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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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만

작가 작품

사유공간

이태리 대리석, 2005

발아하는 공간

보령오석, 2006

발아

자연석, 2019

발아하는 공간

보령오석, 스테인리스 스틸, 2006

발아

보령오석, 2012

발아

보령오석, 2012

발아

보령오석, 2013

Bubbling-process 1

보령오석, 2018

Bubbling-process 3

스테인리스 스틸, 2019

Bubbling-process 4

브라질 화강석(블루), 2019

작가 프로필

개인전
2019.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서울
2013. 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2008. 인사아트센터, 서울
2007. 인사아트센터, 서울
2006. 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파주
2001. 일산호수공원 세계관 전시실, 고양
1998. 서신갤러리, 전북예술회관, 전주
1996. 박여숙화랑, 서울
1995. Terminale BM, 이탈리아
그룹전
“모서리의 안쪽”전(아트스페이스 애니꼴)/“Cuore dello Scultore”전(안젤리 미술관)
“한국 현대조각의 단면”전(서소문역사박물관)/“경계, 넘어” 전(갤러리토마)
“양주덕계공원 야외조각전”(양주덕계공원)/“고양조각가협회전2018”고양
“현대공간50주년전”(파주출판문화센터)/“고양조각가협회전2017”고양
“현대공간회 창립50주년기념전”(김종영미술관)/“Steet Sculpture”전(일산호수공원)
“현대공간회전”(스페이스H)/“봄,조각향기”전(정문규미술관)
“Stone Work-Today”(김종영미술관)
“Arirang Award-International Sculpture Symposium”(양주아트밸리)
“Street Furniture”(일산호수공원)/현대공간회전“사이-공간”전(스페이스BM)
“ART DNA”전(진화랑)

작가 노트

								

평론


                    모든 장소들의 장소, 모든 존재들의 존재 
- 2019 권석만 展 -
2019. 08.21 – 08.26,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이 재 걸 | 미술비평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그리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하여,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無限)을 쥐고
한 순간에 영원을 담으라.”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中


진정한 예술 작품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의심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보는 이의 품위를 위해 하거나 자연을 타락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 즐거움은 보잘것없이 작은 재주에 스스로 감탄하는 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눈의 말초적 즐거움에 정신을 내어 준 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도 아니다.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으뜸이 될 만한 것은 깨달음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며, 세계가 지닌 무한(無限)의 풍부함을, 나아가 세계와 ‘나’의 거리를 사유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참된 예술은 세계의 부분이나 부차적 지향을 제재(題材)로 삼을지언정 세계의 전체와 근원적 지향을 목표로 삼는다. ‘무한’이라는 우주적 폭력을 견디는 존재의 각성도 예술 작품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안에 고스란히 담길 수 있다.

자연에서 화강암을 빌려와 <발아(發芽), <공(空)>, <울림> 연작을 선보여 온 권석만의 예술도 이러한 철학적 각성 안에서 아름다움의 조건을 기초한다. 오랜 시간 동안 작가에게 세계는 가시적인 현상에 있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일어나는 곳,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래서 작가는 돌을 ‘이용’하여 과시적인 어떤 형상을 만드는 대신 돌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다. 육중한 바윗덩어리 껍질을 꾸준히 연마하여 속살을 드러낸다던가 아니면 그 속살을 온전히 게워냄으로써 바위 표면에 멈춰진 우리의 시선을 자연에 담긴 깊고 넓은 인식의 장으로 안내하는 권석만의 돌 조각은 돌의 죽음이 아닌 돌의 생명을, 돌의 외양이 아닌 돌의 본 모습을 일궈낸다.
석조 노동의 반복,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석에 손을 많이 댄’ 작가의 작품에서 인위성이나 작위성이 전혀 관찰되지 않다는 건 그의 조각이 돌이라는 자연과 자연스럽게 내통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돌들이 그 나름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라는 최종태 선생의 평은 자연에의 순응, 자연과의 몰아적 조응에서 유래한 권석만 조각의 ‘범자연주의’를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그의 조각이 아름다운 건 이렇듯 ‘자연의 자연다움’과 ‘사물의 사물다움’이라는 지극히 순수한 철학적 발상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권석만의 신작 展 이 반가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에 작가가 선보이는 거품(Bubble)의 형상물은 그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구체적인 형상’으로서의 조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구체적인 형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하였는가이다.

“나는 계곡의 물과 돌을 본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나 나는 물과 돌이 좋다.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이 좋고, 수천 년의 장구한 비밀을 간직하고도 무심하게 있는 모습이 좋다.
빠른 물과 느린 돌은 단짝이다. 이들은 거품을 만들고, 거품은 이들을 만든다.
‘순간의 과정’을 사는 모든 것들에 새겨진 영원의 약속을 서로에게 새긴 채 말이다.”
(권석만, 2019 작업 노트 中)

작가에게 거품은 특정한 형태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이면서 무(無)이고, 존재의 의의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무(無)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작업실 옆을 흐르는 개울가의 거품이면서 포도송이의 알알이기도 하며, 뭉게구름의 잡히지 않는 양감이면서 계곡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자연석들의 단단한 질감이기도 하다. 거품은 또한 반사하면서 투과하기도 하며, 표면이면서 내면이기도 하고, 먼 곳에서 바라본 개별의 외양이면서 개별 내부 가장 작은 곳의 모양새이기도 하다. 망원경으로 본 우주의 모습과 현미경으로 본 세포의 양자(Quantum)적 형태를 두루 포섭하는 권석만의 거품의 이미지는 ‘모든 곳’과 ‘모든 것’의 메타포(Metaphor)로서 손색이 없다.
이번 전시에서 권석만이 새롭게 시도한 것은 거품이라는 형상성만은 아니다. 조각에 쓰인 재료들도 그러한데, 작가는 형형색색의 수석(水石), 신비한 속살을 품은 오석(烏石), 자연의 푸름을 찾다가 발견한 ‘브라질 블루석(Macaubas Blue stone)’, 그리고 스테인리스(stainless) 선 등을 각각의 질료적 특성에 맞게 재단, 연마, 용접, 배치하고 있다. 특히 스테인리스 선으로 된 링을 무수히 만들어 각각을 연결한 작품은 작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한 땀 한 땀 용접한 것으로서, 금속의 냉랭한 성질을 이겨내고 가시덤불이나 구름 같은 따뜻한 정서의 자연물을 떠올리게 한다. 브라질 블루석을 거품의 형태로 깎고 표면을 거울처럼 연마한 도 마찬가지이다. 이 다발성(多發性) 형태의 작품은 ‘돌의 무늬’가 아닌 ‘돌의 정맥’을 드러내면서 자연의 생명성과 더욱 친밀하게 공모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때로는 벽에 걸리거나 허공에 띄워지고 때로는 바닥에 놓이면서 전시 주제의 깊이와 감상의 즐거움을 더한다.

일찍이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그의 저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1964)』에서 “존재의 의의와 무의 비의미(non-sens)에서 출발하여 사유가 진행되는 한, 탐구는 존재와 무의 관념에 내포된 미처 보지 못한 점들을 떠오르게 할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퐁티는 존재와 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최초의 대립은 여전히 엄격하게 남아있으며, 이 두 개념의 역전을 정당화하더라도 이러한 패배 속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바로 이 ‘대립’ 자체라고 말한다. 이러한 철학적 반성은 예술가에게 특히 한국의 예술가에게 무척 중요하다. 김복영 선생이 늘 강조했듯이 한국 고유의 사유체계 안에서 ‘세계는 대립의 결과 아니라 상보(相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고유섭 선생이 말했던 한국 미술의 ‘구수한 큰 맛’도 바로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주장하는 듯 감추려 하며, 정확하게 하려는 듯 오차를 허용하며 상보하는 한국 고유의 ‘큰 정신’을 말한 것일 테다.
권석만의 展은 거품 하나하나가 만들어 내는 유려한 곡선과 끝없이 펼쳐진 변곡(變曲)의 주름들을 보여주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큰 정신, 큰 맛’을 보여준다. 증식하면서 소멸하고, 형태를 갖추면서 스스로 형태를 지우는 그의 조각에서 생명의 시작과 끝은 서로 극단에 서지 않고 서로를 긍정하며 흥미롭게 교류한다. 여전히 ‘무엇을 고정하려는 의도’를 버리고 ‘과정(process)’의 아름다움을 캐가는 방식으로 ‘자연의 자연다움’과 ‘사물의 사물다움’이라는 지극히 순수한 철학적·한국적 발상을 미학화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정한 예술가에게 ‘물질이 정신과 연결되어야 함’은 정언적(定言的)인 것이다. 물질 현상의 단면만으로 정신을 위축한다든지, 정신의 궁색함으로 물질세계를 오역해서는 좋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예술가는 많으나 ‘좋은 예술’을 만나기는 더욱 힘들어진 오늘날, 숨 막히는 8월의 더위를 견디며 러닝셔츠 한 장 달랑 걸치고 작품들 앞을 서성이던 작가의 소탈한 모습에서 자연과 예술은 그 어떤 부닥침도 없었다.
이 평온한 화해의 기류 안에서, 이 처연하고 의연한 예술가의 정성(精誠) 안에서, 한 알의 모래로 세계를 감지하고 찰나(刹那)의 덧없음으로 영원의 기억을 떠올리는 권석만의 조각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오묘한 만족감을 따라 오늘도 한 걸음 더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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