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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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영

작가 작품

affection

30x13x39cm marble

family

74x42x56cm marble

first love

35x17x37cm marble

harmony

42x14x37cm marble

love

26x13x48cm marble

meet again

41cmx20cmx53cm marble

proposal

47cmx15cmx54cm유리

render-p-color

sweety

41cmx20cmx53cm marble

Wedding ceremony

43x13x56cm ,marble

담소

45cmx16cmx51cm 유리

마포 꿈에 그린아파트 중앙광장

작가 프로필

1982 숙명 여자대학교 미술대학공예과 졸업

개인전 8회
2018 Artrooms Fair Seoul Selected Artist,Riviera Hotel
2016 앰배서더 호텔 갤러리, 서울
2015 아산병원 갤러리초대전, 서울
2013 세종호텔 세종갤러리초대전, 서울
2010 "한국미술, 그힘과 아름다움" 아카갤러리초대전, 코엑스, 서울
2009 하나아트갤러리초대전, 서울
2007 박영덕 화랑초대전, 서울
1999 강릉문예회관, 강릉

단체전, 수상 및 아트페어 70회
2017 Metamoia Gallery, 프랑스, 파리
2016 이태리 Premio Arte Laguna 15, 16 공모전에서 유리 작품 레지던스상을 수상, 이태리 베니스
2013 Urban Art Retreat Center, 시카코, 미국
2012 소망의 무게, Pink gallerly, 서울
KOREA ARTWORK II ICONOCLASTES GALLERIE, 파리, 프랑스
KIAF/12(한국국제아트페어),조선화랑,서울,코엑스
홍콩아트페어, 아카갤러리, 퐁콩, 파크레인
2018.2013~2007 한국조각가협회전, 서울시립미술관, 세종문화회관
2011 대구아트페어 현대조각특별전, 대구컨벤션 센타
2013~2011 서래풀조각회, 서울갤러리K
2012~2010 서초미술협회전, 서울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2010 ShContemporary 10, 두인갤러리, 중국 상하이
2008 봉산미술제, 동원화랑, 대구
베이징올림픽환경조각 세계대회 우수상수상
2008~2005 베이징올림픽 환경조각순회전
베이징, 텐진, 심천, 광주, 마카오, 홍콩, 런던, 서울, 로스앤젤스, 로마, 로잔 ,기즈번, 오클랜드, 웰링톤, 새크라멘토, 바로셀로나, 시카고, 워싱턴, 아틀란타 등 16개국 35개도시 38번 순회전시
2005 한국국제아트페어, 코엑스, 서울
상하이국제아트페어, 상하이 무역회관, 중국
2003 화랑미술제 ,예술의전당, 서울
2002 한국국제아트페어, 벡스코, 부산
프랑스한국미술초대전, 파리, 프랑스
터어키앙카라현대미술초대전, 터어키한국문화원, 터어키
2001~96 대한민국산업미술가협회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0~93 한국미협전, 예술의전당, 서울
1997 한국현대미술특별전, 문화일보갤러리, 서울
1996~3 동아공예대전수상, 일민미술관, 서울
1994 대한민국공예대전수상,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현재
한국조각가협회 회원
서울미술협회 회원
한국미협 회원
서초미술협회 회원

작품소장
중국베이징 진타이박물관
중국베이징 올림픽 그린
서울 도화동, 꿈에 그린 아파트 중앙광장
숙명여자대학교 VIP룸
호서대학교 총장실
서울 무학여고 중앙홀
서울명동 세종호텔 로비
이태리 베니스 Berengo Studio

작가 노트

								

평론


                    한나영, 만남의 상승작용
한나영의 작품을 보면서 필자는 '진정한 만남'을 생각했다. 사람 사이의 접촉이 부족한 세상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 만남의 속성이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만남이 아니라친밀하고 진솔하다는 데에 있다.
한나영의 작품은 정(情)과 애(愛)를 읊조리는 조형시를 방불케 한다. 그의 작품이 보면 볼수록 따스하고 정겨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오가는 사랑, 연인의 관계, 친구끼리의 우정, 부부의 도타운 사랑이 투영되어 있는 것같다. 사랑의 테마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자 그칠 줄 모르는 예술의 레퍼토리나 다름없다. 그런 테마 자체가 작품의 비옥한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다.
그의 대리석 작품에는 대체로 두 매스가 좌우편을 차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매스는 다시 하단과 상단으로 이등분되어 있다. 손바닥위에 둥그런 달덩이를 얹혀놓은것같기도 하고 꽃받침위에 꽃이 활짝 핀 것같은 모양을 하기도 한다. 몇 개의 시적어휘가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와 번져나가듯이 간결한 조형어휘가 풍부한 상상을 유발시킨다.
그의 작품은 단일한 구조물이 따로 등장하는 법이 없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구조물이 잘 짜여진 피륙처럼 얽혀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좌우편의 매스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띠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매스는 상대 쪽에 고개를 기울인 포즈를 취하는데 마치 다정한 연인의 관계 같기도 하고 상대 품에 안긴 움직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합'과 '호응'이 그의 작품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결합이 서로의 약함을 보완해주고 서로를 끌어주고 당겨준다. 입을 맞추고 품어주고 껴안고 기대는 등 둘의 관계는 사뭇 따듯하고 훈훈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이 둘은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단단히 결속되어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악기의 줄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멋진 화음을 내듯이 두 매스는 서로를 품으며 사랑을 연주한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형태를 선호한다. 각진 형태를 피하고 대체로 부드러운 곡선과 구체, 볼륨을 중시한다. 특히 자연을 닮은 미려한 선이 감상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 선이 딱히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돌면서 한층 여유롭고 평화롭게 만든다.
구성에 있어서도 좌우의 비대칭이 더없이 자연스럽다. 보다시피 좌우의 구조물은 높이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닮은 부분보다는 다른 부분이 더 많다. 상호의존적인 패턴을 곁들이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머쓱하게 보였을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것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감으로써 이 구조물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상이한 것끼리의 만남이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상승작용을 하여 <연(緣)>과 <정>을 낳고 <노래>를 탄생시키며 <꿈>을 꾸게 만드는 창조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미 국제무대에서도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2400점이나 응모한 북경올림픽 개최기념 환경조각 구제대회에서 최종적으로 290점의수상작중에서 당당히 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아직도 이런 수상의 주인공이 된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지구촌의 내노라할만한 조각가들이 경연을 벌여 최종 엔트리에 오른 것도 큰 영광이지만 그가 평소 존경하는 키네틱 조각가 알폰소(Alfonso)와 함께 역대올림픽 개최도시인 16개국의 35개 도시를 순회하며 작품전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미학자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세계는 잘 단합되어 있어 아름답고 조화롭게 상응하는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다우나 전체, 즉 우주의 일부로서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거짓의 미 혹은 국한된 미이지만 사물들의 전체와의 관계에서 아름다운 것은 넓게 확장된 탁월성, 즉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과의 관계, 사물들과의 관계, 전체와의 관계속에서 태어난다. 그가 아름다움의 기준을 이처럼 '관계'로 파악한 것이 흥미롭다. 관계의 탁월성이 그의 미학에선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의 저술에선 자아를 얼마나 돋보이게 하는가(being beautiful)가 관건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마음을 내어주는가(bestowing beauty)가 관건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향해 다가갈까. 말은 풍성하지만 정작 우리 주변에는 공허한 잡담과 속이 빈 대화, 따분한 비밀 이야기 투성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가물이나 부속물로서 사랑하지만 안타깝게도 관계의 전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예술은 우리 삶의 결여된 부분을 환기시키고 보충해준다. 만일 그의 작품을 보면서 마음의 경계를 풀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랑과 친밀함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존재끼리의 사랑은 탈취나 종속이 아니라 자유로운 행동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된다. 정원사가 자상한 손길로 꽃을 자라게 돕는 것처럼 따듯한 온기로 상대의 몸을 덮어주는 온전한 자기표현을 가능케 한다. 예술의 '열린' 자아와 접목될 때 더 큰 메아이로 다가온다는 것을 한나영의 작품에서 발견하게 된다.

서성록(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자연미를 기반으로 하는 간소한 조형미
신항섭(미술평론가)

미술가의 상상은 시공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형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미술가라고 할지라도 결코 자연을 초월할 수는 없다. 미술가가 상상력을 동원해 창작한 그 어떤 형상이든 그 원형은 자연에 있는 까닭이다.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란 직간접적인 경험의 세계인 것이며, 그 중심에 자연이 존재한다. 자연이란 인간을 포함하여 인위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한나영의 조각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좀 더 솔직히 자연을 배우고자 하며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들인다. 그가 응시하고 관찰하는 자연이란 그 자체로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실현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가적인 감수성으로 자연을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미에 대한 전적인 동조야말로 그 자신의 조형적인 형식미의 출발점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는 존재물뿐만 아니라, 무지개와 같은 자연현상에도 무심하지 않다. 피상적이 아니라, 자연에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담소', '둥지', '여심,', '대화', '동심', '愛', '이 글', '向', '生' 따위의 작품 명제가 말하듯이 자연과 인간 삶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자연미와 더불어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과 연결된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내적인 감정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내적인 감정의 세계이면서도 자연미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가 조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연이란 인간 형상을 포함하여 새 따위의 동적인 존재들이다. 특히 인간에 대한 관심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형상 그 자체에 대한 표명이자 삶의 정서에 대한 숙고이다. 인간의 형상에 대한 관심은 조형적인 주제를 제공하는 원인자로서의 형태미에 대한 접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형적인 주제란 인간형상과 더불어 삶의 정서와 관련된 내용을 뜻한다. 사고하며 감정을 조율하는 존재로서의 인간형상은 조형세계에서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 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인간형상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는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 그 단편을 제재로 하는 그의 작업은 단순히 외적인 형태미만을 부각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정서까지를 아우르고자 한다. 인격과 감정이 개재되는 지점에다 인간의 형상을 놓으려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추구하는 인간형상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강조되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형태미는 이성적인 차가움 대신에 정감어린 시선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인물형상은 부드럽고 따스한 정서를 제공한다. 시각적인 아름다움 속에 거친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따스함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래적인 형태는 해체 및 재해석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적인 상과는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바뀐다.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비구상적인 언어로 재해석 되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사실적인 형상을 복원하기 힘들 만큼 생락적이고 함축적으로 은유되거나 암시될 따름이다. 눈 코 입은 물론이려니와 팔다리조차 배려하지 않은 지극히 간략한 형태만이 제시되고 있다. 간신히 인간의 형태를 지지하는 간략한 선과 단조로운 볼륨이 전부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형상을 유추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형상이 역력하다. 한 개 또는 두서너 개의 단괴로 구성되는 작품에서도 인간의 형상이 읽혀지는 것이다. 물론 그 형태가 구체적인 경우도 없지 않다. 새나 닭 따위의 동물의 형상을 제재로 하는 작품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식의 형태해석은 실상을 단순화하고 생략하는 수법에 의해 가능하다. 반면에 구체성을 상실한 작품에서는 형태가 완전히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일련의 조형과정을 거치면서 최소한의 이미지, 즉 응축되고 함축된 아름다움을 보자는 의도를 내포한다.
그의 조각은 이렇듯이 단순하고 단조로운 대신에 명쾌한 형태를 지닌다. 최소한의 선과 볼륨만으로 인간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의 조각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비밀은 여기에 있다. 볼륨의 형태에 따라 형성되는 선과 곡면은 유려한 곡선을 발생시키면서 최종적으로는 인간 형상에 도달한다. 그의 조형감각이 만들어내는 형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언제나 비대칭을 지향한다. 비대칭의 형상이면서도 교묘한 균제감각을 통해 시각적인 안정감을 확보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앞뒤의 형태가 다르다. 인물상이면서도 서로 다른 두 개의 형태를 가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의미의 환조가 가질 수 있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인물조각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는 것으로 조형적인 기교인 셈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두 개의 형상을 본다는 것은 신선한 즐거움이다. 더구나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이라기보다는 씨앗이나 곤충류 따위를 연상시키는 형태에 가깝다는 점에서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 자신의 조형감각에 의해 비구상적으로 해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위성을 감지할 수 없다. 그의 조각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이처럼 자연미를 왜곡하지 않는 순수성으로 환원하는데 있다. 인위적이면서도 결코 인위성을 드러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조형미로 귀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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