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 HOME
  • 조각가 인명사전

이혜선

작가 작품

이혜선, (앞)P1, 170x250x70cm, EPS, 2019 (뒤)P2, 240x250x70cm, EPS, 2019

이혜선, (좌) P2_s, 39x33x10cm(우) P1_s 40x20x50cm EPS,흑연 , 2019

이혜선, Extra structure _1, 81x62x25cm, EPS, 2018

이혜선, Extra structure _2, 53x43x36cm, EPS, 2018

이혜선, Extra structure _3, 130x100x60cm, EPS, 2018

이혜선, P1(s), 30x20x20cm, marble, 2019

이혜선, Pose, 260x170x130cm, EPS, 2019

이혜선, T_1, 11.5x15x11.5cm, 가변설치, oil on concrerte, 2019

이혜선, T_2, variable installation, acrylic paint on concrete, 2019

이혜선, TT, 30x30x20cm, car paint on resin, 2019

작가 프로필

CV

학력

2008 성신여자대학교 조소과
2012 성신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소과

개인전

2020 테라스 아티스트랩 ‘티티 TT’ (무신사 테라스) 서울, 한국
2019 티티 TT (영은미술관) 경기광주, 한국
2019 P1-P2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한국
2018 Extra City 현대의 우아함 (Kosa Gallery) 서울, 한국
2018 SHOT (예술공간 서:로) 서울, 한국
2016 Image Hunter (아트스페이스 수다방) 서울, 한국
2014 미니뷰 (성북예술창작센터) 서울, 한국
2013 풍경□ 성신조각회 지원 (57th gallery) 서울, 한국
2011 모던피플 (가나아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그룹전

2020 제10회 소사벌 야외조각전 (평택호 예술관) ,경기, 한국
2019 청주 공예비엔날레 기획특별전 ‘바람과 흔적’ 플래그 아트 (정북동 토성) ,청주, 한국
2019 오픈스페이스 배 이전 개관전 (오픈스페이스 배), 부산, 한국
2019 13기 입주작가 프리뷰전 「오픈코드 OPEN CODE」(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한국
2018 몽상가들의 희망 (성남아트센터) 경기, 한국
2017 청계천 류 페스티벌 (청계천 광통교) 서울, 한국
서울미술관 2017 상반기 기획전《카페소사이어티》 (서울미술관) 서울, 한국
2016 광화문 국제아트페스티벌 ART&PLAY (광화문광장) 서울, 한국
2015 개인의 취향 (서울예술재단) 서울, 한국
The1st 포트폴리오 박람회 선정작가展 (서울예술재단) 서울, 한국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 (세종문화회관) 서울, 한국
이종교배 -부산소속 (아트포럼리) 부천
2014 On going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오픈스페이스 배) 부산, 한국
영앤영 아티스트 프로젝트 (영은미술관) 경기 광주, 한국
2013 ARTMONACO 2013 (Grimaldi forum) 라르보토, 모나코

수상 / 레지던시

2019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13기 입주작가 선정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19-2020 영은미술창작스튜디오 11기 입주작가 선정 (영은미술관)
2015 제3회 창조디자인어워드 전시대상자 선정 (미래창조과학부)
2015 The1st 포트폴리오 박람회 우수선정작가 (서울예술재단)
2014 영앤영아티스트 프로젝트 선정작가 (영은미술관)


교육
2019-현재 성신여자대학교 강사

작가 노트

								

평론


                    한국적 도시미학의 어떤 진실 - 이혜선의 절편풍경(切片風景)


글, 최범_미술평론



교각 위와 아래

삼일빌딩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옆으로 난 고가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씽씽 달린다. 1970년대 교과서 표지에 실린 사진은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이미지였다. 조각가 이혜선은 고가도로 위가 아니라 그 아래인 교각에 시선을 던진다. 그는 왜 고가도로 위가 아닌 아랫부분에 관심을 가지는가. 도시의 밝은 면이 아니라 어두운 면, 사물의 드러난 부분보다 감춰진 대상에 눈길을 던지는 것은 예술가 특유의 삐딱한(?) 태도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혜선의 작업에는 그다지 비판적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고가도로의 교각 구조는 특정한 시각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순수한 형식미의 대상인 것인가. 그 자신은 그렇다고 말한다.

현대 도시의 구조물들이 고유의 조형적 특성을 가지며 그 자체로 미학적, 예술적 관조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것들은 충분히 미학적이고 예술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각가 이혜선이 그러한 대상에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새삼스런 설명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 대해 뭔가 이야기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도시미학과 모더니즘

이혜선의 도시 구조물에 대한 작업을 일단 도시미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도시미학은 미술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 특유의 것이다. 모더니즘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상 새로운 것, 현대적인 것, 도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전통미술이 자연을 배경으로 한다면 현대미술은 도시를 근거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은 기본적으로 도시적인 미술이다. 따라서 이혜선의 작업은 일단 서구 모더니즘 미술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계열에 속한다. 특히 로드첸코나 모홀리 나기의 사진은 아예 이혜선 작업의 원전(原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이들의 작업은 모두 현대의 도시 구조물이 보여주는 독특한 조형성을 새로운 시각과 기법으로 포착해낸 것들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업은 새롭고, 현대적이며, 도시적이다. 이 지점에서 도시미학과 모더니즘은 하나가 된다. 이혜선의 작업 역시 이러한 미술사적 맥락 내에 놓인다. 하지만, 크게 보면 그럴지라도,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혜선을, 20세기 초 유럽의 모더니스트와 완전히 동격으로 놓을 수는 없다. 만약 21세기 한국의 이혜선이 20세기 유럽의 로드첸코나 모홀리 나기와 다를 바가 없다면, 이혜선은 그들의 완전한 아류로서 논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들과 이혜선의 동일성/유사성 못지않게 차이가 중요하다. 동일성 내에서의 차이,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면 적어도 내게 이혜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혁명적 모더니즘’과 ‘한국적 모더니즘’ 사이

내가 보기에 이혜선의 작업은, 역시 미술사적으로 말하면 ‘혁명적 모더니즘’과 ‘한국적 모더니즘’ 사이에 위치하는 것 같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의 작업은 일단 형식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에 속하지만, 그 안에서도 약간 독특한 위상적 가치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혜선의 작업이 모더니즘에 속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형식적 판단이다. 그의 교각을 주제로 한 드로잉이나 입체 작업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이며,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적이다. 물론 모더니즘의 추상은 외부 세계의 재현을 하지 않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그의 작업은 교각이라는 외부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다만 그가 재현하고 있는 외부 세계의 대상 자체가 추상적인 사물이라는 점에서 전통미술의 그것과는 다르다. 기하학적 추상물의 재현은 전통미술에서의 자연물의 재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비재현적인 사물의 재현으로서 조형적으로는 결국 비재현적인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혜선의 작업은 도시 구조물의 일부를 잘라낸 것이라는 점에서 ‘절편풍경(切片風景)’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역시 도시 풍경화에 속함은 물론이거니와 도시 풍경화는 원래 모더니즘의 주요 장르였다. 최초의 도시 풍경화로 꼽히는 인상파에서부터 미래파,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나는 앞서 이혜선의 작업은 미술사적 맥락으로 볼 때 모더니즘에 속하지만, 그의 모더니즘이 다른 모더니즘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 평론가로서 나의 임무라고 밝힌 바 있다. 반복하건대, 그것을 밝혀내지 못하면 이혜선은 그냥 흔한 모더니스트의 아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대양식과 개인양식은 다른 것이고 달라야만 한다. ‘역사적’ 모더니즘과 ‘이혜선’의 모더니즘은 다른 것이고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미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모더니즘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이 크게 두 가지, 즉 혁명주의와 형식주의에 있다고 본다. 모더니즘의 원래 의미는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혁명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근대적인 것은 모두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통한 혁명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예술 양식인 모더니즘 역시 ‘혁명적 예술’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서구 근대의 모더니즘은 서구 근대 혁명의 산물인 것이다. 모더니즘의 또 한 가지 특징인 형식주의는 말 그대로 내용주의의 반대, 즉 전통미술에서의 서사성(narrativity)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내용을 추방하고 오로지 순수한 시각 형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나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주요 모티브를 삼는 고대나 중세 미술과 다른 것이다.
사실 형식주의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원래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는 전통미술의 내용주의, 앞서 말한 신화나 종교적 내용으로 점철된 조형과 단절하고 혁명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시대를 표현하기 위한 조형적 이념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서사 주체로서의 주관주의가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보편적인 객관주의를 지향했고, 따라서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을 추구했다.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는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비현실적이고 탈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새로운 현실과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조형적 방법으로서의 형식주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식주의라는 말을 진짜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더니즘 미술의 형식주의가 지향하고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간과하고 말 그대로 모더니즘을 껍데기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말이다. 소비에트에서 아방가르드를 인민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반동적인 형식주의라고 배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런 접근은 모더니즘이 지향한 세계관을 삭제하고 순전히 조형적 놀음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혁명적 이념의 조형적 표현으로서의 형식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삭제된, 껍데기 형식주의로서의 모더니즘은 곧잘 다른 의미로 채워져서 제멋대로 이용된다. 전후 미국의 모더니즘이나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이라는 것이 그렇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혁명적 의미를 사상(捨象)하고 그 대신 모더니즘의 형식에다 반공과 냉전의 의미를 채워 넣은 이데올로기적 전치(displacement)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허한 형식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의 혁명적 이념을 담기 위한 혁명적 조형(현대미술의 혁명)으로서의 형식주의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모더니즘의 특징이 혁명적이고 형식주의적인 것이라면, 이혜선의 작업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과연 이혜선의 모더니즘도 그렇게 혁명적이고 형식주의적인 것인가. 이혜선의 도시 풍경은 형식주의적이기는 하지만 혁명적이지는 않다. 그의 도시 풍경에는 리얼리스트의 비판적 시각도 모더니스트의 혁명적 시각도 읽히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도시 풍경을 포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주의적이지만 혁명적이지는 아니한 것, 이것은 모더니즘인가 아닌가, 아니면 본토 주류 모더니즘의 요건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제3세계의 ‘아류/결손(缺損)’ 모더니즘일 뿐인가.

사실 그러한 제3세계의 ‘아류/결손’ 모더니즘은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앵포르멜로 대표되는 ‘한국적 모더니즘’이야말로 그러한 ‘아류’ 모더니즘, ‘결손’ 모더니즘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앞서 언급한 혁명주의 없는 형식주의로서의 모더니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모더니즘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순수한 형식주의로서의 모더니즘, 그것이 바로 ‘한국적 모더니즘’인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했듯이 원래 모더니즘은 절대로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매우 혁명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앵포르멜 같은 ‘한국적 모더니즘’은, 말하자면 모더니즘에서 이념적인 면을 쏙 빼버린, 단물 빠진 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 그러면 이혜선의 작업도 그런 것일까. 그러나 이혜선의 작업을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이해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면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적 모더니즘’이란 완전한 무이념, 무사유, 무감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앵포르멜이니 하는 그것들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음을 미술의 목표로 삼고 그러한 무이념과 무사유와 무감성을 무기로 삼아 (실은) 당대의 지배 권력과 결탁했으며, 그리하여 미술 권력을 거머쥐었다. 그들은 혁명적인 의미가 아니라 세속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이었다. 그런데 이혜선의 작업은 그와 다르다. 그것은 이혜선의 작업이 던지는 조금 미묘한 감성인데, 거기에 바로 그의 작업이 갖는 의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혜선의 작업을 서구와 같은 ‘혁명적 모더니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이념과 무사유와 무감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적 모더니즘’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한국적 도시미학의 불가능한 가능성

한국에는 도시미학이 없다. 흥청거리는 도시 부르주아들의 풍속을 그려낸 인상파도, 혁명의 열기에 휩싸인 군중을 묘사한 미래파도, 낯설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도시의 기이함을 포착한 초현실주의도 없다. 이는 물론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과정과 경험이 서구의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화에는 혁명도, 미학도, 예술도 없이 오로지 무미건조한 건설의 망치소리만이 요란했을 뿐이다. 서구의 근대화에는 정치, 경제만이 아니라 미학도 있었다. 기계미학은 바로 그러한 시대에의 송가(頌歌)였고 도시미학은 그 풍속화였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미학 없는 근대화였다. 도시미학, 기계미학이 없는 한국의 모더니즘은 ‘혁명적 모더니즘’이 아니라 무이념과 무사유와 무감성의 ‘한국적 모더니즘’이라는 예술 아닌 예술을 낳았을 뿐이다. 나는 이혜선의 작업을 기본적으로 이러한 한국적 배경과 맥락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혜선의 작업이 보여주는 표정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이혜선의 작업은 서구 모더니즘의 아류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 도시 구조물에 대해서 형식주의적인 매력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파나 러시아 구성주의 같은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얌전하고, 서정적이다. 그런데 서구 모더니즘의 ‘위대함’(?)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작업에서 역설적으로 한국적 도시미학의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태양은 외로워(L'Eclisse, 1962)>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연인들의 고독을 주제로 삼고 있다. 연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배수구로 흘러들어가는 물소리만이 들리는 한낮의 고요처럼 적막한 도시 풍경이 또 있을까.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도시인지도 모른다. 도시는 현대인의 고독을 통해 한결 세련되게 표현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세련됨이 허용되지 않는다. 날마다 부동산이 어떻고 재개발이 어떻고 하는 소란들로 뒤덮이는 한국 사회에서 저러한 세련은 불가능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위선이고 밥맛없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우리의 도시는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사랑을 한다. 그 구질구질한 도시의 구석들이 우리의 부정할 수 없는 일터이고 삶터이다. 그런 가운데 언뜻 올려다본 고가도로의 교각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 것일까.

찬양하라, 우리 도시들의 위대하지 않음을.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 대해 데면데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가 도시를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한국적 도시미학은 혁명적이지도 비판적이지도 않은 무미건조함과 무덤덤함, 그 가운데에서 약간의 페티시즘(!), 이 정도가 딱인 듯하다. 이혜선의 작업이 그렇다. 나는 이혜선의 도시 ‘절편풍경’에서 유토피아적인 흥분도 상투적인(?) 비판적 리얼리즘도 아닌, 차라리 어떤 중용적인 무심함을 느끼는데, 이것이야말로 한국적 도시미학의 어떤 진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이혜선의 작업이야말로 한국적 도시미학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