잠자는 뮤즈>나 <포가니 양>은 인체의 특정부위(얼굴)를 더 이상 단순화시킬 수 없는 가장 완벽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난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생명의 영원성을 품고 있는 절대적인 형태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박휘봉의 작품은 브랑쿠지의 절대적인 형태에의 단순화과정과는 다른 맥락에서 추상화된 인체를 보여주고 있다.
기본적인 형태로 보자면 박휘봉의 작품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갈기와도 같은 부위를 더 단순화시키면 브랑쿠지의 형태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좌우 대칭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품은 유기적이고 유려하며 단순한 곡선이 물고기나 새의 형상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작품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이 바다 속을 유유하게 유영하고 있는 가오리나 혹은 창공에서 날개짓하고 있는 새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어떤 작품의 경우 정면에서 볼 때 자연의 오랜 풍화작용과 비바람, 물살에 의해 아름답게 연마된 강가의 동글동글한 돌의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조각에 있어서 조형요소의 중요한 부분으로 고려되고 있는 양감이 배제되고 있다. 매스의 억제는 이 작품들의 공간감마저 최소화시키고 있는 요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공백을 메꾸고 있는 것이 운동감이며, 특히 속도감이다.
조각은 일정한 부피를 지닌 물질이 특정 공간 속에 놓여 짐으로써 그 삼차원적 입체감을 통해 작품의 미적 특질을 드러내는 것이 보편적인 특징이다. 특히 고전 조각을 보면 빈켈만(Winckelmann)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성’과 ‘위대한 고요’란 특징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바단 고전조각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조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조각에 속도를 부여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입체 속에 속도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시도는 미래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리네티의 강령’에 감화받아 제작한 듯한 보치오니(U. Booccioni)의 <공간 속의 영원성의 독창적 형태>란 작품을 보면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통래 속도감이 표현된 인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박휘봉의 작품에 있어서 속도의 표현은 매우 상징적이며 또한 조형적으로도 무리가 없는 적절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전면부의 유형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운동감을 보여준다면 그 후면부의 예리하게 돌출된 날개깃들은 속도의 긴장감을 강화시켜주는 요소이다. 그는 이러한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 자체가 가벼워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그 결과 부피나 질량보다 통제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속도의 동세가 이른바 ‘현대성’을 강화하기 위한 요소로서가 아니라 우리 전통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는 비상의 이미지에 착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앞에서 말한 고분벽화나 다른 전통미술 속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비상의 이미지를 어떻게 조각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연구의 결과로 획득된 것이 이 작품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연구’란 말을 사용했는데, 이 단어의 진실에 대해서도 말하여야겠다. 필자가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을 때 그는 자신이 정리한 미술사 파일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교육자로서의 필요성 때문에 순전히 개인적인 일정으로 제작된 자료였는데 그 방대함이나 성실한 자료정리의 태도가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작품을 논의함에 있어서 이러한 사례가 주변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미술사를 정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훌륭한 전통에 대한 깨달음이 그의 작업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고구려 고분벽화의 천인도뿐만 아니라 진파리나 능산리 고분벽화 속에 나타나고 있는 비운도의 단순 소박하지만 약동하는 운동감으로부터 그의 <비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날렵한 동세를 표현하기 위해 인체를 단순화시켜 나가지만 그 결과는 서구 추상미술에서 볼 수 있는 기하학적 추상조각과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에는 여전히 추상화, 단순화되기 이전의 원형, 즉 인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특히 한국의 전통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묘한 지점에서 절충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는 점도 지적하여야 마땅하겠다. 즉 그가 우리 전통미술에서 추출한 미의식과 현대조각의 정형적인 조형언어를 결합시키고 있으나 그 결과가 현대조각의 양식화된 형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란 점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 앞에서 필자는 ‘모든 작품이 똑 같아서 자칫 설득력을 잃어버리지나 않을지, 그리고 한 작품마다 기울인 정성은 대단하지만 그 결과가 작품을 공예적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말했었는데, 그는 필자의 불만 섞인 말에 대해 ‘비상이란 주제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궁극적인 곳까지 이르고 싶었고, 이 시리즈가 끝나면 나는 다른 방법으로 작업 의 뱡향을 찾아나갈 것이다.’라고 화답했다. 사실 옛말에 나이가 쉰이면 하늘의 뜻을 안다(知天命)고 그러는데, 지천명을 바라보는 그에게 갑작스럽고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가. 이미 그는 그 나름대로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로서는 외람되지만 그의 <비상>이 보다 우리 머리와 가슴에 와닿는 작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상투화의 혐의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공예적으로 잘 다듬어진, 그 완벽에 가까운 마감처리가 작품의 내용을 오히려 비워버리는 나쁜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지 걱정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필자에게 던진 말 - 이번에는 비상이란 주제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앞으로 나의 작업방향이 어떻게 변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이 작품에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 은 그가 결코 정체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진지하고 성실하며 연구하는 그의 자세는 혁신적인 그 무엇보다 차분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업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9월
최태만(미술평론가)


현대 삶의 이미지, 그 알레고리와 도상학적 환원
-조각가 박휘봉의 작품세계-

박휘봉은 인간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조각영역의 표현 가능성 모색에 있어 특유의 알레고리와 도상으로 개성 있는 작업을 선보여온 작가이다. 그가 작업하고 있는 성서근교 박달예술촌에는 조각을 비롯 서양화, 한국화, 디자인, 도자기 등의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주목할만한 작가들이 각기 개성 있는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토론과 비판을 통해 서로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의 자극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연륜에 비해 여전히 젊은 감각과 예술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조각 어법을 구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의 작업장은 마치 공장을 방불할 만큼 다양한 재료와 공구들로 가득하고 구석구석 그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한 오브제들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 미술의 기류가 매체의 확산과 다양한 표현방식의 확충, 삶에 밀착한 이미지의 회복과 알레고리의 창출, 그리고 예술과 일상의 간극을 넘어 미술의 대중화 추세가 가속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볼 때, 박휘봉은 조각의 분야에서 이러한 현대미술의 기류를 대변해 보여준다. 물론 그는 조각의 전통적 원리나 기법을 성실히 익혀왔고, 초기 작품들은 절대양감 및 재료적 속성과 형태적 환원에서 어떠한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함과 고전미를 구현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주었었다. 이러한 감각과 정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변모를 거듭해온 그가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창작의 자유정신 면에서 또다른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그의 작품세계가 담지하고 있는 예술적 가치와 의의 및 이번 전시에서 시도한 모티브 구현의 방법적 모색이 어떠한 의미와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하여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예술의지의 방향과 모티브 면에서 볼 때, 작가의 주된 관심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다. 80년대 중엽의 초기 작품들은 대자연의 섭리와 미를 구현하고 있는 인체해석과 함께 ‘모든 삶을 포용하는 한국의 여인상’을 주모티브로 하였으며, 90년대 들어서는 비천상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비상’의 형상화 및 그와는 상반되는 메마른 현대사회의 도시인에 대한 심상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보여주었었다. 특히 99년의 〈도시의 辯〉전시에서는 다양한 매체를 도입하면서 전시공간을 최대로 활용한 디스플레이와 설치를 통해 도시와 도시인에 대한 실존적 의식을 극명하게 표출하였다. 이 전시는 그의 조각 이력에서 일부 느껴왔던 매너리즘과 상투성을 불식하고 현대 도시인의 삶에 대한 심상과 그 표현의 분방함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냈던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였다. 이번 전시 역시 같은 문맥에서 도시인의 이미지가 주모티브가 되고 있으며, 다양한 인간 얼굴의 유형과 표정을 통해 작가의 이념을 특유의 도상과 알레고리로 암시하고 있다.
둘째, 그렇다면 작가의 도시인에 대한 심상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그는 현대인의 다양한 얼굴들을 천태만상으로 드러내면서도 마치 가면들이 그러한 것처럼 일종의 전형성을 느끼도록 도상학적 환원을 꾀하고 있다. 예컨대, 얼굴의 모양이나 윤곽, 그리고 두상과 골상에 따라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유형이 도상 상의 차이로 느껴지는데, 작가는 열 세 종류의 얼굴 타잎을 오 백 여개의 안면상으로 표현하여 전시실 바닥에 쌓아올리고 있기도 하다. 또한편 다양한 전형의 얼굴들은 일률적으로 훵하게 뚫린 눈과 꽉 다문 입을 통해 도시인 전체의 심리와 실존의식을 투영하고 있다. 작가의 작업노트는 그와 같은 예술의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단서를 제공한다: “도시인...삶의 욕망...일상과 상식 뒤에 있는 삶의 부조리와 모순된 현실...애환과 울분의 세월 속에서 달관되어진 도시인...육체는 누더기고 얼굴은 창백하다...정면을 향하여 저마다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무디어진 표피, 구겨질대로 구겨졌다...너무나 길들여졌다. 꽉 다문 입, 귀는 듣지 않아 오무라들었다...쾡한 눈 너머로 저 먼 영혼의 하늘에 먹구름이 내리고..”. 이처럼 각인된 작가의 심상이 다양한 재료와 만나면서 도시인의 이미지를 다차원의 형태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형태적 환원은 곧 이미지의 환원이며, 도상학적 환원이라는 점에서 조각가의 조형문법과 언어로 다양한 알레고리를 발생시키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는 점에서 이 작가의 개성이 돋보인다. 특히 전시공간의 기둥 면들에 설치한 전신상들의 무표정하고 경직된 포즈들은 하단의 수많은 백색 얼굴들과 상충하면서 인간 역사의 공허함과 현대 도시인의 익명성 및 무상한 삶과 죽음의 파노라마를 환기시킨다.
셋째, 위와 같은 인간에 대한 사념과 도시의 변은 다양한 매체와 조형 방법으로 구현되고 있고, 작가의 역량은 이념과 매체의 적절한 조율에서 특히 돋보인다. 이번 전시 작품에 활용된 재료들만을 일별하더라도 포장용 나무판넬, 스텐레스봉, 강철판, 꺽쇠, 자전거 바퀴테, 솥뚜껑,드럼통 파편, 스티로폼, 자연석, 나뭇가지, 스테인레스 슈퍼밀러, 테라코타 등, 다양한 재료들이 작품의 매체로 전용되고 있다. 일상의 평범한 오브제들조차 이 작가의 눈에 띄면 일정한 예술적 상황을 우려내는 매체로 변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테라코타로 빚고 구워내어 채색을 한 얼굴들과 스티로폼 덩어리를 깎아내어 만든 얼굴들, 자연석을 다듬고 구멍내어 채색한 얼굴들은 그 이미지에 따라 전시장 바닥에 쌓아올려지거나 나무판자나 스텐레스 거울, 혹은 강철판이나 솥뚜껑, 자전거 바퀴테 등 위에 올려져 벽걸이 식으로 걸리기도 한다. 다양한 재료들을 꺽쇠로 연결한 바탕 위에 부착한 도시인의 표정들은 일상 삶의 편린들을 상기시키는 알레고리를 발생시키고, 상처난 마음들을 기워가며 사는 도시인의 소외감과 좌절, 무관심과 우울증, 심지어 모든 불안과 좌절을 역전시키는 해학적 정서에 이르기까지 천태만상의 심상 풍경을 표출한다. 특히 다양한 얼굴들이 드로잉된 나무판의 활용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아우른다는 점에서나 현대인에 대한 명상의 에스키스라는 효과 면에서 의미있는 시도라고 할 만하다.
넷째, 이상과 같은 이념과 방법으로 도시인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세계는 그 분방한 조형적 상상력과 기발한 착상이 돋보이며, 그 결과 일상의 이질적인 재료들이 의외의 접합을 통해 또다른 표정을 연출하는 점과 물질과 정신, 매체와 이념이 적절히 조율되어 작품의 모티브를 가시화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앞으로의 방향성을 가늠해볼 때, 이질적인 재료들의 상충과 접합이 반복되다 보면 자칫 그러한 프로세스 자체의 유희나 재미에 빠질 우려도 없지 않다. 삶의 이면을 읽는 연륜과 신선한 감각을 구비하고 있는 만큼, 수사적인 말을 줄임으로서 오히려 표현의 초점을 확실히 해가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장미진(미술평론, 미학박사)


박휘봉 전 서문

직립하는 인간군상,
비대칭(dissymmetry)의 생명성에 뿌리내린 ‘현실적 자연주의’

김성호(미술평론가)

박휘봉은 이번에 다섯 번째의 조각 개인전을 갖는다. 조각에 입문하기 전의 부산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1962년)한 이후의 두 번의 수채화 개인전(1964년, 1967년)까지 합하면 그는 실제로 일곱 번째의 개인전을 맞이한다. 그가 영남대학교 조각과에 발을 들이며 ‘조각의 세계를 향한 미혹(迷惑)’의 세월을 시작한 것이 나이 불혹(不惑)이 되고 나서부터이니 ‘조각에의 길’에 관한 한,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는 공자의 언구(言句)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조각언어를 체계화한 채 변신의 운위에 짐짓 조심스러워할 나이에 그는 조각 수련기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도 모자라 이순(耳順)이 넘어선 여태껏 거듭되는 실험으로 자신의 작업을 변모시켜왔다. 작가에게 있어 끊임없는 창작욕구란 늘 변화에의 갈망을 위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휘봉은 작가주의에 매우 충실하고 솔직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연륜보다 젊은 작가’라 호칭하기도 한다.

과거의 작품 1 - 구멍 혹은 틈새, 대칭형 만남
조각에의 학업을 마치고 보여준 첫 개인전에서의 작품들은 다분히 매스나 볼륨에의 기본적 조각어법에 충실한 장식적이고 기념비적인 인체 변형체의 추상조각들이었다. 그의 포트폴리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학업기에 보여준 탄탄한 인체 모델링 수련이 이러한 인체변형의 세련된 스킬의 추상조각을 가능케 하였는데 우리는 이 작업들 속에서 당시의 형상(form)에 대한 작가의 지극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몸체의 날렵한 형상이나 매스의 황금분할적 배분형식은 그의 작업을 매우 조형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족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그 효과는 기실 쌍방 매스(혹은 단일 매스)의 ‘대칭형 만남’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대칭형 만남? 그 만남이란 둘(혹은 하나) 사이에 늘 틈새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의 작업에서 이른바 투과체의 조각적 특질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런 연유로부터 기인한다. 조각의 개별체 몸체들이 만나면서 혹은 하나의 조각 몸체가 갈라지면서 만들어내는 틈새는 ‘구멍’을 형성한다. 그 ‘구멍’의 공간은 외부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각몸체 안으로 끌어들이고 공기의 운위를 감지하게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이러한 조형어법은 관자들에게 꽉 막힌 응축형의 조각몸체를 바라보는 시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조각이 거하고 있는 외부환경과 함께 조각을 바라보게 하는 ‘시선 확장의 경험’을 제공한다.
‘헨리 무어’나 ‘브랑쿠지’의 조각들로부터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구멍’의 공간을 통한 시선 확장은 박휘봉의 두 번째 개인전 출품작들에서도 여전히 경험하게 된다. ‘비약(飛躍)’이란 제명을 달고 있는 시리즈 작업은 인체로부터 연유했다기 보다는 새나 물고기의 형상을 더 닮아있는데 조각몸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구멍’이 우리의 시선의 확장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투과체의 공간은 ‘구멍’과 함께 트여진 틈새의 공간까지를 포함한다. 쉽게 말하면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식의 1회 조각 개인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조각의 형태는 물론이고 조각 몸체 사이로 그 구멍이 완결되지 않고 빠져나가는 2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작품들 까지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들어 올린 팔의 형상 사이로 혹은 직립하고 있는 다리 형상 사이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외부로 트여진 틈새를 확인해낼 수가 있다. 이렇듯 구멍과 틈새의 공간이 상호 침투하는 대칭형 만남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첫 단추가 된다.

과거의 작품 2 -어긋난 시메트리(symmetry)
앞서 우리는 틈새의 공간이 둘의 만남이든 하나의 갈라진 분리형 만남이든 간에 ‘대칭형 만남’에서 근원하고 있다고 고찰한 바 있는데 박휘봉에게서 이러한 대칭형의 시메트리(symmetry) 구조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 언급해 보면 ‘어긋난 시메트리’라 할 수 있는 이것은 사실 비대칭형의 디시메트리(dissymmetry) 구조에 다름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칭구조에 근간한 비대칭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상이함은 늘 닮아있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박휘봉의 이러한 전략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인체의 좌우 대칭형 구조는 기실 좌우의 닮음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서 좌우의 또 다른 ‘다름’을 확인해 낸다. ‘짝짝이 눈’과 같은 이러한 미세한 다름은 다름의 의미를 더 본질적으로 사고케 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닮음의 좌우가 움직임을 표상하면서부터 그 형상의 구조가 달라지는 경우에는 미세한 다름의 진폭이 매우 넓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율동미 혹은 운동감과 같은 ‘시간성’이 개입된 형국을 만들어낸다. 1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인체형상으로부터 기원한 추상 혹은 비구상적 양상이나 2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비상’ 시리즈에서 우리는 이러한 율동미나 운동감을 여실히 발견해낼 수 있다.
1회 조각 개인전의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유사한 좌우의 구조가 미세하게 다름을 표방하고 있거나 춤을 추는 듯이 허리를 비틀고 있는 직립의 조각몸체가 대칭형으로부터 근간하면서도 비대칭의 양상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2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작품들에서도 유선형의 몸체로 수면 아래를 유영하고 있는 물고기처럼 혹은 공중으로 비상하고 있는 새처럼 보이는 조각몸체가 좌우, 상하가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것을, 즉 대칭에 근간하면서도 비대칭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해낸다.

최근의 작품 1 - 생명성에 직립하는 비대칭의 미학
이른바 ‘어긋난 시메트리’라 불러봄직한 박휘봉의 디시메트리 구조는 1, 2회 조각 개인전과 형식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보여준 3, 4회 조각 개인전에서도 일관되게 지속된다. 혁신적인 변화라 함은 이전에 보여준 매끈한 표면과 세련된 공예적인 장식성, 환경조형물로 확장되는 듯한 수직성의 기념비적인 양태가 거친 표면과 버려진 오브제의 결합을 통한 설치적 어법의 조형방식으로 전이한 것을 지칭한다. 구조와 형식면에서 진폭이 큰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디시메트리 구조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소재, 구체적으로는 얼굴을 그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다.
유사하지만 늘 다른 좌우, 그 ‘어긋난 시메트리’의 미학은 자연석의 거친 표면위에 드러난 사람 얼굴들 속에 올곧이 담겨있다. 한결같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안면상(顔面像)들이 더러는 고대인들이 세운 거대석상을 상기시키듯이 이목구비는 작가가 최소한의 손질을 통해서 만들어낸 원시적 형상을 지니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만화 속에 나오는 우주인의 형상을 닮아있기도 한 안면상들은 높은 좌대 위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침묵의 표정으로 도열한 채 관객을 응시한다. ‘도시의 변(辯)’이라 이름붙인 전시부제에서 확인하듯 이들은 작가가 만들어낸 도시인들이다. 석상이라는 원시의 형태, 애니메이션 안의 우주인 같은 미래적 형태가 조합된 낯선 이방인들같은 도시인의 형상은 그 개별체 내에서의 좌우의 비대칭과 상이함처럼 개체 간에 서로 그 모습을 달리 하면서 등장한다.
그런데 예쁜 몸체를 한 1, 2회 작품들에서의 비대칭이 전략으로 보이지만 후진(?) 얼굴을 한 3, 4회의 작품들에의 비대칭이 조형적 전략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조형적 완결성을 도모하던 1, 2회 조각 개인전의 작품들과 달리 3, 4회에서는 조형적 완결성 자체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미끈한 팔다리의 몸체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삼라만상의 인간 세계의 표정들을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사람의 몸에 대한 아름다움으로부터 사람의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더 두드려져 나타난 3, 4회 조각 개인전에 나타난 작품들은 작품 형식의 외적 조건보다는 뜨거운 생명성이나 삶에의 애착 같은 작품 내용의 내적 조건에의 관심으로 자리 이동한 것이다. 가히 몸의 언어로부터 가슴의 언어로 전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의 비대칭이란 1, 2회 조각 개인전의 작품들에서처럼 형식적 완결성이라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달리 그 의도적 전략을 패기처분한 채 맞닥뜨린 생명성과 같은 뜨거운 대지 위에 직립한 채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작품 2- 자연의 원형 탐구와 ‘현실적 자연주의’의 미학
이번에 조각가 박휘봉이 새로이 선보이는 작품들 역시 ‘삐딱이의 세계’, 즉 어긋난 시메트리 의 비대칭 미학에 뿌리가 닿아 있다. 그런데 최근작은 마치 사람의 짝짝이 눈처럼 대칭에 근간한 비대칭이라는 외적 요소로부터 몸의 왼쪽에 자리한 심장처럼 본질적인 비대칭의 내적 요소로 더욱 더 깊숙이 들어와 앉은 느낌이다. 가빠지고 거칠어진 감수성의 호흡 안에 담겨진 ‘생명주의’의 주제의식에의 지속적인 추구와 더불어 최근 작가가 ‘자연주의’라는 본질 지향적 주제의식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유념해야 할 것은 그가 추구하는 자연주의가 내츄럴리즘(naturalism)식으로 표방된 ‘객관적 자연주의’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실계의 지평위에 올라선 ‘현실적 자연주의’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가 내세운 ‘도시의 변’이라는 3, 4회 조각 개인전의 주제의식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러한 작가의 관점을 조망해 볼 수 있다. 그는 실제로 3회 조각 개인전에서 앞서의 안면 조각상들과 함께 조명을 내뿜고 있는 야경 속의 도시의 빌딩을 형상화하여 설치적 어법으로 주제의식을 극대화한 적이 있다. 게다가 개념미술 작가 ‘솔르윗’의 미니멀한 입방체를 연상시키는 조각체들을 흩뿌리거나 결합시켜 공중에 띄운 설치를 감행해서 그의 현실적 자연주의를 매우 세련된 조형어법으로 도모하기도 했다. 분명코 어떤 측면에서는 이런 조형어법이 매우 작위적인 제스처로 읽힐 수 있는 위험을 노정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작업의 ‘현실적 자연주의’가 힘을 지닐 수 있는 근거는 매우 세련된 방식의 설치어법으로 접근하는 도시의 풍경들과 낯선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원시적 형상의 익숙하지 않는 도시인들의 형상이었다. 원시인, 외계인 같기도 한 낯선 안면상들... 아니 어떻게 이러한 인물들의 낯설음이 ‘자연의 원형’이나 ‘현실적 자연주의’를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휘봉의 작업에서 하나의 도상처럼 익숙해진 이 인물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얼굴과 유사성을 담지하면서도 낯설다. 그것은 돌의 형상 속에 박혀 있는 태고의 원시인으로 혹은 미래 속 어디, 아니면 현실계 저편 어디의 외계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강가나 냇가로 조약돌에게서 사람의 형상을 찾아 나선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가 선택하고 최소한의 손질을 통해 만들어낸 사람의 얼굴 형상이 태고의 원시인이든지 현실계의 내 이웃이든지 미래나 현실계 저편의 외계인의 형상으로 비추일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작가로서는 눈동자가 가득 찬 큰 눈과 각지고 길쭉한 코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입술을 가진 일련의 형상 속에서 사람의 본질적 형상을 발견해 내는 것이리라. 4회 개인전 때는 이와 같은 형상을 아예 흙으로 빚고 다량으로 구워내지 않았던가?
필자의 눈에는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보이는 이러한 인물 형상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원시적 힘으로 집결되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한 장치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에게는 자연적 대상을 분석하고 체계화시키지 못했던 태고의 원시인들의 형상이 도시인으로 표방된 이들 인물 속에서 오버랩되어 보인다. 서로의 경쟁의식 속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기둥에 가득 붙어있는 인물들은 집단의식 속에 개체의 정체성을 묻어버린 원시인들의 결집처럼 보이지 않는가? 버려진 나무 오브제나 구겨진 철판위에 올라서 있는 안면 형상들이 도시의 삭막한 주변부를 돌아보게 하면서도 그 질긴 원시적 생명성과 이른 바 전통에 근접하고 있는 현실적 자연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5회의 조각 개인전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가시화되어 나타난다.

5회 조각 개인전을 여는 에필로그 - 군집으로부터
이번 5회 조각 개인전은 앞서 고찰한 원시적 생명주의와 현실적 자연주의를 지속적으로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음각의 방법으로 자연석에 최소한의 흠집을 내면서 본래의 돌 형상을 살려내어 안면상을 돌 속에 은거시키는 작가의 인물은 더러 액자의 형식을 빌린 숨통 트인 박스 속에 들어가 개별체로 벽에 게시되기도 하지만 그의 전시에서 압권은 역시 개체들의 군집으로 드러난다.
군집은 목적 지향적 목소리를 공유하기가 다반사이지만 그의 작품은 개별체들의 굳게 닫힌 입술만큼이나 침묵의 목소리만을 공유한다. 도상학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그의 인물들이 그 형상을 모두 달리 한다 해도 공유의 침묵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너무나 장대하고 장중하다. 그것은 군집의 덩어리에서 자양분을 받고 꿈틀거리고 있는 생명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폐가가 된 오래된 한옥에서 구한 한국 전통의 기왓장을 몸체로 삼아 전시장 바닥에 장엄하게 직립하여 도열하고 있는 군(群)이나 몸통 없는 안면상들만 커다란 원형의 나무판위에 드러누운 군(群)에게서 발견되는 생명성은 화이트 박스의 공간 안에서 극대치의 효과를 발휘한다. 정점을 도달하고 있는 그의 숨 가쁜 그의 조형언어가 조용한 벽면에 반향을 거듭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조명을 받은 채 섬뜩할 만큼의 꿈틀대는 원시적 생명주의로 부활하고 있는 침묵의 군(群)이 외치는 아우성을 듣기를 기대해 본다. 군집으로부터의 생명주의, 그것이 이순을 넘긴 조각가 박휘봉이 자신의 지칠 줄 모르는 끊임없는 실험의지로 ‘현실적 자연주의’에 수혈하는 순수열정의 소산임을 이번 전시를 통해서 확인하길 기대해 본다.



생명의 힘찬 박동같은 드로잉
박휘봉의 작업방식인 드로잉은 새차게 흘러 내려오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의 힘찬 움직임처럼 신선함이 묻어있다. 작가가 선택한 동그란 주먹돌(호박돌)은 그 생긴 모양대로 돌 스스로가 변하고 싶어 하는 얼굴을 가졌는지를 작가는 본다. 그 돌의 모습이 작가에게 보여 주는 얼굴 모습에 걸맞게 연필로 스케치하듯이 절삭기(그라인더)를 사용하여 순식간에 포착하여 형상을 이룬다. 여기에서 그의 조형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명료함이 배어나온다.
명료함은 작가의 작업 행위를 최소한으로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소한의 조형행위는 바위나 돌에 적절한 인공을 가미한 민족의 전통적 경향이기도 하다. 이런 민족적 경향은 거북바위나 음양석, 마애불, 돌 축대 등에서 흔히 관찰이 된다. 최소한의 행위로 대상이 스스로가 이루지 못한 모습을 완전하게 채워주려는 것이기도 하다. 재료에서 생명력을 발견하고 그 존재 의미를 적합하고 합당하게 정리해내는 전통적인 미의식이 작가에게 녹아있다.

전통적인 미의식을 주체적 정신으로 이끌다.
자신의 예술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형적인 결단들은 한국에서의 현대예술이 서구 편향적이거나 국제적 양식 취향으로 편향된 것에 대한 깊이 있는 회의(懷疑)한 그 결과로 전통 미의식과 기법의 이해를 근원 삼아 예술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
초기 작품들에서 보여준 여성성이나 비천상에 대한 관심과 요즈음의 <도시인> 시리즈에서 시적이고 직관적인 조형의지 등은 전통을 얼마나 그가 강조하고 실천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또한 초기 여인상, <비상>, <율(律)> 시리즈를 작업한 시기에 보여준 여성성이나 비천상에 대한 관심이 전통 평면 회화 공간을 입체적인 모습으로 끌어 왔다면, 현재의 작업은 재료 자체의 생명력을 발견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입체적인 의미로 자연스럽게 육화 시켰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도 질적인 변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질적인 변화는 작가가 외형적인 연륜을 넘어서서 젊은 정신의 활달함과 자유분방함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수용적 여성성에서 실존으로
작가는 현대 문명을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로 바라보고 있다.
80년대인 초기 작품들은 여인상을 모티브로 인체의 미에 인고하는 순수한 여성성을 구현하였다. 90년대 들어서는 비천상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비상>과 <율>시리즈로서 움직임의 조형적 형상화와 인체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작업에 정교한 과정(process)과 숙련된 조형방법을 연구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후 작업은 큰 진폭을 띄고 변화한다.
99년의 <도시의 변>전시 이후부터 다양한 매체를 도입하면서 현대사회에서 메마른 도시인의 심상을 조명하고 있다. 전시 방식 또한 설치작업으로 된 디스플레이를 전개한다. 배경에 입체파 기법의 조형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아파트와 주제인 도시인 특히 전시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도시와 도시인에 대한 실존적 의식을 표출하였다.

문명에 대한 고언(苦言)
이번 전시 역시 문맥을 이어서 도시인의 이미지가 모티브(motive)가 되고 있으며, 다양한 인간 표정과 얼굴의 유형을 통해 작가는 특유의 도상과 알레고리(allegory,寓意)로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작들은 마치 오버코트를 입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몸은 외피만 있어 텅 비어 있고, 무의미한 듯하지만 강한 얼굴 표정들의 조상들은 한편 구도자의 형상으로도 감지가 된다. 종교 도상을 보는 듯한 엄숙함 마저 등장한다. 그가 보여준 이전의 도시인 조상에서 보여준 현대 도시인의 삶에 대한 심상 표현이 보다 진전하여 정신적인 모습이 강조된 점은 이전시를 기대하게 한다.
호박돌이라고 일컫는 돌은 물과 함께 만들어진 돌이다. 작가가 도시인의 얼굴 재료로 호박돌을 선택한 것은 물결에 떠밀리고 서로 부딪혀서 동그스름해진 형상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라는 시간의 급격한 물결 속에 서 있는 도시인은 도시인이 아니었던 시점부터 현재의 도시인으로 변화해온 모습을 돌은 통째로 내재화 한다. 자연으로부터 작가에게 선택된 순간 새롭게 의미 지워지고 재료로 전이된 돌은 작가에게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이 돌에는 시간이 고스란히 함께 들어있다. 이런 조형화는 햇볕과 비, 바람을 견디어낸 숫기와를 선택한 것과도 일맥상통하게 보인다. 혼자란 의미보다 대중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함께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자신의 모습으로 모양을 이루고 견디어 낸 것들과도 연관이 있다.
작가는 도시 문명 속에 기투 된 인간의 모습을 예술성으로 날카롭게 반성한다. 도시의 주변들은 점점 더 넓게 도시화 되고 있다. 이는 인구증가와 개발이익과 같은 요인으로 생활의 모습은 양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삶의 질적인 모습들은 답보이거나 열악해져서 거꾸로 인 듯하다. 특히 안전한 삶은 거의 보장 받을 수 없음을 작가는 <도시인>들로 표현하고 있다.

욕망의 메타시선
작가의 작업노트 「도시의 변」, 박휘봉 작업전 팜프렛, 1999.11.10.
에는 인간의 삶을 화려하게 갖고자하려는 욕망이 인간을 누더기로 만들고 그 구겨진 것을 펼 생각조차도 하지않는, 그리고 그것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 인간이 허공을 향한 초점 없는 눈동자와 사건과 공허함을 토로한다.
공허한 시선은 이번 전시작업에서 새로운 해석이 강조되고 있다. 예술은 대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의 변화에서 비롯된 여러 방식 중에서 선택이었다면 그가 추구하고 있는 시선은 독특한 일면이 있다. 근·현대가 감시의 시선이거나 자신의 영역을 확인한 시선이라면, 그의 시선은 감시하는 시선을 감시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보이기 위한 것보다. 보고 있음을 보게 한 것이다. 시선의 시선인, 시선을 넘어선 메타-시선이다. 거울을 통하거나 한 것이 아닌 직접적인 바라보기이고, 시선의 되돌려 받기를 한, 침묵의 응시인 것이다.

대안과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서는 단초
인간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인간이란 통찰은 그의 깊은 예술철학과 예술에 임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문명비판적인 자세가 관객으로 하여금 반성을 이끌어낸 면은 인정 된다. 그리고 철저한 반성이 새로운 비판을 넘어서 문명에 대한 대안과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서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도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단초들이 향후 박휘봉의 작업 속에서 인간을 위한 또는 문명에 대한 큰 희망을 제시하는 작업으로 남기를 바란다.

양준호 (미술사)


박휘봉 전 서문

직립하는 인간군상,
비대칭(dissymmetry)의 생명성에 뿌리내린 ‘현실적 자연주의’

김성호(미술평론가)

박휘봉은 이번에 다섯 번째의 조각 개인전을 갖는다. 조각에 입문하기 전의 부산사범대학 미술과를 졸업(1962년)한 이후의 두 번의 수채화 개인전(1964년, 1967년)까지 합하면 그는 실제로 일곱 번째의 개인전을 맞이한다. 그가 영남대학교 조각과에 발을 들이며 ‘조각의 세계를 향한 미혹(迷惑)’의 세월을 시작한 것이 나이 불혹(不惑)이 되고 나서부터이니 ‘조각에의 길’에 관한 한,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는 공자의 언구(言句)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조각언어를 체계화한 채 변신의 운위에 짐짓 조심스러워할 나이에 그는 조각 수련기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도 모자라 이순(耳順)이 넘어선 여태껏 거듭되는 실험으로 자신의 작업을 변모시켜왔다. 작가에게 있어 끊임없는 창작욕구란 늘 변화에의 갈망을 위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휘봉은 작가주의에 매우 충실하고 솔직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연륜보다 젊은 작가’라 호칭하기도 한다.

과거의 작품 1 - 구멍 혹은 틈새, 대칭형 만남
조각에의 학업을 마치고 보여준 첫 개인전에서의 작품들은 다분히 매스나 볼륨에의 기본적 조각어법에 충실한 장식적이고 기념비적인 인체 변형체의 추상조각들이었다. 그의 포트폴리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학업기에 보여준 탄탄한 인체 모델링 수련이 이러한 인체변형의 세련된 스킬의 추상조각을 가능케 하였는데 우리는 이 작업들 속에서 당시의 형상(form)에 대한 작가의 지극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몸체의 날렵한 형상이나 매스의 황금분할적 배분형식은 그의 작업을 매우 조형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족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그 효과는 기실 쌍방 매스(혹은 단일 매스)의 ‘대칭형 만남’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대칭형 만남? 그 만남이란 둘(혹은 하나) 사이에 늘 틈새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의 작업에서 이른바 투과체의 조각적 특질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런 연유로부터 기인한다. 조각의 개별체 몸체들이 만나면서 혹은 하나의 조각 몸체가 갈라지면서 만들어내는 틈새는 ‘구멍’을 형성한다. 그 ‘구멍’의 공간은 외부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각몸체 안으로 끌어들이고 공기의 운위를 감지하게 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이러한 조형어법은 관자들에게 꽉 막힌 응축형의 조각몸체를 바라보는 시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조각이 거하고 있는 외부환경과 함께 조각을 바라보게 하는 ‘시선 확장의 경험’을 제공한다.
‘헨리 무어’나 ‘브랑쿠지’의 조각들로부터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구멍’의 공간을 통한 시선 확장은 박휘봉의 두 번째 개인전 출품작들에서도 여전히 경험하게 된다. ‘비약(飛躍)’이란 제명을 달고 있는 시리즈 작업은 인체로부터 연유했다기 보다는 새나 물고기의 형상을 더 닮아있는데 조각몸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구멍’이 우리의 시선의 확장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투과체의 공간은 ‘구멍’과 함께 트여진 틈새의 공간까지를 포함한다. 쉽게 말하면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식의 1회 조각 개인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조각의 형태는 물론이고 조각 몸체 사이로 그 구멍이 완결되지 않고 빠져나가는 2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작품들 까지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들어 올린 팔의 형상 사이로 혹은 직립하고 있는 다리 형상 사이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외부로 트여진 틈새를 확인해낼 수가 있다. 이렇듯 구멍과 틈새의 공간이 상호 침투하는 대칭형 만남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첫 단추가 된다.

과거의 작품 2 -어긋난 시메트리(symmetry)
앞서 우리는 틈새의 공간이 둘의 만남이든 하나의 갈라진 분리형 만남이든 간에 ‘대칭형 만남’에서 근원하고 있다고 고찰한 바 있는데 박휘봉에게서 이러한 대칭형의 시메트리(symmetry) 구조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 언급해 보면 ‘어긋난 시메트리’라 할 수 있는 이것은 사실 비대칭형의 디시메트리(dissymmetry) 구조에 다름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칭구조에 근간한 비대칭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상이함은 늘 닮아있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박휘봉의 이러한 전략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인체의 좌우 대칭형 구조는 기실 좌우의 닮음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서 좌우의 또 다른 ‘다름’을 확인해 낸다. ‘짝짝이 눈’과 같은 이러한 미세한 다름은 다름의 의미를 더 본질적으로 사고케 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닮음의 좌우가 움직임을 표상하면서부터 그 형상의 구조가 달라지는 경우에는 미세한 다름의 진폭이 매우 넓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율동미 혹은 운동감과 같은 ‘시간성’이 개입된 형국을 만들어낸다. 1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인체형상으로부터 기원한 추상 혹은 비구상적 양상이나 2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비상’ 시리즈에서 우리는 이러한 율동미나 운동감을 여실히 발견해낼 수 있다.
1회 조각 개인전의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유사한 좌우의 구조가 미세하게 다름을 표방하고 있거나 춤을 추는 듯이 허리를 비틀고 있는 직립의 조각몸체가 대칭형으로부터 근간하면서도 비대칭의 양상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2회 조각 개인전에서의 작품들에서도 유선형의 몸체로 수면 아래를 유영하고 있는 물고기처럼 혹은 공중으로 비상하고 있는 새처럼 보이는 조각몸체가 좌우, 상하가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것을, 즉 대칭에 근간하면서도 비대칭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해낸다.

최근의 작품 1 - 생명성에 직립하는 비대칭의 미학
이른바 ‘어긋난 시메트리’라 불러봄직한 박휘봉의 디시메트리 구조는 1, 2회 조각 개인전과 형식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보여준 3, 4회 조각 개인전에서도 일관되게 지속된다. 혁신적인 변화라 함은 이전에 보여준 매끈한 표면과 세련된 공예적인 장식성, 환경조형물로 확장되는 듯한 수직성의 기념비적인 양태가 거친 표면과 버려진 오브제의 결합을 통한 설치적 어법의 조형방식으로 전이한 것을 지칭한다. 구조와 형식면에서 진폭이 큰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디시메트리 구조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소재, 구체적으로는 얼굴을 그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다.
유사하지만 늘 다른 좌우, 그 ‘어긋난 시메트리’의 미학은 자연석의 거친 표면위에 드러난 사람 얼굴들 속에 올곧이 담겨있다. 한결같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안면상(顔面像)들이 더러는 고대인들이 세운 거대석상을 상기시키듯이 이목구비는 작가가 최소한의 손질을 통해서 만들어낸 원시적 형상을 지니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만화 속에 나오는 우주인의 형상을 닮아있기도 한 안면상들은 높은 좌대 위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침묵의 표정으로 도열한 채 관객을 응시한다. ‘도시의 변(辯)’이라 이름붙인 전시부제에서 확인하듯 이들은 작가가 만들어낸 도시인들이다. 석상이라는 원시의 형태, 애니메이션 안의 우주인 같은 미래적 형태가 조합된 낯선 이방인들같은 도시인의 형상은 그 개별체 내에서의 좌우의 비대칭과 상이함처럼 개체 간에 서로 그 모습을 달리 하면서 등장한다.
그런데 예쁜 몸체를 한 1, 2회 작품들에서의 비대칭이 전략으로 보이지만 후진(?) 얼굴을 한 3, 4회의 작품들에의 비대칭이 조형적 전략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조형적 완결성을 도모하던 1, 2회 조각 개인전의 작품들과 달리 3, 4회에서는 조형적 완결성 자체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미끈한 팔다리의 몸체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삼라만상의 인간 세계의 표정들을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사람의 몸에 대한 아름다움으로부터 사람의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더 두드려져 나타난 3, 4회 조각 개인전에 나타난 작품들은 작품 형식의 외적 조건보다는 뜨거운 생명성이나 삶에의 애착 같은 작품 내용의 내적 조건에의 관심으로 자리 이동한 것이다. 가히 몸의 언어로부터 가슴의 언어로 전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의 비대칭이란 1, 2회 조각 개인전의 작품들에서처럼 형식적 완결성이라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달리 그 의도적 전략을 패기처분한 채 맞닥뜨린 생명성과 같은 뜨거운 대지 위에 직립한 채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작품 2- 자연의 원형 탐구와 ‘현실적 자연주의’의 미학
이번에 조각가 박휘봉이 새로이 선보이는 작품들 역시 ‘삐딱이의 세계’, 즉 어긋난 시메트리 의 비대칭 미학에 뿌리가 닿아 있다. 그런데 최근작은 마치 사람의 짝짝이 눈처럼 대칭에 근간한 비대칭이라는 외적 요소로부터 몸의 왼쪽에 자리한 심장처럼 본질적인 비대칭의 내적 요소로 더욱 더 깊숙이 들어와 앉은 느낌이다. 가빠지고 거칠어진 감수성의 호흡 안에 담겨진 ‘생명주의’의 주제의식에의 지속적인 추구와 더불어 최근 작가가 ‘자연주의’라는 본질 지향적 주제의식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유념해야 할 것은 그가 추구하는 자연주의가 내츄럴리즘(naturalism)식으로 표방된 ‘객관적 자연주의’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실계의 지평위에 올라선 ‘현실적 자연주의’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가 내세운 ‘도시의 변’이라는 3, 4회 조각 개인전의 주제의식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러한 작가의 관점을 조망해 볼 수 있다. 그는 실제로 3회 조각 개인전에서 앞서의 안면 조각상들과 함께 조명을 내뿜고 있는 야경 속의 도시의 빌딩을 형상화하여 설치적 어법으로 주제의식을 극대화한 적이 있다. 게다가 개념미술 작가 ‘솔르윗’의 미니멀한 입방체를 연상시키는 조각체들을 흩뿌리거나 결합시켜 공중에 띄운 설치를 감행해서 그의 현실적 자연주의를 매우 세련된 조형어법으로 도모하기도 했다. 분명코 어떤 측면에서는 이런 조형어법이 매우 작위적인 제스처로 읽힐 수 있는 위험을 노정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작업의 ‘현실적 자연주의’가 힘을 지닐 수 있는 근거는 매우 세련된 방식의 설치어법으로 접근하는 도시의 풍경들과 낯선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원시적 형상의 익숙하지 않는 도시인들의 형상이었다. 원시인, 외계인 같기도 한 낯선 안면상들... 아니 어떻게 이러한 인물들의 낯설음이 ‘자연의 원형’이나 ‘현실적 자연주의’를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휘봉의 작업에서 하나의 도상처럼 익숙해진 이 인물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얼굴과 유사성을 담지하면서도 낯설다. 그것은 돌의 형상 속에 박혀 있는 태고의 원시인으로 혹은 미래 속 어디, 아니면 현실계 저편 어디의 외계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강가나 냇가로 조약돌에게서 사람의 형상을 찾아 나선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가 선택하고 최소한의 손질을 통해 만들어낸 사람의 얼굴 형상이 태고의 원시인이든지 현실계의 내 이웃이든지 미래나 현실계 저편의 외계인의 형상으로 비추일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작가로서는 눈동자가 가득 찬 큰 눈과 각지고 길쭉한 코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입술을 가진 일련의 형상 속에서 사람의 본질적 형상을 발견해 내는 것이리라. 4회 개인전 때는 이와 같은 형상을 아예 흙으로 빚고 다량으로 구워내지 않았던가?
필자의 눈에는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보이는 이러한 인물 형상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원시적 힘으로 집결되는 데 있어 매우 유효한 장치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에게는 자연적 대상을 분석하고 체계화시키지 못했던 태고의 원시인들의 형상이 도시인으로 표방된 이들 인물 속에서 오버랩되어 보인다. 서로의 경쟁의식 속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기둥에 가득 붙어있는 인물들은 집단의식 속에 개체의 정체성을 묻어버린 원시인들의 결집처럼 보이지 않는가? 버려진 나무 오브제나 구겨진 철판위에 올라서 있는 안면 형상들이 도시의 삭막한 주변부를 돌아보게 하면서도 그 질긴 원시적 생명성과 이른 바 전통에 근접하고 있는 현실적 자연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5회의 조각 개인전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가시화되어 나타난다.

5회 조각 개인전을 여는 에필로그 - 군집으로부터
이번 5회 조각 개인전은 앞서 고찰한 원시적 생명주의와 현실적 자연주의를 지속적으로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음각의 방법으로 자연석에 최소한의 흠집을 내면서 본래의 돌 형상을 살려내어 안면상을 돌 속에 은거시키는 작가의 인물은 더러 액자의 형식을 빌린 숨통 트인 박스 속에 들어가 개별체로 벽에 게시되기도 하지만 그의 전시에서 압권은 역시 개체들의 군집으로 드러난다.
군집은 목적 지향적 목소리를 공유하기가 다반사이지만 그의 작품은 개별체들의 굳게 닫힌 입술만큼이나 침묵의 목소리만을 공유한다. 도상학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그의 인물들이 그 형상을 모두 달리 한다 해도 공유의 침묵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너무나 장대하고 장중하다. 그것은 군집의 덩어리에서 자양분을 받고 꿈틀거리고 있는 생명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폐가가 된 오래된 한옥에서 구한 한국 전통의 기왓장을 몸체로 삼아 전시장 바닥에 장엄하게 직립하여 도열하고 있는 군(群)이나 몸통 없는 안면상들만 커다란 원형의 나무판위에 드러누운 군(群)에게서 발견되는 생명성은 화이트 박스의 공간 안에서 극대치의 효과를 발휘한다. 정점을 도달하고 있는 그의 숨 가쁜 그의 조형언어가 조용한 벽면에 반향을 거듭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조명을 받은 채 섬뜩할 만큼의 꿈틀대는 원시적 생명주의로 부활하고 있는 침묵의 군(群)이 외치는 아우성을 듣기를 기대해 본다. 군집으로부터의 생명주의, 그것이 이순을 넘긴 조각가 박휘봉이 자신의 지칠 줄 모르는 끊임없는 실험의지로 ‘현실적 자연주의’에 수혈하는 순수열정의 소산임을 이번 전시를 통해서 확인하길 기대해 본다.



박휘봉의 작품세계
도시인의 상(像)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팽개쳐져 있지만 그것에 눈, 코, 입
아니 눈 하나 없든 코가 비틀어졌든 입이 한 쪽 떨어져 나간들 어떠랴!
나는 다만 그들의 내재된 생명을 일깨운다.

자연은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말하고 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박휘봉 작가 노트 중에서)

1.
박휘봉선생은 버려지고 떨어져나간 도시인의 얼굴을 통해 현대인의 삶의 편린을 본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담아 버려지고 떨어져 나간 것을 모아 깁고 붙이며 내재된 생명을 본다. 그렇게 차가운 돌과 철은 작가의 열정과 정성어린 손길로 <도시인>의 얼굴을 일깨운다. 박휘봉 선생에게서 본 열정은 뜨겁거나 차가운 희열이기 보다는 진심을 담아 놓은 정성(精誠)이다.
내가 보았던 박휘봉선생의 열정, 진심이 깃든 정성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지난해 강정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후배작가의 작품 설치를 도와주는 모습에서였다. 내리쬐는 햇볕아래서 작품 설치를 도와주는 모습은 마치 창작의 과정에서 열정을 쏟아 붓는 모습 그 이상이었다. 정교한 기술이 없이는 야외전시를 위한 설치가 어려운 몇몇 작가들을 충실히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신의 작품을 위해 쏟는 열정에도 궁금증이 생겼다.
이번 달성문화재단 초대로 이루어지는 개인전을 위해 작품 제작의 과정을 보게 된 것은 작가의 삶과 창작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개인전을 위해 신작에 몰두 하는 박휘봉선생의 모습은 후배의 작품 설치를 도와줄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희수(稀壽)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을 다루고 용접하는 열정적인 모습, 무엇보다 후배나 동료 작가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작품 이전에 인간, 사람됨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줄 작품 역시 인간의 모습, 익명의 <도시인>이다. 수십 년을 얼굴 이미지에 천착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람’다운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사색의 여정이 바로 그의 작품이리라. 그렇기에 힘겨운 삶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보통사람의 ‘얼굴이미지’를 크거나 작게 얼굴마다 정성을 담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간에 발표했던 전시의 주제가 <도시의 변(辯)> 혹은 <도시인>으로 얼굴 이미지(像)에 집중해 온 것을 보면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 그러한 꿈을 익명의 얼굴, 삶의 애환을 녹여낸 묵묵한 얼굴을 돌에 새기고 철로 조형해 가는 것이 그의 치유이자 창작활동의 의미일 것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도 안경을 착용하고 벙거지 모자를 쓴 도시인의 모습이다. 작가는 엿가락 같은 철을 잘라 수백 번의 용접으로 거대한 <도시인>의 얼굴을 만들었다. 수백 수천의 철 조각을 마치 수행하듯 용접을 하고 또 하면서 하나의 커다란 얼굴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익명의 <도시인>이다. 이 거대한 얼굴, 평범하지만 위대한 백만 천만의 도시인이 하나의 얼굴에 담겨 있음이다. 이번 전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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