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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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경

작가 작품

Rainbow

have something

have something

step by step

have

My hat

emotionalgragh

see you again

planetai

infinite

작가 프로필

김 도 경 (Do Kyoung Kim)
Email address: dowitch1115@hotmail.com
Mobile number: 010 9438 8636



•학력
2007-2009 Slade School of Fine Art in University College London MFA 졸업
2002-2005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조소과 석사졸업
1998-2002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조소전공 학사졸업

•공모 및 수상경력
2018 가송예술상 입선, 가송문화재단
2016 광주폴리Ⅲ(뻔뻔폴리)작품 현상공모 입선, 광주비엔날레
2014 몽골노마딕레지던시프로그램 기획선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1-2012 차세대예술인력집중육성지원 작가선정,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1 김종영미술관 창작지원작가선정, 김종영미술관
2010 소마드로잉센터 아카이브 작가선정, 소마드로잉센터
2010 마포아트센터 비상전 선정작, 마포아트센터
2009 Bartolomeu Dos Santos Memoria: First Prize,
Slade School of Fine Art in University College London
2003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부문 특선, 국립현대미술관
2002 무등미술대전 조각부문 입선, 광주비엔날레관
2001 전라남도미술대전 조각부문 입선, 남도예술회관

•작가참여 프로그램
2017 이응노의집〔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창작스튜디오, 홍성
2017 ACC 창제작센터 랩 방문창작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4 몽골노마딕레지던시 프로그램, 한국문화예술위원회/몽골예술위원회
2013 ARTSPACE in Sydney, Asialink, Austraila
2013 고양창작스튜디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2010 KIAF 2010 작가지원프로그램 참여, Korea International Art Fair, 한국
2010 아르코 신진작가 비평 워크숍,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
2008 Littoral Art 레지던시 프로그램, Langdale, UK
2006 토지문화재단 작가 프로그램, 원주, 한국
•개인전
2017 10.30~11.14 ‘헤매는 사람_planetai’ , 이응노의집〔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홍성
2012 11.21~11.27 ‘Time Drawing’ , 관훈갤러리, 서울
2011 8. 5~9.8 ‘My Space’ , 김종영미술관, 서울
2009 3.17~4.10 ‘step by step’ , Departure in artspace, 런던
2008 6.15~6.30 ‘C have something’ , KT arthall, 서울
2008 5.9~5.16 ‘C have something’ , Woburn space in UCL, 런던
2006 12.1~12.10 ‘I'm Working’ , Duru artspace, 서울


•단체전
2020 직시, 역사와 대면하다_40주년 기념 오월미술제, ACC복합문화관, 광주
2019 모든 얼굴에는 비밀이 있다, 스페이스mm, 서울
2018 여름생색전_가송예술상, 인사아트센터, 서울
2017 이응노의집〔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창작스튜디오, 홍성
2017 2017ACC 방문창작자 showcase, ACC 창제작센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17 조춘점묘_5mm x 7, 경의선책거리 문화산책, 서울
2016 Picture+Book+Art, 현대어린이책미술관, 경기도
2016 2016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포트폴리오리뷰전, 무각사문화원, 광주
2015 무심, 소마미술관, 서울
2015 수신/답신 전, 미테우그로, 광주
2015 광주신세계미술제, 광주신세계갤러리, 광주
2014 Time and Space, 976 Art Gallery, 올란바토르, 몽골
2014 MA MOVE, PROJECT SPACE MO, 서울
2014 EX-AIR 경험의 공기(2013 국제교환입주작가프로그램), 창동창작스튜디오, 창동
2013 5mm x 7, 고양창작스튜디오, 고양
2013 Open Studio, ARTSPACE in Sydney, Asialink, Austraila
2013 INTRO, 고양창작스튜디오, 고양
2010 KIAF DISCOVERY(KIAF 2010 작가지원프로그램) , COEX Hall Swing Space, 서울
2010 비상 전_ 마포아트센터공모전, 마포아트, 마포아트센터, 서울
2010 자치구역1-130 전, (구)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
2010 동그라미 안에서 시간을 줍다_ 기획3인전, 아시아중심도시 홍보센터, 광주
2009 Research lmages As Art 2008 Gallery, UCL Graduate School, 런던
2009 MFA degree show, Slade School of Fine Art in UCL, 런던
2008 PERCEPTIONS-사물 물질 이미지 전, UNC gallery, 서울

•출판물
2017 의자다시만들기 (2017, 이응노의집〔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한국)
2015 enroute 夢몽골 (2015, 전남대학교출판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
2009 Opticon1826 Image Publication(2009, University College London, 영국)
2008 A record of daily life _ On observation, repetition and record in my work
(2008, Slade School of Fine Art in University College London 석사학위 논문, 영국)
2005 이미지의 중첩/대비/병치를 통한 작업연구
(2005,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한국)
2004 점자 그림책 (2004, UR ART / 한빛맹아학교, 한국)


•작품소장
2016 "5x7_Crazy about" 어린이와 작가 1:1협업 프로젝트,
Artist book과 영상기록물, 판교현대어린이책미술관, 경기도
2008 Print Studio, Slade School of Fine Art in University College London 런던, 영국
2009 Print room, Graduate School in University College London 런던, 영국
2006 Duru artspace, 서울, 한국

작가 노트

								

평론


                    작가노트

김도경

제 작업은,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조합 하는 작업입니다. 즉, 제가 바라보고자 하는 사물의 모습은, 일상의 반복을 통해 쌓여져 가는 시간 속에서 같지만 다르게 보려는 시도로써 표현됩니다. 일상사물을 끄집어내어 작업을 하다 보면, 지루할 수도 막막할 수도 있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정직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조급함으로 제 자신을 내몰지 않고 담담하게 작업 하려고 노력합니다.
작업의 주요대상은 의자, 컵, 작업책상, 옷과 같은 일상사물입니다. 이러한 일상사물을 집요하게 수집하고, 관찰하며 그것들을 모아서 형태를 상징화시키고 기능이 가진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를 찾아서 작업을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사물이 무엇이 되어주길 바라는 일종의 기대 혹은 바램을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에, 작품 안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시각이 자연스럽게 보여지게끔 작업합니다.
작업의 방법에 있어서, 반복적인 관찰과 기록을 통한 작업을 기본으로 하고, 조각, 드로잉, 드로잉 애니메이션, 판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단조롭고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작가의 일상과 반복적인 행위에서 작가와 작업의 의미, 그리고 과정을 작품 안에서 담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작가가 경험한 특정한 시간을 중심으로 오브제와 시간, 오브제와 공간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성찰 / 감성과 시간의 레이어들

김찬동(전 아르코미술관장)

일상은 포스트모던 논의의 중심 주제중 하나이다. 과거 모던의 거대담론으로부터 작은 서사들로 논의의 촛점이 이전되었다. 이는 거대한 이성중심의 합리주의적 사유의 독주에 대한 반성적 태도이다. 이것은 또한 총체성의 원리와 구조가 중시되는 모던적 사유로부터 개성을 중시하며 구조의 해체를 꾀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일상은 너무도 평범하고 반복적이며 사소하고 단순하여 거대담론의 체계 속에서는 주목되지 못하던 영역이다. 하지만 일상은 다원화된 세계를 구성하는 핵이며 총체성의 체계를 해체하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김도경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일상과 사적 삶의 공간에 놓인 사물들에 대한 미세한 관찰과 반복된 기록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스튜디오에 놓인 테이블, 매일 마시는 일회용 커피 잔 등 일상과 일상의 사물들에 대한 지속적인 기록은 사물과 공간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녀는 일정기간 동안 자신의 사적 공간과 공간에 놓인 일상적 사물들을 집요하게 사진과 드로잉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기록은 객관성을 목표로 하지만 기록자의 감성이나 주변의 환경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동일한 사적 공간을 매일 사진으로 찍어 기록으로 남기지만, 어제 찍은 사진과 오늘 찍은 사진은 서로 다른 공간의 기록이며, 같은 시간대에 찍은 동일한 대상물을 기록하더라도 그것은 동일한 대상물이 될 수 없다. 사진으로 포착된 동일한 장소와 사물의 기록은 축적된 시간의 물리적 흔적들로 숱한 시간의 레이어들의 잔존물이다. 사진은 기계가 포착한 드라이한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록사진을 통해 일상에 내포되어 있는 내밀한 주관적감성의 변화를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평범한 조건과 기술로 기록된 피사체는 대상에 주체의 미세한 감성을 담아내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상에 대한 감성의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사진을 동일 평면 내에 배열하되 서로 다른 두께로 쌓는다. 기쁠 때, 우울하거나 슬플 때 쌓이는 사진의 두께는 서로 다르며 두께의 차이는 대상에 대한 미세한 그녀의 감성을 드러내는 어법으로 사용된다.
그녀는 사진이외에도 핸드 드로잉과 판화로 이러한 일상의 기록들을 재현한다. 핸드 드로잉과 판화에는 선의 밀도나 강약, 색채 등의 요소가 개입되어 일상에 대한 그녀의 감성이 충실히 담겨 있다. 사진이 논리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태도라면, 상대적으로 드로잉이나 판화는 감성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태도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기록된 사진들을 그리드 형태로 반복 나열함으로써 일상의 개별성을 중성화, 물화시키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나열과 반복의 중성적 의미를 깨기 위하여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객관적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일상의 공간과 대상에서 느끼는 자신의 미묘한 감성과 느낌의 변화를 포착하며 대상으로서 일상의 다원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일상을 언어로 기록한다. 문학적 감수성이 강한 그녀의 기록은 일상의 다원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 그녀는 동판을 재료로 자신의 사적 공간에 놓인 일상의 사물들을 조각 작품으로 제작하고 있다. 다양한 옷이 걸려있는 행어, 탁자 위에 놓인 일상용품... 동판을 구부려 용접 하고 이를 연마하여 대상물의 다양한 표정들을 구현해 낸다. 특별히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조각작품들은 반구형의 조롱(鳥籠)처럼 보이는 구조물을 기반으로 그 구조물 위에 장미꽃이나 다리미가 놓인다든가, 또는 고무풍선을 조형화하고 있다. 어떤 구조물은 가면과 같은 형태를 보인다. 동판은 조각을 전공한 그녀로서는 매우 다루기가 용이한 소프트한 재료이다. 또한 일반적인 재료와 다르게 시간의 축적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재료이다. 이번 조각 작품들에서 보이는 특성이 있다면, 조형물 속에 주부로서의 일상의 편린들이 담긴 점이다. 반구형의 조롱은 페르소나이거나 그녀의 정신세계를 상징화하고 있다. 사물들 역시 주부로서의 감성을 일깨우는 사적 경험을 조형화하고 있다. 행어에 걸린 옷들로 드러내는 자신의 정서, 장미꽃과 다리미, 그리고 풍선으로 형상화된 작품들은 주부로서의 현실 상황과 여인으로서의 꿈과의 사이에서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각각의 오브제들은 일상의 현실을 구성하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도록 하는 작가의 사소한 일상적 소재인 것이다. 그녀의 조각품들은 이전의 사진이나 드로잉, 판화를 통한 대상의 반복적 기록과는 달리 구체적인 오브제를 통해 새로운 차원의 일상에 대한 표현으로 나아가고 있다. 시각보다는 촉각의 언어로 일상의 감성을 좀더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녀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쉽게 주목하지 않는 일상을 집요하게 관찰하며 기록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다루는 일상이란 매우 사소한 개인적 담론의 가치를 통해 좀 더 근원적인 삶의 문제에 접근코자하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녀는 일상의 삶에서 미를 발견코자 노력한다고 술회하고 있고, 일상 속에서 혼돈된 자아를 발견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일상의 사물들을 재구축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친근한 사물들은 매우 포근하여 그녀의 작업에 동기를 부여한다고 한다.

일상은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의 소유주인 개인에게는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이다. 그것은 추억일 수도 있고, 삶의 가치일 수도 있다. 설령 그것이 집착이거나 떨처버리고 싶은 고질적 병폐라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이기도 하다. 또한 일상의 사물 역시 타인에게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소유자의 분신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일상은 미세한 관찰과 발견을 통해 가치를 찾는 이에게는 우주전체 일 수 있다. 일상의 사물 역시, 사물의 본질을 상징하는 가치로 승화될 수도 있다.

기실 일상은 또한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고 미세한 변화이다. “만약 우리가 사물들이 반복된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세부사항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치 현미경을 통해 모든 세부들을 보는 것처럼 주위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반복되는 것과 같은 그 무엇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존 케이지). 변화가 본질인 일상은 그 내면에 이미 다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며, 소유자의 인식과 판단에 의해 그 다원적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녀의 초기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일회용 종이 컵은 영국 유학시절 그녀에게 위안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커피에 대한 추억의 형상화이다. 그 시절 커피는 그녀의 가장 온전한 행복과 위안이었다고 한다. 비싼 유명 브랜드 커피만을 고집한다거나 이를 테이크 아웃하여 들고 다니며 브랜드와 자신의 신분을 동일시하는 자기만족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진정한 위안과 평온함의 의미이다. 일상과 일상의 사물들은 맥락에 따라 상이한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일상이 예기치 못한 상황과 문맥 속에 놓일 때면 일상의 의미는 물론 존재의 혼돈을 초래하기도 한다. 자아의 혼돈을 통해 일상은 해체되거나 재구축된다. 이번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종이컵들의 구축과 해체를 형상화한 애니메이션은 일상적 사물의 재구축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탈리아 화가인 지오르지오 모란디( Giorgio Morandi)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정물들을 단순한 방식으로 반복하여 그리면서 그 단순함을 통해 지적이며 명상적 회화를 추구하였다. 모란디를 일러 ‘죽은 사물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모란디의 화실은 이젤 한 개와 주전자, 술병, 꽃병 만든 과일, 종이꽃 등등 일상적인 사물들이 수북이 쌓여 마치 고물상의 한 모퉁이를 연상케 한다. 그는 일생동안 그 골동품들을 이것저것 골라서 그리곤 했다. 그녀가 오랫동안 일상을 반복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일상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이 가지고 있는 다양하고 무궁한 속성을 관찰하면서 일상 속에 담긴 생의 가치를 터득해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일상은 매우 담담하며 시끄럽지 않다. 강조할 것 없는 자신의 일상의 단면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타인에게 자신의 일상의 중요성을 강요하기 보다는 무심한 일상의 가치와 의미를 공유하고자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의 이번 전시는 작품의 진열에 있어서도 그녀의 그러한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그녀가 생활하는 일상적 공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무심한 듯 작품들이 놓여진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작위적으로 각각의 작품들이 가지는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적 공간에 초대된 그런 느낌이랄까? 놓여진 일상적 사물들에 투사된 그녀의 사적인 감성을 발견하면서 사물과 인생에 대한 명상을 일깨우는 공간을 경험케 된다.

김도경의 작품은 형식상 강렬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으며 소소한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다소 담담하게 풀어간다. 거대담론을 다루거나 물량적으로 강한 작품들이 주목받는 시대에 너무도 작고 조용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일상이 그러하듯 드라마틱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기록되고 있는 그녀의 일상은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사사로운 일상의 가치를 일반화하는 과정이다. 일상은 무표정하고 지루하게 반복이 되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일상의 미세한 변화는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녀의 탐구 대상인 일상은 대상에 대한 감성과 시간의 레이어들을 통해 세계와 자신의 성찰을 향해가는 작은 발자국들이다.



삶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지점들, 시간과 일상, 미로와 퍼즐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흔히 예술을 열린 개념이라고 한다. 개념이 열린 탓에 예술에 대한 정의도 분분하다. 이처럼 열린 개념이며 분분한 정의를 뒤로 하고 근원적인 물음을 물어볼 수가 있겠다. 일종의 현상학적 에포케에 해당하는 의식의 영도지점에서 예술의 정의를 재설정하고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입견의 지평 밖에서 예술은 무엇일 수 있는가. 아마도 예술의 근원, 예술의 원형, 예술의 본질로 부를 만한 무엇이 될 터인데(의식의 영도 지점에서 다시금 원형이며 본질을 호출한다는 아이러니!), 저마다 주어진 삶의 시간을 낱낱이 헤아리고 기록하고 반추하는 자기 강박적 행위가 여기에 부합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삶과 구분되지 않는 예술, 삶으로부터 길어 올린 예술, 예술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삶에 천착한 예술이며 행위가 가능해질 것이다. 김도경이 시간이란 주제에 천착하고 시간이란 주제를 공 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시간은 일상과 같이 간다. 시간이 일상 속으로 흐르는 것. 그리고 알다시피 일상은 반복되면서 반복되지가 않는다. 외관상 똑 같은 시간이며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사실 반복되는 시간이며 일상은 없다. 물은 흐른다. 그리고 시간도 흐른다. 물은 흐르는 탓에 똑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시간 역시 흐르는 탓에 똑 같은 시간을 두 번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반복되는(사실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뿐인) 일상과 반복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표현으로 붙잡고 아우를 수가 있는가. 바로 차이를 내포한 반복으로 붙잡고 아우를 수가 있다. 김도경이 시간이란 주제(그리고 일상이란 부제)를 표현으로 붙잡고 아우르는 방법이다.

작가의 일상은 작업실에서 시작된다. 작업실은 작가의 둥지이며 작업의 산실이다. 작가는 이런 작업실 공간에 놓인 테이블이며 구조물 그대로 사진으로 찍고 에칭으로 옮겼다. 흡사 일기 내지 일지와도 같은 기록된 사진을 높낮이에 차이를 두어 쌓는 것으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라는 일상의 꼴이며 됨됨이를 상형했다. 사진의 높낮이는 왜 어떻게 다른가. 사진의 높낮이가 다른 근거는 무엇인가. 그날그날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 높낮이가 결정되고 달라진다. 일종의 바이오그래프로 볼 수가 있겠다. 일상은 변함이 없지만(적어도 외관상 그렇게 보이지만) 일상이 작가와 만나지면서 변질된다. 일상의 지평과 작가의 지평, 객관의 지평과 주관의 지평이 상호 융합되면서 반복되는 일상 속에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작가는 매일같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기보다는(이를테면 문화생활로 자리 잡은 한 경우? 그래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볼 수 있는 한 경우?) 그 행위가 일상적 행위이고, 그런 탓에 일상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마시고 남은 컵을 주물로 떠냈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래서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무쇠처럼 견고한 기념비적 인상으로 일상을 기념하고 싶었다(미라나 조상으로 덧없는 존재에 영원성의 아우라를 부여한 이집트의 파라오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가하면 작가는 각각 합판과 철판과 직물을 소재로 또 다른 바이오그래프를 형상화한다. 평면 형태로 제안된 합판과 철판과 직물의 표면에는 자잘하고 섬세한 모눈들이 모판처럼 각인되어져 있는데, 아마도 모눈으로 나타난 반복패턴이 반복적인 일상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모눈 위에 그날그날의 감정을 표기해 작가의 감정 상태를 유추해볼 수 있게 했다. 바이오그래프이면서 일종의 감성지도랄 수 있겠다. 감성지수를 표기하고 기록한 것인 만큼, 각각 합판과 철판 그리고 직물로 나타난 소재 고유의 물성이나 질료적 성질 역시 이런 감성의 질감이며 성분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재 저마다의 재질에 따라 안온한 감정이나(합판), 차갑고 명징한 논리(철판),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우호적인 기분(직물)과 같은 그날그날의 감정과 기분의 질감을 질료를 빌려 표현하고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프와는 또 다른 감성지표로 아우를 수가 있을 터이다.
그리고 바이오그래프는 연필 드로잉을 실크스크린으로 옮긴 일련의 판화로 변주되고 심화된다. 각각 드로잉한 선의 강약에, 점차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음영에, 그리고 무채색과 유채색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섬세하고 미묘한 차이에 감정의 기복과 변화를 담았다. 내친 김에 여기서 무채색을 무의식에 대한 그리고 유채색을 의식에 대한 상징 색으로 볼 수가 있겠고, 따라서 유채색과 무채색의 대비를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을 표상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사사로운 감정이나 기분의 됨됨이가 꼭 그럴 것이다(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과 간섭). 이렇듯 작가는 예컨대 기쁠 때와 슬플 때 그리고 우울할 때와 같은 그날그날의 감정과 기분을 기록하고 표기한 일종의 생리지도 내지 바이오그래피 내지 바이오 맵을 예시해준다.
이런 일련의 생활감정은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며, 그 이면에는 일상과 더불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반성 내지 강박이 놓여 있다. 이를테면 실타래를 풀고 감기를 반복해 보여주는 영상작업에서 일상은 각각 감기와 풀기로 상징되는 긴장과 이완이 연속되면서 순환하는 반복으로 이뤄진다(일상의 기복? 일상의 주기?). 여기에 실타래 자체가 갖는 시간과 기다림과 흐름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더해져 일상의 의미를 강화한다. 이를테면 흐르는 시간과 기다리는 일상과 같은 의미를 강조하는 것(여기서 불현듯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이처럼 작가의 작업의 밑바닥에는 시간에 대한 반성과 일상에 대한 강박적 기록이 깔려있다. 그 반성과 기록이 강박적인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모종의 기획이 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 존재확인이라는 프로젝트를 감행하게 해주는 과정이며 방편이랄 수 있겠다. 시간을 기록하고 일상을 기록하는 일련의 작업들과 같으면서 다른, 그렇게 존재론적 자의식이며 문제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아님 우회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경우가 발자국(엄밀하게는 신발자국)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이다.
사람들이 바닥에 깔린 종이를 밟고 지나간다(사실은 발자국을 종이에 프린트해 재구성한 것). 그렇게 밟고 지나가면서 종이에 발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을 보면 신발 밑창에 Go라는 영문자가 깨알처럼 쓰여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Go라는 영문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아무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하튼 삶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맞아. 더욱이 보다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이런 자기 목적적이거나 목적 지향적 삶이 어쩌면 증명되지 않은 막연한 신념이거나 자기최면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좀 거창하게는 진화론이나 발전사관, 그리고 최소한 자기 목적적인 삶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게 하면서(삶에 목적이 없을 수도 있다?) 일상의 기반을 흔들어놓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Go라는 영문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람들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발자국이 재구성된 꼴은 오리무중이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사실은 어쩌면 오리무중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재구성된 꼴이 미로를 연상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유독 필자에게만 그렇게 읽히는가?). 어쩌면 삶은 목적이 없는 오리무중의 미로일지도 모른다. 너무 비관적인가. 때론 그저 살아지는 것이 더 삶다울 수도 있고 삶이라는 진실에 더 근접한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삶에는 해답도 해법도 없지가 않은가.
그리고 작가는 같은 개념을 적용해 다른 작업으로 변주한다. 그 표면에 발자국이 프린트된 정사각형으로 자른 작은 나무토막을 소재로 한 작업인데, 사람들은 발자국이 프린트된 나무토막을 무슨 레고나 퍼즐처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짜 맞추고 재구성해볼 수가 있다. 그렇게 나무토막(사실은 발자국)을 짜 맞추면서 저마다 살아온 삶의 족적을 반추해볼 수가 있고, 살아갈 삶의 족적을 예비하고 연습해볼 수가 있다. 관객참여를 유도해 작업의 운신을 넓힌 이 작업은 삶의 양가성을 드러낸다. 즉 잘 짜인 퍼즐처럼 삶은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계기에 의해 살아진다. 그리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퍼즐처럼 삶은 우연한 계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퍼즐은 필연을 증명하기도 하고 우연을 증언하기도 한다. 그래서 퍼즐은 무슨 삶이라는 이름의 주사위 같기도 하다(주사위도 퍼즐도 미로도 삶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상징의 지점들일 것).

다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을 헤아린다는 처음의 문제제기로 돌아가 보자. 그 행위는 일종의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강박적인 행위란 점에서 정체성 문제와 통하고 존재의 증명 문제와도 통한다. 이를테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 말은 사실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인식될 수는 있어도 인식과 동시에 증명될 수는 없다. 인식과 증명이 어긋나는 것.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인식된 사실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그곳이라는 과거시제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가 있다(인식된 사실이라는 과거형의 기술이 암시하듯). 이처럼 그때 그곳으로 변질된 한에서만 지금 여기를 증명할 수가 있다는 점에 존재의 아이러니가 있고, 그 자체 예술이 아이러니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여하튼 지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가고 있는 것이 맞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혹 사실은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되돌려진 지점은 시점과 같은가, 아님 다른가. 각각 시간과 일상, 미로와 퍼즐을 매개로 한 김도경의 작업은 이런, 그 자체 존재론적인 문제의식에 결부된 인식론적인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사소한 일상의 성찰


김미진(홍익대학교 교수)


인류의 시간 층을 껴안고 있는 이 시대에서 삶과 죽음의 폭 넓은 스펙트럼을 경험하며 표현하고있는 작가들의 충격적이고 생생한 작업에 익숙한 우리는 김도경의 담백한 일기같은 작업에는 쉽게 눈길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드라마틱한 시대에서 너무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 집착하며 장기적으로 작업하는 작가의 태도에 의문이 생겨 작품에 주목하게 된다. 그의 예술을 다루는 방식이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늘 하는 보통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각예술의 가장 기본 표현법인 종위 위에 연필 선으로 드로잉 하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동안 매일 자신의 작업실 공간 안에서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고 연필로 그렸다. 2009년-2010년에는 실제 슬리퍼를 신고 작업실 바닥에 놓인 종이에 찍은 발자국을 이용해 드로잉과 판화작업을 제작하였다. 흑백의 선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된 드로잉, 사진, 판화작업은 거의 같은 장면이지만 빛이나 사물의 위치가 조금씩 변하면서 약간의 차이를 나타낸다. 보편적이고 지루한 일상 안에서의 미묘한 차이를 작가는 포착하고 표현하고자 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평범한 사물을 의식을 가진 시선으로 보는 명상훈련 같은 작업이다. 2008년도의 일회용 커피컵시리즈 작품은 유학시정 매일 혼자 마셨던 커피 컵을 선의 음영만으로 변화를 주는 포토에칭과 드라이포인트 기법과 드로잉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작업역시 시간을 두고 매일 마시는 컵과 만나게 되는 개인적 감정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였다. 이후 컵은 작품의 소재가 되어 긴 종이에 하나의 개체로 실크스크린으로 프린트되어 길게 늘어뜨려 여러 개 설치하거나 녹슨 쇠 박스 위에 하얀 빈 컵들을 석고로 캐스팅하여 놓여있는 작업으로 변형된다. 같은 작소, 사물이지만 매 순간 다른 감정으로 만나게 되는 미묘한 차이는 양적으로 모여 형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다른 매체로 변화되어 낯선 층위를 경험하게 한다. 평범한 사물은 드로잉, 판화, 조각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보이며 애니메이션으로 촉각을 가진다. 평면으로 혹은 단위로 표현된 작업보다는 애니메이션은 유용한 예술의 표현방식인 것 같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대변하는 하나의 컵은 단순한 선과 형태로 쌓고 무너지는 움직이는 형태를 만들어 사회에서 관계를 만드나 연결되지 않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의 삶을 잘 대변한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드로잉과 표현법은 순수하기까지 해서 평면의 순진한 부분을 덮는다.
2010년의 비디오 작업 에서는 작가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 두 개의 의자가 등장하고 한 의자 위에는 흰 끈을 감아 만든 둥근 볼이 놓여 있다. 조금 있다가 작가가 등장하여 볼을 내려놓고 실을 풀어 다시 둥글게 감는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과를 감아 나온 끈으로부터 둥근 볼이 만들어 지고, 사과와 끈, 볼은 각각 의자위에 하나씩 놓여있게 된다. 끈을 계속 감는 행위로 암시되는 예술의 형태는 실제와 전혀 다른 것을 만드는 것과 실제를 동시에 제시함으로 현실과 작가의 내적세계가 만들어낸 예술세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을 경험하고 있는 작가는 예술에 대한 극적인 실험보다는 시간을 두며 사물을 천천히 관찰하고 순간마다 변화하는 감정에 따라 달리 보이는 상황을 표현한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물이나 공간은 하나의 패턴으로 선택되고 그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으로 집적되면서 객관적이 된다. 그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결과물은 준비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의 작업은 시간에 따라 사물과 공간과 작가 내적인 감정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차이를 보게하며 가장 기본적인 의식의 흐름들을 읽어낼 수 있는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금권을 향해 치닫는 사회와 재앙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엄청난 경험적 개념이 주는 공허한 현대미술 안에서 김도경의 작업은 우리 삶속의 사소한 부분들의 중요함을 일깨운다.




기록하는 자로서의 작가

이선영(미술평론가)

고암 이응로의 생가와 전시장 등이 있는 충남 홍성의 작업실 외벽에는 ‘우리 다시 만나요’라는 문장이 담긴 거대한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손 글씨체로 씌여진 그 짧은 문장은 연잎 밭으로 에워싸인 풍광 좋고 고즈녘한 장소에서 갑자기 크게 들리는 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도보가 아닌 자동차로 통과하곤 하는 길목, 특히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그러한 규모의 문장은 흔히 발견되지만, 대개 기업체 광고나 공공 기관의 계몽적 메시지가 대부분이다. 그 글씨의 주인공은 사적인 차원의 작은 규모에서 오고가는 말에 거대한 시각적 확성기를 달아준 셈이다. 친한 사람이건 아니건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그 말은 어떤 예술적 의도에 의해서 비일상적인 차원으로 소격(낯설게 하기)되었다. 이 대화체의 문장은 이러한 소격 작용에 의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한 단락을 부각시킨다. 그 작품은 그다지 주목할 만 한 것이 없는 일상의 결을 보듬어왔던 김도경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상이 일상에 의해 조명 받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비 일상에 의해서 조명 받고 그 반대도 성립된다. 일상과 비일상은 반복과 차이의 관계다. 최초에 메모지에 썼을 그 문장은 크게 확대됨으로서 의식 뿐 아니라 무의식이 드러난다. 확대는 필사자가 자신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어떤 흔적을 감지하게 한다. 낯설게 하기는 확대 뿐 아니라 축소—김도경은 자기 작품의 축소모델 격인 아티스트 북을 종종 만들곤 한다—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낯설게 하기는 예술의 가장 오래된 관행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김도경의 경우 이러한 낯설음을 위해 뭔가 대단하게 놀라운 무엇을 도입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에 부각된 새로움의 전통은 이러한 낯설음의 실행에 많은 무리수를 두어왔다. 근대예술은 충격의 산실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대중문화의 관행에도 스며들어 체계적으로 소비되기에 이르렀다. 새로움의 전통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김도경의 작품은 잔잔한 편이다.
이러한 잔잔함은 예술적 야심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일상성을 화두로 한 작품의 성격에 기인한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일상과 비일상을 cool과 hot이라는 두 단어로 대조한 바 있다. 축제나 전쟁, 재난 같은 비일상적 상황에 비해 일상은 차갑게 흘러간다. 르페브르에 의하면, 일상의 비정상이란 결국 폭로된 일상성 그자체이다. cool/ hot의 대조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원시/현대의 구별을 상기시킨다. 그렇지만 상품을 소비하며 채워지는 현대의 일상 역시 변화가 더딘 원시시대의 시간 감각으로 되돌린다. 앙리 르페브르는 소비사회의 일상에 주목하는데, 여기에서 특히 반복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대상이다. 일상은 하찮은 물건들의 집합인 것이다. 김도경의 작품에서 그러한 물건들은 커피 컵부터 장난감 조각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소비되는 품목들로 나타난다. 일상은 그 하찮음 속에서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것의 생성 또한 반복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일상이 철학의 서막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을 일상성으로 하여금 현재에는 그 안에 부재중인 어떤 충만성을 세상에 내놓도록 도와준다는 르페브르의 논지를 따르자면, 예술 또한 그렇다. [현대세계의 일상성]에 의하면 일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객체이다. 객관성 속에서가 아니라, 물체성에 의해 그리고 거의 순수 형태로서의 객체말이다. 르페브르는 다만 물체적 명료성 속에서 사물을 스펙터클로 변형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물체의 확실성은 행위로서의 주체, 또는 작품으로서의 사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언어 곧 그 구조가 현실과 너무 똑같은 그 언어에서 나온다. 완벽한 순환을 추구함으로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왕복함으로서 일상생활의 확고한 안정성이 드러난다. 르페브르는 짧은 시간들이 한없이 확대되는 현대소설(누보로망)의 예를 든다.
김도경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물들 또한 인간을 대신한다. 그러한 사물들을 사용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그것을 작품화하는 주체는 가려져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사물들은 주체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증거 할 뿐이다. 그러한 사물들은 주체의 반영이나 표현이기 보다는, 주체 자체를 구성하는 무엇이다. 소비품목이 소비자를 대신하듯, 사물이 예술가를 대신한다. 김도경은 그러한 반복적 실행 가운데 살짝 비트는 전략을 구사한다. 여기에서 예술은 일상적 삶의 반복이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형식은 압축적이기 때문에 반복은 기계적일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작품에 대해 기시감을 갖곤 하지만, 무엇이 무엇과 비슷하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어떤 차이도 있다고 같이 말해야 한다. 작정하고 베낄 때조차도 완전한 반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압축적 재현인 예술은 어떤 부분을 선택하거나 삭제하고, 어떤 순간을 가속화하거나 느릿하게 한다. 그래서 삶과 관련은 되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닌, 즉 삶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삶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생겨난다.
예술이란 이러한 생성을 증거 하는 기념비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작가가 선택한, 또는 만들어놓은 맥락이다. 가령 플래카드 작품 [우리 다시 만나요]는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에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목민적 삶을 살게 되는 현대인의 상황도 드러내주는 애틋한 문장이다. 최초의 [우리 다시 만나요]는 2014년에 작가가 유목민의 땅인 몽골사막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이 있다. 영국 유학 중에 제작한 작품 [c have something](2008)은 매일 마셨던 커피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작가 말대로 ‘부모님의 노후자금을 털어서’온 유학, 여기서 반드시 뭔가 건져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지 않았을 것이기에, 부담 없는 커피 타임조차도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석고로 캐스팅한 수많은 일회용 커피 잔은 작가가 마신 그때마다의 시간들이다. 매순간 작가는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고, 커피가 가지는 무게 또한 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원재료에 충실한 이 조각 작품들은 서서히 바래가는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다. 작가는 반복과 차이의 유희를 보여주는 이러한 주제를 수백 장의 에칭에 담기도 했다. 작품 [my space](2007-9)는 일상을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으로, 작업실을 계속 촬영하여 판화로 만든 것이며, 드로잉 버전도 있다. 배움의 과정도 그렇고 더욱이 작업하는 삶이란 사치스러운 것이다. 사실, 이렇게 낭비된 시간이 없이 일상을 미세하게나마 변화시키는 무엇인가가 생겨나기는 힘들다. 일상이란 단지 살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 의해 지속된다. 그러나 예술을 한다고 해서 늘 충만한 작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그 때 마다 작품을 시작했던 초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작품 [the way of healing](2011-12)은 미술을 처음 할 때 하던 명암내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손이 녹슬지 않도록 기본을 유지하면서 하던 작업인데, 그자체가 작품이 되고 심지어는 치유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작업실에는 400자 원고지의 칸을 명암내기로 메꾼 것도 걸려 있었다.
그것은 필자가 원고지를 글자하나하나로 채우듯이 미술가는 자신의 조형적 언어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몸을 기록하는 작품 [emotional graph](나무 버전은 2008-9, 금속 버전은 2010), 자신이 입었던 옷을 전 방위적으로 조각하고, 실크스크린과 에칭으로도 작업한 [rainbow](2009)는 반복적 기록이라는 기조를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소재를 단단한 재료로 만든다든지 하는 변화를 통해 차이를 도입한다. 걷기란 일상 속에서 반복과 차이의 관계를 가늠해주는 경험이다. 두 발의 반복적 움직임은 보행자를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김도경의 작품에서 걷기는 끝없는 이동을 보여주지만, 시점과 종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step by step](2009-10)에서 처음에는 앞으로 가는 듯했지만, 점차 앞뒤자체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황을 표현한다. 작품 [step by step puzzle](2012)은 발자국 모양이 있는 400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지만, 굳이 안 맞춰도 상관없다. 거기에는 유목과 미로의 관계가 있다.
21세기를 유목의 시대로 규정하는 자크 아탈리는 또한 [미로]의 저자이기도 하다. [미로]에 의하면 미로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적어도 하나의 입구와 출구 또는 중심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통로를 갖추었지만 출구를 찾아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표지도 없는 복잡한 길을 의미한다고 정의된다. 이 공간의 내부는 오는 길과 가는 길, 나선형 길과 막다른 통로, 멀면서도 가까운 곳들로 가득 들어차 있으며, 그 속에서는 거리조차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미로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는 근대가 중시하는 직선적 지름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크 아탈리는 역사 또한 필연적으로 최선을 향해 나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발전은 없다. 역사는 미로처럼 막다른 길과 환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술 또한 미로에서의 헤매기처럼 한정된 공간 안에 무수한 길을 만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초창기 작업인 [i’m working](2005)은 낡은 신발을 납판으로 조각한 것으로, 그렇게 낡기까지 걸었을 시간을 금속의 푸른 녹으로 보여준다.
낡은 신발로 나타나는 걷기는 일상을 반복한다. 그렇지만 작가는 재료를 변화시키고 시간을 가속화시킴으로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작가의 삶이 전개됨으로 인해 선택되는 사물이나 재료는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새장 모양의 모자 [my hat](2011)은 어느덧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가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은유한다. 멀리 날아가진 못한 채 천정에 걸쳐있는 동판으로 만들어진 풍선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 [헤매는 사람]은 아이의 놀이터에서 힌트를 얻었다. 미끄럼틀과 계단, 사다리 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실제의 놀이터와 달리 매우 위험한 느낌을 준다. 천정에 달린 미러볼은 놀이터를 비췄을 태양을 대신한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구조를 가진 이 놀이터는 벨기에 출신의 판화가인 에셔의 작품처럼, 돌고 도는 이상한 고리의 모순이 깔려 있다. 거기에는 아이들의 블록 장난감처럼 기본 도형으로 되어있는 작품 [동그라미+세모+네모](2013-17)에도 등장하는 도형들이 가세하여 한정된 단위로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레고 블록으로서의 우주에서 새로움은 기존의 것을 재배열함으로서 탄생할 뿐이다. 매일 마셨던 커피나 자주 입었던 옷과 신발, 늘 머물렀던 작업실, 흔히 하던 말 등 일상의 사물과 공간, 언어들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김도경의 작품은 살아가기와 작업하기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관계처럼 그 간격이 어느 지점에서는 교차된다. 작업/작품이 예술가 주체의 거울이라면, 반사상이 가능할 거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무엇이 무엇을 비춘다는 것인가.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반사상이 많아지면 주체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분산하고 흔들어놓는다고 본다. 이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신기루처럼 붙잡고 그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성으로 환상이 조금씩 자리를 넓힌다. 저자는 그러한 예를 1만여 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일기와 삶을 혼동했던 작가 아미엘에서 발견한다. 보네에 의하면 아미엘은 꼼짝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것을 바라보고, 또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포착하는 몽상가였다.
[거울의 역사]에 인용된 바에 의하면, 아미엘은 자신을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거울, 서로의 모습을 비추면서 또 서로에게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또 비춰진 모습을 다시 반사하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두 개의 거울’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반사상의 가역성은 완전한 비현실을 예고한다. 이때 예술가는 ‘내적 삶의 영웅’이지만, 동시에 ‘활동적인 삶의 패자’가 된다. 수백 장에 이르는 시리즈로 구성되기도 하는 김도경의 작품은 일상의 친숙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거기에서 야기되는 미묘한 변화를 기록하려 한다. 그러한 기록이 바로 작업이다. 작품은 기록의 과정 또한 담는다. 그녀가 작업을 열심히 한다면 말 그대로 기록하는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록하는 자는 언제 사는가. 여기에는 작업을 열심히 할수록 삶이 축나기도 하는 예술가의 역설이 담겨있다. 김도경은 이러한 역설을 굳이 피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기로 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역설을 작업의 주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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