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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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환

작가 작품

Individual exhibition at Breda Copetti Sculpture Park in Udin, Italy, Organism-Cloud 2020_1, stainless steel, 310×300×400(h)cm, 2020

International Sculpture Exhibition at Boudoy Beach, Australia(Sydney, Australia), Organism - from the nest, bronze, 180x140x480(h)cm, 2016

Nanning Group of the Shinhwa Historical Park, Organism 2017_2, copper, marble, 200x225x180(h)cm, 2017

Organism2019-9, bronze, 62x17x65(h)cm, 2019

Paju Shinsegae Premium Outlet Organism -Flower, copper, 900x550x300(h)cm, 2008

Samsung Life Insurance Co., Ltd. in Guwol-dong, Incheon, Organism 2010_8, bronze, 340x250x160(h)cm, 2010

Songdo Central Park in Incheon, nine germinations, stainless steel, copper, 260x110x700(h)cm, 2011

Songdo Convention Center in Incheon, Organism 2007-Runhoe, bronze, 400x400x270(h)cm, 2008

Yeongjongdo Paradise Hotel, Organism 2017_1, copper, 500x200x240(h)cm, 2017

Individual exhibition at Breda Copetti Sculpture Park in Udin, Italy, Organism-Cloud 2020_4, stainless steel, 480×146×100(h)cm, 2020

작가 프로필

김 승 환(金 承 煥) KIM, SEUNG - HWAN

학 력
1984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1994 이태리국립 까라라 아카데미 조각과 수학

현 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미술협회 회원
서울조각회 회원
현대공간회 회원
인천 조각가협회 회원

심사위원, 운영위원경력
서울시 도시철도 미술품 전문가 자문위원
서울시, 인천시, 수원 외 미술작품 심의위원
하남시 현충탑공모 심사위원
현대자동차 전문심사위원
구상조각대전 심사위원
행주미술대전 심사위원
환경미술협회 자문위원
전주소리문화의전당 상징조형물 심사위원
경향신문사공모전 운영위원


수상경력
김종영조각상 수상
화나노국제조각심포지움 대상
밀라노아트페어 평론가상
그 외다수


아트페어 및 심포지움
1995 볼로냐아트페어(갤러리냐까리니,갤러리활키,볼노냐)
1995 빠도바아트페어(갤러리활키,빠도바,이탈리아)
1996 볼로냐아트페어(갤러리활키,볼로냐)
1997 아스완국제조각심포지움(아스완,이집트)
그 외 다수

개인전
2020 브라이다 코페티 조각공원, 코페티갤러리(우디네, 이탈리아)
밀라노 디자인위크, 슈퍼스튜디오(밀라노, 이탈리아)
2019 슈퍼스튜디오(밀라노)
2018 아트스페이스 플라스크(서울)
2017 이정아갤러리(서울)
2015 갤러리 스페이스H(서울)
2014 예술의 전당(서울)
2012 예술의 전당(서울)
그 외 다수

단체전
2019 서울과학기술대학교(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술관)
서울조각회 정기전(서울시립대학교 빨간벽돌 갤러리)
서울가톨릭미술가회 정기전(갤러리 1898전시실(명동성당 지하1층))
현대공간회 기획전(아트스페이스 애니콜)
2018 서울시립대학교 개교100주년 기념조각전(서울시립대학교)
서울조각회(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우석갤러리)
아트 스페이스 그루브 기획전(아트 스페이스 그루브)
無限彫刻空間(아트파크)
인천조각전(인천아트플랫폼B동 전시장)
한국조각가협회
현대공간회
2017 현대공간회 창립 50년 기념전(김종영미술관)
인천조각가협회정기전(갤러리지오)
서울아트쇼 (코엑스 A홀)
2016 stone works-today(김종영미술관)
마크갤러리초대기획전(마크갤러리)
호주본다이 해변국제조각전(시드니,호주)
인천조각가협회정기전(선광미술관)
제주문예회관기획초대전(제주문예회관)
현대공간회정기전(아트스페이스벤)
인천가톨릭가전(인천아트플랫폼)
연변대교류전(리부스갤러리)
그 외 다수

공공미술
영종도 파라다이스호텔/ 영종도 메가스타호텔/ 부산 해운대 자이2차/
제주도 신화역사공원 상징조형물/ 한탄강 홍수조절댐 준공조형물/
인천 송도 홈플러스/ 인천아시안게임주경기장/ 인천 송도 니트타워/
혜전대학교 설립 30주년 기념조형물/ 파주 프리미엄 첼시아울렛/
논현 한화에코메트로
그 외 다수

작가 노트

								

평론


                    진실의 근사치, 그 고도의 리얼리티 
: 김승환의 ‘유기체’ 미학

An Approximate truth and its High Degree of Reality
: Kim Seung-hwan's Aesthetics of the‘Organic body’


이 재 걸 | 미술비평
2019. 09. 25. Seoul, KOREA

“우주의 한 가지 기본적인 법칙 중 하나는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완전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 1942-2018)


모호한 진실은 예술가에게 강렬한 영감을 선사한다.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하고 그 모든 것이 한 가지의 모습으로 규정될 수 없는 세계, 생명의 성장이 생명의 소멸과 맞닿아 있는 세계를 이해한 예술가는 ‘수축한 진실’의 유혹을 떨치고 진실의 무한함에 다가간다. 예술은 세계의 불완전함이라는 존재론적 사태에 대한 인간의 주요한 답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답변을 통해 아름다움의 보편적 가치도 캐물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작업이기도 하다.
세계는 ‘알 수 없음’으로 인해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자연과 생명 현상에 있어 모호함은 곧 정의(定義)이고, 형식 자체이다. 예술가의 권력도 바로 이 절대적인 형식, 절대적인 신비의 언어에 접근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김승환의 초기작인 <인간-영원성> 연작도, 우리에게 익숙한 <유기체> 연작도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했고 이 지점에서 완숙해 왔다.


■ 인간의 형태 Ⅰ : 초기의 작품 세계

김승환은 한국에서 조각을 배운 후 스물여덟이 되던 1990년에 미켈란젤로에게 고결한 예술적 영감과 아름다운 대리석을 제공했던 이탈리아의 조각 도시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로 유학을 떠났다. 까라라 미술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di Carrara) 조각과에서 수학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1980년대를 견딘 이 젊은 한국 조각가에게 까라라의 상징성은 지금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까라라 유학 동안 작가는 피에트라산타 출신 조각가 샘 게라르디니(Sem Ghelardini)가 1950년대 중반에 초석을 닦은 국제 돌조각 공방 ‘샘 스튜디오(Studio Sem)’에서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때 다수의 국제 조각전에 참가하면서 책임 있는 조각가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는데, 특히 1991년에 열렸던 <샘 30년> 展에 참가했을 때에는 세계적 명성의 조각가 세자르(César Baldaccini), 아보스캉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김승환은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 스위스 등의 유럽 국가에서도 꽤 많은 전시를 여는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4년여의 세월을 값지게 보낸 후 1994년에 귀국길에 올랐다.
작가에게 1985년에서 1995년은 작품의 초기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에 작가는 인체를 그로테스크하게 다루면서 재료의 질감과 작품의 감각적 인상이 거의 억압적으로 보이게 구현했다. 형상을 조소(彫塑)하면서 동시에 형상의 무너짐을 일구고, 폭력의 드러남을 통해 폭력의 본질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스타니 센느(Stani Chaine)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젊은 한국의 조각가가 손으로 내리치고 어루만져가며 빚은 창조물을 헤아려 본다.

“예술가는 새로운 조물주처럼 피조물을 변화시킨다.
자신의 근저를 이루는 비극들의 커다란 극장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해, 일그러짐과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의 참을 수 없는 광폭함에 이르기까지 질문을 계속하면서, 이런 점에서 김승환은 인간을 저버린, 그를 장면 바깥에 방치한 동시대의 예술창작과 거리를 갖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려 본질로 돌아오는 것이다.”
김승환의 초기 작품들은 인간의 죄의식이나 소외 의식과 같은 비극적 정서가 지배하는 것들이다. 작가는 주로 실존 의식이 날카롭게 깃든 흉상이나 거친 구조물에 의해 뚫리고 갇힌 전신상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와 맞서려 했다. 시대의 분노와 좌절을 올곧게 받아들이고, 자기 분열에 다가가는 소외감을 연민으로 품었던 작가는 투박하게 뜯겨 나간 형상을 통해 인간의 상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이 형상은 인격에 대한 공격도, 당시 유행하던 의미의 해체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방어와 의미의 참된 지향성을 위한 것이었다. 말하지 않고 표현해야 하는 그의 인체는 고통의 시대가 낳은 산물이다. 작가의 인체조각에 흐르는 기괴한 정서도 바로 ‘견디는 자의 침묵’이 만든 것이다. 이 침묵은 표현하지 않기 위한 침묵이 아니다. 김승환의 침묵은 그 어떤 의도의 침묵보다 더 적막하고 한없이 슬픈 묵언의 날 선 ‘외침’이다. 그 안에는 참담한 현실이 만든 역설의 또 다른 버전(version)이 잔뜩 웅크리고 있다.
이 초기 작품들이 시작된 것이 그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무렵인 1985년경부터였으니 한국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절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젊은 조각가의 폐부를 관통했을 시대의 죄의식은 겹겹이 벗겨진 피부의 쓰라림처럼 아픈 것이었다. 조화로운 미의식이나 감미로운 시각성과 같은 말들은 그에게 강요된 침묵과 같은 의미였다. 김승환은 표현해야만 했다. 고통을 이겨내며 잔존하는 인간상을 건설하고 인간 영혼의 생생한 반응을 증언하면서 해방을 실천해야만 했다. 작가의 초기작들에 스며있는 풍부한 고고학적 분위기, 낯선 존재의 표본이 급작스럽게 우리의 현재에 파고든 듯한 생경함,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환원성은 바로 생명의 심리적 잔상들이다. 작가는 이 잔상들이 스스로 표현되는 지점에, 말하자면 폭력과 무관심으로 인해 부서진 인간의 삶에 ‘살아 있음’의 명료한 사실성을 되새겼다. 이것은 심약한 자들이 열광할 만한 바니타스(vanitas)도 아니고, 지나간 인간성에 대한 막연한 노스텔지어(nostalgia)도 아니다. 작가의 관심은 모호한 존재의 모습에서 존재의 강인함을 떼어내고, 잔혹한 현실에 대한 응시에서 영원함에 대한 명상을 떠올리는 것에 있었다.
물론 누군가는 흙을 만들고 그것에 거푸집을 입혀 다른 단단한 재료로 떠내거나 흙 자체를 구워 만드는 작가의 작업 방식이 진부한 조형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새로움’이란 인간의 조각 행위 이전에 이미 존재해왔던 것들에 대한 경외감에서 비롯한다. 당시 작가에게 현대조각술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재료나 기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논리는 지극히 초라한 예술적 목표로 여겨졌을 것이다. ‘진부한’ 조각술에 의존한 김승환 조각이 참신한 까닭은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반성과 재정의(再定義)에 있었다. 김승환은 화려하게 번쩍이거나 신기한 마술처럼 보이는 조각들이 미처 갖지 못한 심각한 존재의 몸짓을 가장 오래된 조각술과 가장 흔한 조소 재료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 인간의 형태 Ⅱ : 중기의 작품 세계

가장 당연한 것 안에서 가장 특별한 것을 추출하는 그의 예술은 고된 정신적 노동의 결과이다. 의미를 배반하는 사고(思考)의 미끄러짐 안에서 그의 인체는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획득했다. 흙의 질퍽함과 미끈함을 오가며 작가의 언어가 새긴 것은 아름다움의 내용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생기였으며, 영원성에 대한 동경이 아닌 영원성 그 자체의 숭고였다. 그렇게 형태 안에 침전된 ‘강렬한 모호함’은 작가에 의해 비극의 공포를 이기고 인간성의 특별한 비전을 제시한다.
연민의 아름다움, 파격의 아름다움, 고통의 아름다움.., 이 모든 역설의 아름다움은 자칫 시대적 상황이나 설익은 젊은 조각가의 고양된 의욕에 갇힐 수도 있었던 작품들에 영겁(永劫)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1996년~2004년 사이의 김승환은 실존의 문제에 ‘영원한 지속’이라는 범우주적 가치를 탐색하며 초기의 주제 의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일환으로 작가는 형태의 치열한 현전성보다 형태의 근원성에 주목하면서 작품의 형이상학적 모양새를 다듬었다. 인체조각이지만 해부학적인 강령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몸의 형태, 표정, 동세, 세부 묘사 등은 정신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몸의 저항에 못 이긴 채 소멸해 가고 있었다.
김승환의 표현적 관심은 더는 인체의 생김새나 그것이 말하는 바에 있지 않았다. 얼굴은 점차 인체의 유기적 관계만을 남겨 둔 채 단순해지고 있었다. 눈, 코, 입의 기능이나 팔과 다리의 요구는 몸의 조약한 현실을 반영할 뿐이기에 필요하지 않았다. 작가에게 유기성은 ‘살아 있음’의 가장 최초적 패턴이며 명백한 주장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미학적 요소이다. 훗날 그의 작품이 완전한 추상 조각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생명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형태의 유기성 덕분이었다. 초기 작품들에서 비정형적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적 의지’가 두드러졌다면 중기 작품들에선 단순성과 정신성이라는 커다란 화두 안에서 ‘비-표현적 의지’를 조형 원리로 내세운다. 단순성은 다양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정신성은 인간의 추상적 실체를 위해 선택되었다. 이 시기부터 김승환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생략 하면서 물질의 권위를 후퇴시키기 시작한다. 비-표현의 충동이 정신의 표현으로 연결되는 지점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이다. 작품의 표면도, 작품이 감상자의 마음속에 들어서는 방식도 한층 미끈해졌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 흐름에 따라 중기의 작품들은 파괴 이전의 원형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 인물상들 안에서 현실의 문제들은 본질의 문제들에 의해 숨을 죽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침묵의 언어를 빌려 화내거나 아프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이들은 ‘외침’의 방식이 아닌 ‘명상’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고통받는 자가 오히려 고통을 준 자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처럼 말이다. 이제 고통받는 자는 죽어가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영원한 순환에 몸을 던진 자가 되었다.
김승환이 소조의 기술적 화려함을 게워내고 소조의 시원적(始原的 맛을 풍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생몰(生歿)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무한한 예술적 영감으로 이어졌다. 작가의 손끝에는 문자 이전의 언어, 미술교육 이전의 미술, 현상 이전의 사실을 추적하고자 하는 열망이 뜨겁게 서려 있었다. 작가는 작품들을 거침없이 쏟아 내었고, 그가 제작한 수많은 얼굴은 서로 반복되고 중첩되면서 ‘영혼의 타원’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그의 조각이 점차 인간의 경험을 넘어 자연의 경험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표현엔 깊은 정신성이 배어들었고, 감정의 표정이 줄어드는 만큼 생명의 표정은 더욱 뚜렷해져 갔다. 뻥 뚫린 채 공허에 삼켜진 눈과 미완의 성장 상태는 영롱한 생명의 표정을 위해 바쳐진 육신의 증거로 남겨졌다. 질서와 비례의 역사적인 권위도 그의 조각에서 자연스럽게 탈관(脫冠)되어 희화화(戱畫化)되었다.
작가가 제안하는 인간상은 니힐리즘의 극한에서 다시 살아남은 신체이며, ‘탈주선(ligne de fuite / Gilles Deleuze)’을 따라 다시 기획된 생성이다. 고착된 법칙이 지배하지 않고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는 혼돈 속의 질서를 따르면서 작가가 다시 세우려 했던 것은 ‘살아 있음’의 진정한 가치였다. 그의 <두상> 연작은 인체의 멋스러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줄지는 몰라도 우리가 생명에 기대를 품고 전진하기 위한 엄숙한 맹세의 형태로서 손색이 없다. 이렇게 김승환의 탈주하는 인체는 인간의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고 점차 자연 본연의 문제로 흡수되고 있었다.


■ 자연의 형태 : 완숙기의 작품 세계

감각은 세계를 만나게 돕지만, 한편으로는 세계를 축소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작가에게 눈의 작용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어떤 형태, 예를 들어 산, 사람, 나무, 꽃, 동물, 곤충 등의 ‘외면적 사실들’은 세계가 우리의 감각에 던져 놓은 ‘알리바이(alibi)’ 혹은 ‘에피소드(episode)’일 뿐이다. 작가는 오히려 그 사실들 내부에 담긴 자연의 진정한 형태를 보려 한다. 그의 유기체 조각은 추상 형식의 완성이라는 미술사적 임무를 위한 것도 아니며, 구상성에 대한 추상성의 우위를 선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작가에게 추상 형식은 눈앞에 현전하는 생김새 내부에 감춰진 대상의 존재론적 본질을 탐색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다. 특히 꽃과 곤충의 외관에서 놀라운 유기적 구조를 발견하고 그것을 순수한 조형 형태로 모티프화하여 생명 현상의 예민한 변화를 포착한다.
완숙기의 작품들은 면과 선들의 증식에 매진하면서 조각에 있어서 양감의 절대적 의무에서 벗어났으며, 서로 힘차게 맞물리고 관여하는 세부 요소들을 통해 전체의 혁신을 이루어 낸다. 이 절차를 거치면서 꽃은 꽃이면서 구름이나 불가사리 혹은 바람개비도 되고, 곤충은 곤충이면서 증식하는 세포나 거대한 산맥의 율동적인 존재 양상이 되기도 한다. 형태 안에 보이는 하나의 동작과 방향은 다른 동작과 방향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변화는 또 다른 변화의 원인이 된다. 하나의 꽃잎이 자발적으로 여러 꽃잎으로 증식하면서 꽃의 존재를 뚜렷한 것으로 상정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김승환 작품의 부분은 전체를 내포하고 전체는 부분의 일면이 된다. 이는 자기유사성(self-similarity)과 순환성(recursiveness)으로 확대와 축소의 결과가 ‘대략’ 서로 닮게 되는 자연의 현상, 즉 프랙탈(fractal) 생명 현상의 미학적 전치로 볼 수 있다. 발달의 측면에서 보아도, 그의 프랙탈 구조는 가장 고효율의 구조를 따른다. 어느 한 부분이 상처를 받아 파괴되어도 전체적인 기능을 바로 상실하지 않는 지점, 어떤 특정 부위가 주제를 총괄하지도 않고, 형상의 주요 부위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부위의 편차도 크지 않은 지점에서 김승환 조각의 ‘형태’는 출현한다. 그의 조각은 전체가 상호적·유기적으로 얽혀 있기에 ‘부분의 무너짐’이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자연의 힘을 내포한다. 프랙탈 구조의 규칙적·불규칙적 대칭과 그것의 방사형 증식은 ‘발생-반복-점증(漸增)-소멸-발생’의 순환 공식을 따른 것으로서 생명의 기본적인 존재 원리와 연결된다. 그래서 작가의 유기체 조각이 갖는 신선한 아름다움은 생명형태학적인(biomorphic) 아름다움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한편, 형태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형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작가에게 우리가 감각하는 자연의 외관은 끝없는 순환 안에서 고정성과 통일성을 상실하는 경험을 한다. 이때 외관의 이념은 본질의 이념에 밀려 와해하거나 축출된다. 이러한 상실의 경험에 따라 우리의 정신에 영롱하게 떠오르는 어떤 형태는 주름(The Fold)의 파동과 닮아 있다. 형상은 요소와 요소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서로 겹쳐지고 방사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완성의 느낌이나 불멸의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차이(différence)와 반복(répétition)의 끝없는 메커니즘 안에서 그의 조각은 본질을 향한‘역행적 진화’를 본격화한다. 이 ‘역행적 진화’가 내뿜는 영원한 성장, 영원한 미완의 느낌에 따라 김승환의 유기체는 ‘보이는 것’이란 보이지 않았던 물리적 현실이 극한으로 수축한 결과일 뿐이라는 철학적 각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주름의 영원한 연결로서의 뫼비우스 띠(Möbius band) 연작이나, 방향과 힘의 구성만으로도 생명의 특질을 강렬하게 함축하는 그의 유기체 연작은 모든 형태의 궁극적인 형태로서 주름을 받아들인다. ‘옷의 젖은 주름들’이 나체보다 신체의 실체성을 더 잘 드러내는 것처럼 김승환의 주름은 ‘형태의 원형’을 파고든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정신적 원자인 모나드(Monad / Gottfried Wilhelm Leibniz)를 응축하고 있는 주름은 세계에 출현한 모든 것의 가장 작은 동시에 가장 큰 존재 양상이다. 자연의 미시(微示)와 자연의 전체가 공존하는 그의 ‘주름-유기체’에서 미(美)와 추(醜)의 구분은 부질없다. 작가는 원근법의 세계, 계급의 세계, 결정론적 세계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있다. 그의 조각은 가장 모호한 미로서 추하고, 가장 리얼한 모호함으로서 아름다울 뿐이다.
자연의 표현법에 닮아가며 자연을 발생시키는 주름의 자발성에 따라 김승환의 유기체는 매번 새롭게 태동한다. 개별의 주장과 이기(利己)의 논리에 의해 조각난 우리의 영혼을 통합하면서, 그의 유기체는 우리를 세계와 존재라는 진실에 다가가게 한다. 물론, 진실의 우매한 평균값을 말하는 대신 진실의 보편타당한 근사치를 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제 그의 예술은 형태에 대한 감상에서 세계에 대한 발견의 차원으로 옮겨가 읽혀도 좋으리라.


■ 정신의 형태

면의 안과 밖이 없는 끝없는 진전의 뫼비우스 띠는 영원한 시간이야말로 세계의 원형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우주와 생명은 끝없이 되풀이된다는 생각에 밀착되어 있다. 김승환의 유기체 조각이 점차 뫼비우스 띠의 변이(變異)로 발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재들의 연속체로서의 ‘무한궤도-유기체’는 이미 자연의 법칙으로 환원된 것으로서 잠재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안에서 사소한 자연 현상은 없다. 숭고한 자연의 일원인 존재들에게 사사로운 사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은 자연의 고귀한 호흡이고, 낙엽의 덧없음은 열매의 달콤함이 지닌 또 다른 표현이다. 모든 것은 의미가 있으며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자연은 유한(有限)이라는 비극을 극복한다. 이처럼 철학적으로 숙성된 자연 개념은 가냘픈 찰나(刹那)의 삶을 영겁회귀(永劫回歸)의 단단한 질서로 이끌어 준다.
이제 개별들의 역동적인 발생은 작가에게 폭력의 원인이 아니다. ‘침묵의 외침’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았던 그의 투박한 인체상이 인간성에 대한 뜨거운 열정의 산물이었다면, 완숙기에 접어든 오늘날의 김승환이 보여주는 것은 자연과 영원의 리얼리티 안에서 찾은 정서적 균형이다. 그리고 이 정서적 균형은 놀라울 정도로 모호하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단순히 장미꽃의 세세한 생김새를 재현하지 않아도 괜찮다. 김승환 작품이 발산하는 정서적 균형은 장미와 자연의 ‘관계 맺기’가 만든 기품 있는 리듬감에 있으며, 고정성과 부정성을 극복한 ‘탈주'의 신선함에 있다. 자연은 생명의 존엄한 형식을 통해 그 숭고함을 더한다는 사실을 작가가 잘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균형감이다. 일찍이 김종영 선생은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며 ‘불각’(不刻: 조각하지 않는다)의 정신을 높이 샀다. 보통 조각은 재료를 새기거나 깎아서 어떤 형상을 만드는 것이지만, ‘불각’은 자연의 원리를 조각하기 위해 조각을 자연물 다루듯 하며 ‘완전한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작은 존재들이 모여 이뤄진 구조로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표현의 절제를 통해 자연의 풍부함을 담아내려 한 불각의 맑은 정신은 김승환이 보여주는 균형감 안에서도 독창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순간과 영원, 정형과 비정형, 조각과 불각, 작은 것과 큰 것, 내재와 초월, 완전함과 불완전함..., 조각가 김승환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것들은 서로 극단에 위치하면서 서로 의미론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분(二分)의 각 영역은 선명하게 드러나기에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지만, 이분(二分)의 사이에는 무한한 크기의 감성이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 경외감을 준다. 이 경외감은 우주적 허무에 가까운 것이며, 무한이라는 모호함의 실체는 눈의 힘으로는 간파할 수 없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 이미지가 별의 진정한 형태를 발설하지 않듯이,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외관의 정의(定義)’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감각과 지성이 반응하지 못하는 실체는 오직 감성의 토대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김승환이 유한한 인간과 영원이라는 개념을 맞붙이기도 하고, 대상의 복잡한 물리적 성질 곁에 정제된 정신성을 남겨두기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정성을 극복하고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작가는 감성의 형태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끝없는 변화가 아름다움의 선험적 조건이 되고 조화로운 사유의 단서가 되는 지점에 김승환의 예술이 있다. 그의 예술 안에서 진실의 모호함과 세계의 무한함은 스스로 긍정되어 잦은 다툼과 회의(懷疑)에 지친 우리의 현실에 참된 해방의 단서를 귀띔한다. 가장 일반적인 사실들에 스며있는 신비로운 존재의 비밀을 되묻고 또 되물으면서 김승환의 예술은 감상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어떤 장소에 정서적 온기를 더하며, 자연과 생명을 동경하는 그 어디라도 잘 어울린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대형 환경조각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공공의 영역에서 발주(發注) 받아 제작한 작품과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로 제작한 작품에 특별한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환경조각이 장소의 특정성과 티격태격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의 공공조형 작품은 환경조각이기에 설치될 공간을 염두에 두고 구상되지만 그렇다고 어떤 건물이나 광장의 특수한 상태에 끼워 맞춰진 느낌은 전혀 없다. 김승환은 개인 영역과 공공 영역 간에 특별한 차별을 두지 않는 흔치 않은 조각가이다. 이는 매번 달라지는 경제적 목적이나 대중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는 작가의 완고한 예술관을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그의 조각이 자연의 향수를 품은 그 어떤 장소에서도 괴리감이 없이 ‘보편성의 미감’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40여 년 동안 작가 김승환이 멀쩡한 것들을 깎고, 붙이고, 쌓고, 용접하고, 갈고, 부수는 별것 아닌 행위를 통해 얻으려 한 것은 결국 자연이 스스로 순환하며 긍정되듯이 우리의 성장도 그 모습 그대로 긍정되는 고귀한 경험이었다. 형태의 사치와 내용의 가난을 자각조차 못 하는 예술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그의 예술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살아있다는 사건으로 인해 죽어갈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체를 경이(驚異)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생명의 나약한 물리적 현실을 ‘영혼의 타원’ 안에서 끝없이 순환시키려는 작가는 우리를 현혹하는 장식들과 매일 대결한다. 그의 진지한 예술적 태도와 삶에 대한 애정은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 항구적인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상기한다.

“영원의 구조는 찰나의 조합에 앞선다.”라는 작가의 존재론적 반성은 항구적인 흐름과 그 흐름에 몸을 맡긴 모든 존재의 목소리를 값진 것으로 승화시킨다. 꽃과 인간과 구름과 바람은 각기 다른 형이하학적 운명에서 발화했지만, 영원의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하나가 된다. 되풀이되는 노래로서, 분산과 전체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고귀한 우주의 모습과 닮은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자연의 형이상학적 모습, ‘살아 있다’라는 그 아름다운 모호함을 향하는 김승환의 예술은 우리의 눈과 정신에 이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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