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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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배

작가 작품

TOTEM

평화

탐욕

공(Emptiness)

고도를 기다리며...

날지 못하는 새

인간의 굴레

박제된 4월

어부의 초상

박제된 4월

고 강승우소위상

제주교육대학교 정문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센터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센터

태평양전쟁희생자위령탑

태평양전쟁희생자위령탑

제주국제평화센터

제주국제평화센터

작가 프로필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조각과 졸업
국전, 대한민국 미술대전 (국립현대미술관)
OSAKA 현대미술관초대전. 2009-Comparaisons(France Paris)
2012-Art Fair CIGE - China( Beijing)
2014,2015-Asia Hotel Art Fair Hongkong
2014-Seoul ART Show(서울COEX)
2015-KIAF(서울COEX)
2012-대한민국 미술인상 수상

任春培 개인전
88-(제주세종미술관). 95-(제주도 문예회관, 서울 스페이스샘터화랑)
99-(제주도문예회관 초대). 2009-(任春培 조각 30年展, 제주도문예회관)
2016-(France, Nogent-sur-Marn Sity,
Le Carre des Coignard 미술관초대)
2017-(Japan,Gyoto sity, Gallery MARONIE)
2019-(제주4.3, 71주년 특별초대전. 제주4.3평화재단)

전: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회장, 제주문화예술재단 조형연구소장,
충청남도미술대전 심사위원, 제주도미술대전 심사위원,
제주도 문화재 전문위원, 미술장식품 심의위원
제주국제Arts Fair, Festival(운영위원장,추진위원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조각부문심사위원장, 제주현대미술관 운영위원장,
제주도립미술관 운영위원장 역임

현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교수
한국 조각가 협회 회원

작가 노트

								

평론


                    4월의 斷想(단상)에 깃든 인생 성찰의 미학적 의미 

미술평론가 김유정


2019년 바람의 행로처럼 조각으로 마음을 열다
아서 단토(Arthur Danto, 1924~2013)는 『무엇이 예술인가(What Art Is)』에서 예술의 정의를 “의미의 구현이고, 그것의 힘을 움직이는 것은 해석“이라고 했다. 조각가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가장 뛰어난 것은 인지능력인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인간은 분명 상징적 동물이다. 모든 삶이 상징이고, 상징에 의해 세상이 설명되는 것이다. 의례 또한 상징이며 우리들의 물음이자 대답이다. 그런 점에서 조각이란 인간의 상징 형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번 임춘배의 조각전은 바로 “생에 대한 의미 있는 물음”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실체들, 그리고 그것에 연관되고 파생되는 인생의 다양한 일들에 어떻게 의미를 찾을 것인가. 그는 한때 불교를 믿었던 적이 있고, 또 지금 한 때의 가톨릭을 수용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종교의 상(像)은 갈래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의 근원적 뿌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종교란 존재의 열린 창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공포를 느끼게 하는 닫힌 방이기도 하다. 종교는 근원적인 해석을 주지 않는다. 대개 도덕적인 계명과 실천이 면죄부를 줄 뿐이다. 2019. 4.3평화재단 특별展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묻는 시간의 장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희노애락은 그 사이에 낀 존재의 파동일 뿐인데, 삶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니 상생과 공존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고 죽음을 생각하니 평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삶과 죽음의 문제는 실존의 문제라고 해야 맞다. 실존은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가 얽혀있는 저장소이다. 우리는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세계를 보기도 한다. 또한 계기를 통해서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고 어떤 사실에 관여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무임승차란 없다. 의식하지 않아도 댓가는 항상 있으며 거기에는 자연히 원인이 따라온다. 오늘 내가 있다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원인의 총체 일진저.
임춘배는 이번 4월의 단상(斷想)에서, 모두 일곱 개의 주제를 제시한다. 그 주제들은 자기의 생각에 대한 물음이자 해석인데 물론 예술이란 해석보다는 물음 일변도의 표현 행위일수가 있다. 인간은 때로 우회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가끔 한번은 우회 없는 삶을 지향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물음 자체가 자신의 삶 자체일수도 있는데 바로 다른 사람의 해석을 빌려 나를 찾으려는 행위인 것이다. 당신의 해석이 나의 물음이자 결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제된 4월. 4월, 제주의 봄은 늘 잔혹하다. 또 역사의 잔혹함이 이어진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표현대로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만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월은 흘렀건만 슬픈 자들은 떠나가도 그 상처들만 딱딱한 군살처럼 우리 몸에 박혀있다. 실감나지 않는 무통(無痛)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그래도 수난자의 편에 서서 과거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노력들은 4·3의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일상은 모든 아픔을 쉽게 잊게 하고 슬픔마저 차단하고 돌아오는 기일(忌日)이 돼야 슬픔을 환기시키지만 우리는 언제고 꼭 기억해야만 한다.
평화의 역사는 박제돼 가고 있다. 이미 세계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럴수록 제2, 제3의 4·3이 재발할 가능성이 커진다. 세계는 적과 아의 구별도 모호해졌고, 동맹들 간에 불신도 극에 달했다. 민족주의 간 충돌이 다시 평화를 위협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정세에 4월이 와도 서서히 기억 상실에 걸릴 것만 같다. 4월의 단상이란 4·3의 상징성 을 말하고자 했다. 4월이 되면 제주인들은 대개 4·3트라우마에 빠진다. 박제란 바로 평화에 대해 답을 알고 있는 세력들의 방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타나토스에 의한 에로스의 파괴다. 그래서 상생의 파괴가 염려스럽다. 결국 우리가 꿈꾸는 것은 상생의 바람이다. 평화는 바람의 날개가 있다. 염원의 마음으로 하늘을 보지만 그러나 새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한다. 여인은 얼굴이 있어도 그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 현재까지도 4·3의 왜곡은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가장 고귀한 가치임에도 항상 위협을 받는다. 이념은 잠복됐다가 민중들을 교란시키며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난다.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다. 박제란 오로지 기념비에 가두는 행위로 보상받고자 하는 현재의 우리들에의 모습이 아닐까. 그것은 평화의 행동이 아니다. 그럴수록 다시 짙은 비애의 경고음이 들리는 것 같다. 항상 우리 안에서 평화에 대한 공격과 균열이 있는 것을 명심하는 것 박제가 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세상에 균형을 잡는 것이 평형수지만 그것에 균열이 가게 되면 불안의 요인이 싹튼다. 소중하게 이루고 지켜온 시간도 순식간에 파괴가 일어난다.
공존(共存)은 한 공간에서 함께 산다는 사실을 합의하여 감성으로써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정치학적으로는 다른 종족이나 이념을 동의하고 상생하고자 하는 상태를 말한다. 공존을 위한 전제는 상생이다. 상생을 하려면 평화라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공존의 반대가 적대가 아닌가. 공존을 강조할 때 혈명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 기반이 바로 혈중심의 사고임을 알 수 있다. 물질적 이념적 동의라는 전제 없이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혈연이다. 그러나 가족과 같은 작은 단위의 상생체가 확대되면 사회는 복잡해지고 생산과 능력, 소유와 분배에 대한 수많은 요구들이 거침없이 나오게 된다. 적어도 공존하려면 지역, 국가에 대한 조약이나 협약, 동맹이 있어야 하며, 그것마저 정기적으로 서로의 약속에 대한 이행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분배에 공존하려면 이념이 같아야 하고, 경제적 타협이 있어야 가능하다. 임춘배의 <공존>은 바로 현대에 벌어지는 계산된 관계들, 무역, 통상, 자원과 관계된 실익의 정치적 지형이 우리 지구를 감싸고 있다. 공존을 하려면 설계와 실측점이 있어야 한다. 한 나라의 발전이냐 전망이냐는 교호상대 국가와의 상생 방법에 달렸다. 이 상징적 의미로써 콤퍼스는 서로의 이익적 관계, 실리적 관계를 가늠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人間愛. 마음은 침잠해지고 감정은 흔들리는 채 실존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생물학적 정체성을 차치하고라도 그것의 정신적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상대방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사랑은 그리움의 표현이고, 그것이 생명의 숭고함이다. <어부의 초상>과 <윤회>라는 한 쌍의 부조 작품은 한 어부의 생명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 어부의 사랑의 의미를 확대하면 모든 세계의 평화가 보이기 때문이다. 평화에는 바로 인간적인 사랑의 의미가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어부의 초상>은 평범한 직업인의 초상이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 많은 것 중의 하나. 그럼에도 그 어부의 정신에서 자애로운 기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물은 만물대로 이 세상을 구성하는 에너지가 있으며 만물의 귀천은 원래부터 없었다. 인간의 가치는 바로 만물을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 공존하려면 사랑이라는 대전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사랑의 의미를 다양하게 표출해 왔다. 탐욕이 인간의 굴레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사랑의 해석을 잘못했다는 증거다. 파괴의 신인 타나토스가 바로 사랑의 신인 에로스의 등 뒤 모습이라는 사실에서 인간의 욕망을 본다. 그럼에도 사랑은 항상 파괴의 본능을 이긴다.
<어부의 초상>은 젊은 부인이 암 투병하다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내의 무덤을 찾는 어부 남편이다. 그 나날의 사랑의 의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따뜻함을 볼 수 있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 지고한 순애보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윤회>란 어부 아내의 얼굴로 자신에게 베풀었던 사랑을 다시 아내에게 돌려주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적 과보(果報)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94)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었다. 베케트는 부조리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한적한 시골 나이를 먹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버드나무 앞에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고도는 온다고도 하고 오지 않느다고 하면서도 그를 기다린다. 한번은 기억났다가도 한번은 기억나지 않는, 확실함이란 아무데도 없다. 연극은 고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를 뿐, 단지 기다린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이유가 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기약도 없이 인간은 기다림이 원초적 본능임을 일깨운다. 금방 잊어버릴 말이라도 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 존재란 바로 불확실하더라도 기다림이 있다는 사실, 인간의 의식을 들여다보는 연극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올지 그들은 모르기도 하거니와 기다리면서도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되는 대로 사는 방랑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고도란 누구일까. 우리 자신이다. 아니면 모든 희망이기도 한다. 전쟁은 허무주의를 양산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도 그런 전쟁의 허무주의가 짙게 깔린 작품이다. 삶이란 바로 고통이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개인마다 분명 저마다의 고도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일수도, 돈일수도, 사랑일수도, 인간의 본능은 모든 기다림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임춘배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브론즈로 만든 전신상으로 누구인지가 중요하지가 않다. 나일수도 당신일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자아일수도 있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 중에 기다림은 대상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적 인식에 따라 그 기다림이 대상과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사실적인 작품은 이 기다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수많은 나, 당신, 우리 모두가 그 형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합성 작품인 <하늘의 빛>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속석상에 있다. 절망의 표현, 인간의 좌절감을 반영한 <날지 못하는 새>는 번쩍이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존재, 인간의 마음은 커지지만 그것을 수용치 못하는 육중한 욕망의 좌절을 말하고 있다. 스텐레스와 제주석처럼 인간의 심신은 서로 이질적인 욕망의 덩어리지만 사실은 전체도 부분이고 부분도 전체로서 작동한다. 부셔졌다가도 뭉쳐지는 존재의 욕망은 사실은 경계를 넘어선다. <인간의 굴레>는 컬러 조각이다. 컬러는 우리의 마음 색이다. 색은 욕망이자 구체적인 물질이다. <탐욕>의 순수했던 마음이 화려한 무늬에 물 들면서 성격이 변하는데 인간 관계에 날선 각을 만들기도 한다. 날 선다는 것은 탐욕을 드러내는 공격성이다. 아담 스미스의 말대로,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란 바로 작은 노력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성취하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고 바로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임춘배는 돼지를 탐욕의 상징으로 설정하고 있다. 돼지의 부정적인 측면, 곧 지속적으로 식탐하는 돼지의 모습에서 인간의 탐욕을 읽어낸다. 탐욕의 근원은 이기심에 의한 멈추지 않는 욕심에 있다. 부에 대한 욕심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와 관련이 큰데, 바로 사적 소유제도 때문이다. 말인즉슨 개인의 능력에 따라 소유할 수 있다지만 그것의 전개되는 결론에 이르게 되면 사적 소유제도는 오히려 빈익빈부익부의 체제로 사람들을 내몬다. 급기야 최후에는 대자본의 소수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역사는 사회주의적 대안을 읽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탐욕이란 무엇인가. 바로 물질적 욕망의 최고점이고 돈으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지배구조를 바라는 것이다. 임춘배는 사회적 품격도 돈으로 말하는 세상, 인격과 지위도 돈의 다소(多少)와 무게로 평가하는 사회에 대한 강한 경고성 작품을 내놓았다. 이때 ‘돼지 같은 놈’은 어떤 위치에 있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최대의 욕이 될 것이다.

토템(Totem). 토템은 인류의 여명기에 자연물에 대한 믿음이면서 신앙물이고 종교의 기원을 엿보게 한다. 토템은 종족마다 상징이 다르고, 또 그것으로 민족주의의 원원과 갈래를 가늠하기도 한다. 어쨌든 토템은 인류의 문명화의 과정, 오늘날 개인의 기복 신앙과 우상에 대한 상징과 그 기원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자문명의 시대에도 인간은 무엇인가에 기대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미래를 알려고 하고 현실적 삶을 행복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더욱 안정을 바라는 욕구는 지상에서 바벨탑과 같은 기념물을 세우기에 이른다. 과시하고 터부에 묶어두는 이 심리적 뿌리가 토템사상에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토템은 권력을 위한 기념물로서 그것을 세우면서 집단 무의식을 아우르고 안정적 권력을 확보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이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 억압적 국가체제로 변모할 수 있는 잠재적 상징체가 된다.

공(空, Emptiness). 공(空, Emptiness)이란 텅 빈 상태를 말한다. 원래 인도어 슈니야타(ğūnyatā)의 역어이고 그 뜻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또 인도 수학에서 영(零, 제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공이란 모든 물질적 존재는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늘 변화해가는 존재이므로, 변화하는 관계는 있지만 실체로서, 혹은 주체로서, 또는 자기 성찰로는 포착할 바가 없고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없음도 없는 상태, 우리 인간이 이 공사상을 얻게 되면 무아(無我), 즉, 얻지 않음으로써 없는 상태(無所有)에 이르게 되는데 물질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공사상을 얻기란 무척 힘들다. 있어봐야 없음을 깨달을 수 있으니 우리 인간에 그 없음이란 있어본 적이 없고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있음을 유지했기 때문에 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욕망을 끊는 방법, 벼락으로 일격에 그 욕망의 집착을 깨부수는 일, 오로지 원각(圓覺)의 정진이 없으면 그 공에 이를 수가 없다. 인간의 주변에는 온갖 색(色), 즉 물질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무엇들이 있기 때문에 그 집착과 소유를 거부하기란 더없이 어렵다. 현재의 사회적 표현으로 돌아오면 공이란 얻지 않으려는 마음, 그럼으로써 소유하려고도 소유할 수도 없는 삶을 지향하는 삶이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비움이란 가득 있는 것을 덜어가는 행위이고, 채움이란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더욱 집착해 모으는 행동을 말한다. 이 空은 우리 세계에 대한 모순들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인간 본연의 역사적 반영이다. 채움이 우리 세계를 망쳤고, 전쟁과 학살의 원인되었다는 것이고, 결국 색(色)의 무존재가 아니라 색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집착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세계의 평화에 이르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이어도의 눈물. 우리는 이어도의 존재를 믿는가. 믿고 있다. 제주인들은 이어도를 수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뱃길에서 돌아오지 않는 님을 그리는 정한(情恨)의 표현이기도 하다. 전설이란 어떤 결과를 자기식대로 믿고 싶은 결론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유토피아, 현실적 어려움의 시간을 넘어서려는 비극적 알레고리. 그런 인간의 삶의 요소로서의 이상향은 가혹한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가상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그러나 그 동경이 마라도 남쪽 남중국 가까이에 실재 이어도로 명명된 지명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마도 섬이었다고 생각되는 물에 잠긴 얕은 빌레다. 그곳에 우리나라는 이어도라고 명명하여 기상 기지를 건설해 있다. 임춘배는 <이어도의 눈물>에서 현재의 민감한 분쟁 지역이 될 수 있는 공해상의 물에 잠긴 빌레를 제주인의 슬픈 눈으로 투사하여 해석한다. 분명 제주의 전설적 의미로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만, 사실은 가상의 지명일 뿐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이어도 기지는 마라도 남서쪽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어도라고 명명한 국가적 상징으로서의 지명으로써 제주의 민요에 등장하는 실재의 그 이어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의 신화가 돼 버린 이 이어도가 임춘배의 눈에는 제주인으로서 전설적으로 믿고 싶은 것이고, 그 이면에는 은근히 민족주의적 맨탈리티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일본, 한국은 오래 전부터 복잡 미묘한 이익과 감정적 관계들이 교차하는 국경을 바다에서 마주하고 있다. 강대국의 침략적 행위들은 약소국에 설움을 안겨주었고, 또 섬에사는 제주인의 설움을 대표적으로 담고 있는 상징적 담론이 바로 이어도라는 사실로 대입된 것이다. <이어도의 눈물>은 점점 주변 국가들과 분쟁지역으로 떠오르는 이어도를 제주인의 해양 타계관(海洋觀)에서 바라본 비극적 분노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날들. 사람이 나이를 먹다보면 숙연해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나이가 그만큼 사람의 자만심이나 거만함을 누르는가 보다. <아름다운 날들>은 말 그대로 젊은 날의 예찬,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연민의 미소라고 할 수 있다. 몽테뉴는 모든 인간의 아름다운 인간 행동은 30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말은 과거 시대 한 사람의 덕담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에게’ 아름다운 날들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들에게는 한번 쯤 되새겨 볼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를 아쉬워하는 이유 때문에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의 기억이 더 선명해진다고 하는 것인가.
임춘배는 <아름다운 날들>을 불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불이란 본성이 뜨겁기 때문에 정열을 상징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불의 반대편에 물이 있다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 농밀하기 때문에 습한 것이 되고 그것이 응축되면 물이 된다고 했다. 물이 생명의 기원이 되는 것은 고대인들마저 불에서 나온 물을 모든 생명의 창조적 변용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꽃(火焰)은 사람들을 흥분에 몰아넣는다. 그 만큼 형태가 비정형적이고 에너지의 양과 주변 조건에 따라 각양각색의 색깔과 모양을 보여준다. 어쩌면 청춘은 아름답다는 말이 이 불꽃의 속성이 그들 세대의 특성처럼 비춰진 것은 아닐까.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사물을 냉정히 볼 수 있다는 말이면서 경륜으로 인해 매우 신중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늘 불꽃을 키우고 있으며, 그것이 생의 에너지인 것만은 사실이다. 비상하는 것들은 날개가 있으며, 그 동력은 에너지일 것이다. 화려함도 에너지가 소진되면 그 너울거리는 격렬함도 잠잠해진다. 우리가 죽음을 조용한 상태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도 에너지 공급의 유무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날들>은 조각과 회화를 혼용한 작업이다. 질료가 주는 한계를 자신의 미학적 견해와 새롭게 결합시키기 위해 회화의 느낌을 사용했다. 이런 혼성적 작업들은 조각이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임춘배는 물리적 시간을 인식하며, 지나온 날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기억하는 것, 인간은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앞으로 갈 길을 가늠하고 있다.

맺는 말
임춘배의 금번 4월의 단상(斷想)은 일생동안 고민해온 실존의 문제들, 미학과 세계관의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전시에 다름이 아니다. 전통적인 조각의 방식을 유예하고 회화, 앗상블라주, 설치적 개념을 혼합한 것은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어떤 의미 표출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는 나름의 예술방법론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4·3 문제는 제주작가라면 모두가 관련자라는 의식이 있어 기회가 주어지면 작품을 해보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지금까지 마치 4·3을 특정 단체의 소유처럼 생각하여 역사적 주제를 장악하려는 헛된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에 발을 담글 자신만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4·3의 작품을 당당히 발표해야 한다. 편협한 이유들 때문에 표현의 전망들을 막을 수가 없듯 지금 세대는 물론 이후 후배 세대들 또한 앞선 선배 세대의 길을 딛고 나가야 한다. 비극적 역사를 사유(思惟)하고 풍요롭게 창작을 하는 것은 질투나 독점으로 되지 않는다. 절도를 지키고 한계를 견지하면서, 본성을 좇으면 된다. 많은 생명들은 죽음에서 출생한다는 말이 있듯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듯이 표현 속에 새로운 길이 있다. 임춘배가 보여준 혼성적 조각의 작업들은 이후 후배 세대의 전망을 위한 비판적 계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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