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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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주

작가 작품

Hand

대리석, 62×46×58, 2005

Hand

대리석, 62×46×71, 2005

Hand

대리석, 57×46×73, 2006

Hand

대리석, 72×45×60, 70×49×76, 2006

먹는 사람들

폴리에스터에 아크릴채색, 2014

웃는 사람들

폴리에스터에 아크릴채색, 2015

열린 손

1420×1050×420, 폴리에스터, 2017

열린 손

2200×1200×450, 폴리에스터, 2017

열린 손

1800×1900×1350, 폴리에스터, 2017

열린 손

1350×1250×500, 폴리에스터, 2017

작가 프로필

1966년 군산출생
홍익대학교 조소과 졸업
남서울대학교 대학원 유리조형과 졸업
1992년~1996년 이태리유학

개인전
1996년 Salata di Comunale(마싸 까라라, 이태리)
1996년 63갤러리(서울)
1997년 서신갤러리(전주)
2007년 인사아트쎈타(서울)
2015년 갤러리이즈(서울)
2016년 국제조각페스타 부스전(예술의 전당)
2017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서울)
2018년 사이아트갤러리(서울)

그룹전
2010년 경기도의 힘(경기도미술관)
송도조각페스티벌, 송도 커넬워크
2011년 돌이야기(아트스페이스H)
송도조각페스티벌(인천)
2013년 한탄강 현대 야외조각 흐름전, 연천군 선사유적지
혜윰, 리앤박갤러리
1014년 한.중 국제교류전, 파주 유비파크
2015년 고양조각가협회전(고양)
ART DNA(진화랑)
Stone Work-Today(김종영미술관)
2016 봄. 조각 향기 (정문규미술관)
Street Sculpture, 일산호수공원
서울 아리랑 페스티벌, 서울광장
구로구청 야외조각전, 구로구청 아트밸리
쌀 그리고 사람전, VM아트기술관

교육경력
선화예술고교(2000~2003)
홍익대학교(2000~2004)
성신여대(2003~2004))

작가 노트

								

평론


                    역동과 고요의 인간 이해

김준기(미술평론가)

차현주의 손 작업이 진화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결여가 있다. 그것은 손의 생동하는 표정들을 절제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어찌 보면 손은 정제미를 발견하는 관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역동하는 실체가 아니던가. 그는 손의 역동을 결여함으로써 보다 역설적이고 적극적으로 손에 관한 깊은 성찰을 끌어낸다. 그의 손 작업은 대리석의 재질감을 이용하여 손이라는 신체 부위의 가변성을 물질적 실체로 견고하게 구축해낸 결과물들이다. 그는 섬세한 대리석의 색감과 재질감을 십분 살리면서도 돌의 물성 자체에 기대지 않고 적극적으로 형상의 변주들을 이끌어낸다. 손 연작의 절정은 불꽃 담은 손이다. 앞서 말한 표현상의 양식화가 완숙의 단계에 접어들어 손바닥은 그것대로 손가락은 또 그 나름대로의 어법으로 손의 형상을 이루는 개체로 독립하되 하나의 통합체로 성립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차현주는 손가락의 형상에 불꽃의 형상을 더했다. 모든 손의 면을 둥근 원기둥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완연하게 꺾이는 면을 준 형상 하며 손가락 끝이 화려한 각선미를 자랑하며 곡선미를 드러내는 것이 심미적 이데아를 향한 차현주의 집요한 탐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날아갈 듯 치솟은 한옥지붕 처마의 끝선처럼, 부드럽게 이어진 버선코의 곡선처럼 차현주의 손가락 곡선은 일렁이는 불꽃이 되어 이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손 연작의 백미를 이룬다. ‘불꽃 같은 손’에 이르러 차현주의 손 연작은 마침내 역동과 고요를 한 몸에 담은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2007년 인사아트센타 개인전 서문 발췌)


인체 독법의 새 장[章]
― 차현주 근작 《열린 손》의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가 시사하는 것


김복영|미술평론가⋅철학박사⋅전 홍익대 교수
1
조각가 차현주의 근작 <열린 손>은 조각이란 삼차원 매스의 볼륨을 갖는 무겁고 닫혀진 예술이라는 통념을 일격에 분쇄한다. 무한정 열려있어 허허할 뿐 아니라 선례 없이 가볍고 간결하여 무언가를 진행하다 미완의 상태로 잠시 멈춘 형국이다. 이것 만으로도 근작들은 기존의 조각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제3지대를 겨냥한다.
이는 작가가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 야심찬 변혁을 기도하는 징후로 보아 충분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가 2015년에 가졌던 제5회전을 끝으로 불혹不惑의 시기를 마감하고 ‘인체’라는 이른 바 몸에 접근하는 새 장[章]을 시작하고 있어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여느 때와는 아주 다른 관심을 갖게 된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지난 날의 통념에서 이렇게 자유롭도록 부추겼는가! 작가는 5회전을 전후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건 아주 어렵지요. 그 동안 엄청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생각과 표현을 해놓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이젠 이 보다는 어떤 관심을 가질 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작업노트」 2015). 이 언급에서 작가가 말하는 ‘관심’이란 작품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나 표현의 또다른 면면이 아니라 인체를 해석하는 총체적인 접근 틀임에 틀림 없다.
작가는 자신의 ‘접근 틀’로서 근자에 다듬어온 유리기법의 하나인 ‘슬럼핑 테크닉’을 힘주어 말하고 있어 여기에 주목했으면 한다. 이 기법은 주형을 만들고 그 위에 유리판을 얹어 고열로 유리를 주형 안으로 내려앉히는 방법이다. 작가는 이 방법을 빌려 유리를 내려 앉힐 때, 지정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하회사람들>처럼, 우연의 가면을 쓴 것 같은 예기치 않은 이미지가 부상하는 데 주목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추가해서 말한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리의 성질 탓에 그 결과가 이 쪽에서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 쪽에서 보면 저렇게 보여요. 유리의 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환영을 일으켜요. 애초 나의 작업들은 손을 중심으로 하는 석조작업이었어요. 사람들은 저를 ‘손’ 작가라 할 정도였지요. 이 작품들은 컬러가 없고 하얀 색 만으로 성형해 일견 숭고한 무거움으로 다가와요. 이렇게 무겁고 닫힌 손 조각을 다루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뻣뻣한 서구의 조형을 반성없이 수용해서 그 옷을 입고 생활하며 이야기했어요. 유리로 하회탈을 제작하면서 특히 느낀 거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서구적인 것을 수용하는 방식으로는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의 모습은 불가능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는 우리 다운 표정을 담아낸다는 건 어렵다고 봐요.
가만히 우리의 옛 하회탈을 보세요. 알 수 없는 이면의 모습이 숨어있어요. 이 모습에 나의 감성을 결합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여기서 근자의 유리 하회탈을 만들게 되었어요(저널 <일러스트>와의 「인터뷰」 2015에서 번안).

차현주의 <열린 손>의 아이디어는 이에 의하면 지난 개인전(2015)의 <하회사람들>을 제작하면서 이루어졌다. 위의 언급으로 보아 그 스펙트럼이 복합적이다. 적어도 세 가지다. 첫째는 가변적 환영을 부각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며, 셋째는 현존 너머의 숨은 이미지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이를 간단히 이 글의 표제와 부제로 함축해 보았으면 한다.
필자가 이 글의 표제로 근작 <열린 손>을 가리켜 ‘인체 독법의 새 장[章]’이라 한 건 작가가 근자에 구사하는 유리의 ‘슬럼핑 기법’slumping technique(이하 ‘슬럼핑’)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슬럼핑이란 캐스팅⋅블로잉⋅래미네이팅⋅램프워킹 등 유리기법의 5가지 중의 하나다. 이 기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주형 위에 유리판을 얹어 기대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형태를 고열로 내려앉히는to be made slumped 데 있다. 이 때문에 슬럼핑은 원본의 외형을 주형 안으로 내려 원본의 상형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를 얻는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원본의 형태가 갖는 의의를 격하할 뿐 아니라 그 대신 그것의 환영으로서 모상模像, simulacre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원본조각’이라는 종래의 무겁고 닫혀진 조각의 방식에서 볼 때, 이른 바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인체조각은 인체라는 신체적 사물의 질량과 이를 담보하는 공간량을 스탠다드로 제작 해왔다. 그러나 유리로 제작한 <하회사람들>과 근자의 <열린 손>은 원본이 갖는 질량과 공간량을 격하하고 상당한 부분을 제거했다. 이는 비유컨대 생선의 원본인 뼈와 살을 제거해서 비늘이라는 ‘편린’片鱗, slice만으로 생선이라 하는 것에 비교된다. 이를 <열린 손>으로 되돌려 말하면, 손의 원본인 해부학적 근육과 살을 슬럼프해 그것의 편린인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minimal slice-mass를 손이라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과거의 조각 어법으로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설을 조각가 차현주는 <열린 손>의 실상으로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어 충격적이다.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손의 원본을 슬럼프해 그 자리에 손을 시사하는 최소한의 모상으로서 슬라이스 매스를 대치했다. 이 ‘방법’은 전근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인체조각사의 정통과 선례에서 떠날 뿐 아니라 위반한다. 이를 위반함으로써 작가는 인체 독법의 새 장의 시발점을 노크한다.
이를 두고 추상조각이니 비구상조각의 한 방법이 아니냐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열린 손>은 이러한 편의주의 어법으로는, 다시 말하지만 설명을 불허한다. 그가 내심에 두고 있는 앞서의 세 가지 언급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의하면 <열린 손>은 그 어디에도 신체의 일부 또는 전부를 추상화하거나 비구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이러한 오해는 전근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학습된 오해에서 연유한다. 이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필자는 이 글의 부제로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라는 용어를 추가해 두었다. 이 말은 물고기에 대한 비늘의 관계처럼, ‘손에 대한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의 모상 관계로 대치했음을 직설한다. 근작을 두고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라 한 건 손의 원본이 갖는 삼차원의 볼륨을 슬럼프하고 이를 다시 래미네이트함으로써to let be laminated 보기에도 심플한 이차원 매스로 전치했다는 걸 강조하려는 데 있다. 이를 두고 1970년대 뉴욕에서 발흥한 근대 후기 미니멀 스트럭처로 회귀한 게 아니냐 한다면 이는 또 하나의 오해라 할 것이다.

2
이 오해를 불식하려면 손의 원본을 이차원 슬라이스 매스로 격하해 손을 상기[想起]하는to reall 방법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차현주의 근작들의 진실이 이것이라면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가 시사하는 손의 이미지란 궁극적으로 무엇인 지를 말하는 거야 말로 이 글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를 말하려면, 필자에 관한 한, 부득 전 세기의 두 사람의 현자를 불러들여야 할 것 같다.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와 모리스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가 그들이다. 전자는 1920년대 후반 우리나라 철학자 박종홍에게 우리의 시원사상서인 「천부경」에 나오는 무의 뜻을 자문한 적이 있어 우리에겐 시사적인 인물이다. 그 후 그는 불후의 저서 『존재와 시간, 1927』에서 이 세계를 존재의 측면과 무의 측면으로 나누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물들은 존재하고 정작 무는 존재하지 않는가’를 묻고 이 세계를 사물(현존재)의 세계와 무의 모순대타적 관계로 해석할 것을 역설했다.
그의 이 역설은 차현주가 근자에 유리작업에 몰입하면서 “돌조각과는 다르게 순간적으로 일루젼을 야기하는 유리에 주목하고 이미지의 투명성과 불투명성transparency & opaqueness을 동시에 드러내려했던 것”과 하나의 짝패를 보여준다. 작가가 힘주어 말하는 ‘유리의 특성으로 이쪽에서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 쪽에서 보면 저렇게 보이는’ 존재의 불투명성을 하이데거는 그의 후기 주저에서 “존재는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 동시에 은폐한다”(Seminar in Zähringen 1973, 337쪽)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인은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신뢰해 사물에 수number를 투사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망각했다고 비판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가 아니라 예술로 돌아가 예술이 시사하는 존재의 각성으로 존재의 망각oblivion을 극복해야 한다’(『예술의 기원』 1935~6)고 주문했다.
이에 반해,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 1945』은 물론 『눈과 정신, 1960』을 통해 인간의 존재(주체)를 데카르트적 일원 이성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신체 주체’subjectivité du corps라는 우리의 몸과 사유의 중간지대를 설정하고 우리의 주체를 ‘신체주체’라는 보다 확실한 기초 위에 세울 걸 역설했다. 그는 이 주장을 가지고 세잔느 이후 서구 비구상미술의 정체성을 뒷받침하고 이 일환으로 일원적 사유 주체가 기반했던 표상의 원리를 격하하는 대신, 신체주체가 주도하는 ‘비표상의 원리’le principe de la nonrepresentation를 주창함으로써 재현미술의 종언을 예고했다.
이들 모두가 근대기에서 탈근대기에 이르는 와중에서 당시 서구 미술사조가 원본의 일원적 대상화에만 경도했던 한계를 비판하고 1960년대를 시작으로 발흥한 탈근대주의에 불을 지폈다. 이들이 제기한 핵심은 사물을 원본으로 삼아 본本을 뜨는 방식으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겪고 있는 현대의 세계관에는 맞지 않는다는 거다. 이를 차현주의 <열린 손>으로 되돌려 말하면, 서구 르네상스에서 보였던 일원적 재현의 발전사는 물론 근대기의 추상양식은 운명을 다했으며, 요컨대 원본주의와 추상주의의 인체조각은 낡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는 거다.
문제는 서구는 물론 지금까지 이와 동행했던 한국의 조각을 방법적으로 전회시킬 대안이다. 그게 무엇이든 해법으로서 올바른 접근 틀의 자질을 갖추려면 그 기초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건 사물(인체)을 원본으로 삼아 재현하는 근세이전과 그 이후 근대의 추상과 같은 일원적 방법으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확실히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는 진부한 반복, 아니면 추상이라는 허구로 전락시킬 뿐이라는 걸 말이다. 예컨대, 하나의 신체적 사물을 닫혀진 공간에 가두어 인체라는 원본을 이미지 아니면 추상과 일대일의 관계로 다루어 원본의 대상화에 집착하는 건 옛 파라시오스Parrhasios가 한 것 같은 ‘눈속임’trompe l´oeil 이거나, 근대 초의 부랑쿠지C. Brancusi나 가보N. Gabo에서와 같은 이미지의 단순화 아니면 개념적 허구로 전치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원본에 대한 지각 매스의 다원 정보의 조합에 의한 존재각성을 시도해야 한다. 이 과제는 인류의 역사가 아직 가보지 않은 전대미문의 낯선 세계임에 틀림없다. 앞서의 현자들이 주문하는 것도 이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신체주체(메를로-퐁티)가 가동할 수 있는 정보의 총화에 주목할 것과 이것들의 모순대타적 관계항들(하이데거)을 두루 고려할 것을 충고한다.
이들의 충고와 궤를 같이하는 당대의 양자과학자들, 심리학자들과 신경생리학자들은 바깥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세계는 물론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 뇌의 시각피질visual cortex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보의 바다가 산재해 있고 또 저장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그들은 이 세계를 일컬어 가상전위假想電位 virtual potential를 내재한 ‘홀로그램’hologra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한다(Karl H. Pribram, 1977). 그들은 사물들의 세계와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의 관계는 종래의 사유주체가 생각했던 일원주의적 사상寫像, to map from the unique original to the only represented by Cogito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기전과 대뇌에 국소화되어 있는 심층구조deep structure의 ‘기본 시[視]계획 시스템’the primary visual projection system이 관장하는 홀로그라피 뱅크holographic-like bank가 홀로그램을 여하히 적출하느냐에 좌우된다는 걸 발견했다. 이 뱅크를 상징하는 게 이 글의 부제로 붙인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의 참 뜻이다.
요컨대 사물의 세계란 사유주체가 주도하는 일원적 표상의 세계가 아니라 홀로그라피 뱅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과 마이크로 이미지들이 융합해서 만들어 내는 선형과 비선형의 모듈 여하가 규정한다고 그들은 확신했다. 이 확신이 21세기의 오늘의 가상현실을 주도하는 과학의 기반이 되고 있음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오늘의 과학이 말하는 가상현실이란 우리 뇌에 배분되어 있는 메모리 뱅크가 홀로그라피 패턴과 유사하게 항시적이 아닌, 그래서 이렇게 인출될 수 있고 저렇게 인출될 수도 있는 유동적 가변상태의 확률로 이루어지는 ‘자유도’degrees of freedom를 허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에 서 볼 때 현실이란 일원적인 게 아니라 다원적⋅선택적 사상寫像의 결과라는 게 오늘의 과학적 진실이다.

3
마지막으로, 작가 차현주가 <열린 손>을 전시공간에서 연출하는 면면들을 언급한다. 이 또한 작품과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중요 품목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서 손은 이미 1990년대 초중반 이래 끊임 없이 다루어온 주제였다. 이는 유학시절 학습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조각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무렵 제작한 <피에타>, <어머니>, <가족여행>에서의 손은 유학을 마치면서 귀국한 궁핍했던 시절 그 자신의 실존과 함께한 동반자로서의 손이었다. 2003년 개인전에서 손이 독자적 주제로 등장한 것도 이 연장선에서였다. 대리석과 테라코타에 의한 리얼리즘의 손은 크고 정교했다. 손의 숭고와 주술성을 강조한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았다. 손은 여전히 인체의 일부요 신체의 원본으로서 존중되고 있었다. 요컨대 손은 아직 원본과 표상의 이항관계 아래 고정되고 또 닫혀 있었다. 그것들은 손⋅발⋅얼굴이라는 신체의 표상적 일부로서만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랬던 작가가 <열린 손>에 이르러 이러한 원본으로서의 손과 작별을 고하고 있다. 신체적 사물로서 표상의 손이 아니라, 하이데거적 존재함의와 메를로-퐁티 이후 홀로그램으로서의 사물과 신체를 새롭게 각성하는 손으로 급변했다. 매스의 내부와 외부라는 고정적인 경계를 넘어 은폐되고 있던 손의 이면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근자의 손은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부동한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원본과 표상의 2항 관계로 머물렀던 손이 아니라 자유로운 손이 그것들의 내외부의 반전을 통해 하나의 가상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의 이모저모를 동시화하고 총체화한다. 가히 슈레딩거의 ‘고양이의 역설’Cat’s Paradox of Schrödinger을 가시화하는 것에 비교된다.
이를 연출하기 위해, 작가는 두께가 5㎜되는 폴리에스터 수지로 래미네이트한 얇은 곡면 매스의 표면에 다양한 컬러의 안료를 설채해 주목성을 강화시켰다. 기법적으로는 종래에 다루었던 초대형 손 주제의 작품에서 부위 별 특정 매스들을 목적에 따라 케스팅해 표면은 매끄럽고 뒷면은 자연스런 마티에르를 허용해 안과 밖을 알 수 있게 하고 손의 안과 밖의 총체적 이미지를 열어놓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여기에다 래미네이션ramination의 정도를 달리해 손의 부위 별 매스를 달리한 것도 눈에 띈다. 손가락⋅손등⋅손바닥의 각 부위의 곡면 매스처리가 다양한 건 이 때문이다. 그 어느 경우든 일원적 표상을 격하하는 대신 손의 부위 별 정보 규모를 달리해 홀로그램을 배당하는 방법을 부각시켰다.
이렇게 해서 제작한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들은 싱글 아니면 세트로 배열해 바닥에 뉘이거나, 와이어로 매달아 공중에 띄우거나, 벽에 부착해 손의 존재 양태를 총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DP방식은 완결된 손의 자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데 있다. 그 대신 보는 사람이 이를 자신의 뇌에 존재하는 가상의 홀로그램을 인출함으로써 <열린 손>을 감지케 하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아니 원본인 손을 복제하거나 추상화하지 않았음에도, 미니멀 슬라이스 매스 만으로도 충분히 손이라는 걸 환기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손의 ‘존재 각성’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고 시연되었다. 여기서 아는 건 손이지만 ‘이것이 손이다’가 아니라, 보는 이가 자신의 시각기전의 홀로그램을 슬라이스 매스에 투사하고 대뇌가 여기에 프로그램을 적출摘出하자마자 손이라고 알게 되는 손이다.
이 경우, 가상의 홀로그램으로 감지되고 대뇌의 홀로그라피가 프로그램을 적출해 아는 손은 아직 전체와 부분이 따로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봐서는 손이지만 부분적으로 보아서는 손이 아닐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종래에 학습한 일원적 표상으로서 손이 계속해서 준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보여주는 전모는 근자에 회자되고 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아나로그 버젼analogue version을 보여준다는 거다. 디지털 버전이 아니라 아나로그형型, type으로 제작했기에 근작들은 슬라이스 하나 하나를 앞서와 같이 연속해서 변화하는 데이터 방식으로 DP함으로써 가시화를 용이하게 한다. 이를 두고 1970년대 뉴욕 경향의 ‘특수 오브제’object specific가 강조하는 미니멀리즘으로 오인해선 안 된다. <열린 손>에서는 전체와 부분이 별개로 있지 않다. 이는 슬라이스 매스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데이터로 다룸으로써 전체와 부분이 서로 공속共屬관계identical belonging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체인 즉 부분이요 부분인 즉 전체全卽一而一卽全’라는 말이다. 우리의 시원사상, 나아가서는 하이데거가 설파했던 진정한 존재의 각성이 이렇게 해서 차현주에게서 등장했고 또 가능했다.
차현주의 <열린 손>에 즈음해 이를 강조하는 건 근작들이 손이라는 신체의 일부를 원본으로 떠내는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아주 근소한 압축 매스를 빌려 전대미문의 존재양태存在樣態, phase of being를 강화하는 ‘인체 독법’la lecture corporelle을 새로 제기했다는 데서다. 작가는 이를 시작으로 자신을 스스로 역사의 시발점에 세운다. 그건 다시 말하거니와, 인체 독법의 새 장으로서 홀로그램에 의한 새로운 방식의 프로그램 매스를 가상현실의 매체로 삼아 존재각성存在覺醒, being awakening을 시연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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