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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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작가 작품

녹색향수

Green Nostalgia_203×124×246cm_steel, wood, paint on resin, broken mirror, artificial grass 220v motor, leather_2017

녹색공조

발포우레탄_203×67×60cm_2017

코리안 랩소디

Korean Rhapsody_혼합재료_310x120x92cm_2016

테이블 위의 미사여구

혼합재료_230x90x90 cm_2016

프로메테우스 증후군2

레진위에 페인트와 사진 꼴라쥬_110x35x40 cm_2016

A Monument

54×39cm Pen on paper 2017

fire spiting

디지털 c-프린트_120x80_2013

BULLET MEN

WONDERING IN YOUR MIND still image

신전을꿈꾸다

110x274x184cm, F.R.P, Marble Powder, Steel, beam projector, 2008

총알맨 III

450x95x95cm_F.R.P. Urethane Paint, steel 2009

BULLET MEN II

F.R.P. urethane paint, wood,240x68x60cm, 2008

익명의 인체

Anonymous Body_240x90x90cm F.R.P. Small Figures cast by Liquid Plastic, Stainless Steel Coat, Steel 2007

Beautiful One-piece

Small figures cast by Liquid Plastic, Stainless Steel Wire, Strengthen Glass, Steel_2009

36.5도 인간군상

청계천 마장2교 부근 에 “Dream of Returning” 이란 제목으로 설치,150x700cm 좌대 위에 37cm 인체 100개. 2006 (2)

36.5도 인간- Blue

220 x 244 x 122 cm브론즈위에 우레탄 도색, 철로 제작된 베이스. 2013년 여수예울마루 전시광경

총알맨 II

BULLET MEN II,F.R.P위에 우레탄 도색, 스틸, 앵커 볼트300(h) x 330(w)x 55(d) cm 2013 평창비엔날레 설치광경

Between

about 1000 small figures casted by urethane, Korean Military Border, Paju, 2013

미래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

2019

작가 프로필

1. 개인전
2017 녹·색·공·조, Artertain Stage, 서울
2016 UTOPIAN_그것을 꿈꾸는 나와 그들, 갤러리 밈, 서울
2013 Prometheus Syndrome, Stepsgallery, Tokyo, JAPAN
2011 BULLET MEN - WONDERING IN YOUR MIND, 갤러리 무이, 서울
2009 총알맨 Ⅲ & 치유할수 없는…, 김종영미술관, 서울
2008 신전을 꿈꾸다/DREAMING OF THE ALTAR IN YOUR MIND, 관훈갤러리, 서울
2006 Meta-stranger, 국립고양스튜디오 갤러리, 고양
Meta-stranger: a proposal, Atelier am Eck, 뒤셀도르프, 독일
2004 Exploring Identity, Dissolving Boundary, Mason Gross Arts Gallery, New Brunswick, 뉴저지, 미국.

2. 그룹전
2019 Full Metal Jacket. 강원국제예술제, 홍천 (구) 탄약정비공장
2019 30th 미야자끼 국제현대조각전, 미야자끼 국제공항, 일본
2018 2018 미야자끼 국제현대조각전, 미야자끼 국제공항, 일본
아빠얼굴 예쁘네요-학전블루와 콜라보레이션, 학전블루 소극장
서울시립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조각전, 빨간벽돌갤러리, 서울시립대학교2015 The Line, DMZ 민간인 통제선, 문산, KOREA
26th 미야자끼 공항 국제현대조각전 2015, Miyazaki international airport,
2014 A Room of His Own 그만의 방: 중동과 한국에서의 남성성, 아트 선재센터,
Favorite 2014, Stepsgallery, Tokyo, JAPAN
드림라이트-양평군립미술관 개관 3주년 기념전, 양평
2013 The Line, DMZ 민간인 통제선, 문산, KOREA
PyeongChang Biennale 2013, 평창, 강원도, KOREA
두개의 유토피아, 여수 예울마루, 여수
2010 태화강 국제 설치 미술 페스티발, 태화강 고수부지, 울산
여수 국제 아트 페스티발, 여수 오동도 광장, 여수
녹색 미술제, 사북고한 야생화축제, (구)삼탄 본관 특별전시관, 정선

3. 작품소장
프로메테우스 신드롬 ll, Fire spitting, 서울시립미술관
총알맨들, 알펜시아 리조트, 강원문화재단
36.5도 인간, 양주시 장흥문화관광단지 입구, 양주

4. 학 력
2004  M.F.A. Mason Gross School of the Arts, 럿거스/뉴저지 주립대학원
비주얼아트 전공
1996  M.F.A.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소전공
1993  B.F.A.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작가 노트

								

평론


                    비현실적인(utopian) 세계의 막바지에서   


요즘 신문지상에서 ‘87년 체제’의 종언에 대한 얘기를 간간히 듣게 된다. 작은따옴표 속의 숫자와 ‘체제’라는 용어에 거리감을 느끼는 이도 많겠지만, 1987년 전후의 한국 사회를 실제로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 연도가 어떤 맥락으로 해석되든 간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점이 되었음을 안다. 그리고 ‘87년 체제’를 탄생시켰던 상징적인 주체 가운데 하나가 최루연기 자욱한 광장을 가득 메웠던 대학생들이었음도 어렵잖게 기억한다. 그들은 자기희생을 마다않는 경이로운 열정과 정의감으로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사회변화를 이끌었고, 새롭게 도래한 세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곧잘 망각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광장의 대학생들이 오늘날의 청년들과는 사뭇 다른 사회적 위상을 가졌던 ‘엘리트들’이었다는 것이다. 연 10%를 상회하는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개발도상국에서 또래 인구의 5분의 1에게만 문호가 개방된 대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마이너스 성장을 눈앞에 두고 있고, 전국 대학교의 정원이 20대 전체 인구보다 많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은 쉽게 체감할 수 없다. 시위참여 때문에 학업에 아무리 소홀했더라도 졸업만 하면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를 선택해서 갈 수 있었던 아름다웠던 시절, ‘헬조선’을 살아가는 88만원 세대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그 시절의 청년들에게는 실현되었던 것이다.

김지현의 전시 에는 ‘87년 체제’를 열었던 엘리트 청년들이 헬조선의 지질한 중년들로 변모하면서 내면화시킨 환멸의 정서가 드러나 있다. 그것은 의도치 않게 배어나온 것이라 더욱 시리게 와 닿는다. 이 전시는 전‧현직 남과 북 지도자들의 이지러진 두상과 같은 직설적인 표지에서부터 총알, 불덩이, 정장차림의 남성과 같이 현실을 빗대는 은유와 상징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치적(sociopolitical) 메시지를 담은 기호들을 가득히 품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현실 세계에 대한 모종의 비판을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의 주체와 객체가 누구이며, 비판의 목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되물었을 때, 우리는 사뭇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전시에서 나타난 현실 비판은 그릇된 현실과 공모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조소를 항시 동반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1987년의 광장에서 청년들이 그랬듯이 훼손된 대의민주주의(이지러진 대통령의 두상)와 맹목적인 천민자본주의(총알모양의 투구를 쓴 사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선명한 정공법을 취하지 못한다. 적(敵)과 나 사이의 전선은 불투명해졌고, 비판의 주체와 객체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이지러진 대통령의 두상 속에 ‘나’의 두상이 있고, 총알모양의 투구를 쓴 사람도 ’나’와 다를 바 없다.

김지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희비극(喜悲劇)적인 특성은 이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광장’에 서고자 하는 비판의식과, ‘87년 체제’가 도출했던 유토피아를 오늘날의 디스토피아로 전락시킨 특권적인 집단에 자신도 속해 있다는 자의식이 모순적으로 겹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80년대 민중미술을 연상시키는 ‘정색하는’ 진지함과 2000년대 코리언 팝아트의 작가들이 공유했던 ‘댄디한’ 세련미가 기이하게 공존한다. 관객은 그의 작품을 심각하게 새겨봐야 할지, 부담 없이 즐겨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예컨대 이지러진 채 수직으로 쌓여 있는 전‧현직 남과 북의 지도자들과 작가의 두상은 처참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총알 모양의 투구를 뒤집어 쓴 정장차림의 사내가 등장하는 연작(連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이라는 상징과 연계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 사내를 숙연하게 응시해야 할지, 가볍게 웃어넘겨야할지 태도를 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모순을 수습하기 위해 ‘풍자’라는 제3의 길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관객을 양가감정(ambivalence)에 처하게 만드는 작품의 구조를 철회하지 않는다.

김지현이 원활한 감상을 희생해서라도 작품의 양가감정적인 구조를 고수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세대가 주인공이 되어 창출하였던 ‘87년 체제’가 못난 모양새로 해체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느끼게 되는 회한과 조소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가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라는 명사를 쓰지 않고, ‘비현실적’이라는 비꼬임의 뉘앙스를 동반하는 ‘utopian’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까닭도 유사한 맥락일 것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는 ‘87년 체제’의 가장 뚜렷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와 경제 정의의 구현(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물)을 작품의 직간접적인 테마로 삼고, 30년 전에 추구되었던 ‘이상향’이 오늘날 얼마나 퇴행적인 모습으로 전락하였는지를 드러낸다. 특히 작가는 ‘87년 체제’를 가져온 주인공들의 초상을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패러디해서 나타냈는데, 정장을 빼어 입고 정치경제의 제일선에 섰던 청년 엘리트들이 초심을 읽고 자본의 맹목적인 ‘총알’로 변질되는 과정을 신랄하게 형상화시켰다.

작가는 에서 제시되는 도상(圖像) 속에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첨가한다. 그럼으로써 이 전시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들’을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조소(嘲笑)하는 데 있음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 전시에 내포되어 있는 비웃음에는 분노와 비애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어, 제3자로서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헬조선’에서 처참하게 각자도생하고 있는 2010년대의 청년들에게 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코드로 구성된 전시일 수도 있다. 이 사회의 주인공으로 대접받기는커녕, 기본적인 생계가 보장되는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기에도 벅찬 그들에게는 이 전시에 배어 있는 회한마저도 ‘엘리트적’이고 사치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시에는 ‘헬조선’이 도래한 책임을 구세대에 전가시키고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이 사회 중장년층의 솔직한 자화상이 담겨 있다. 그 세대가 토로하는 서사(敍事)는 비록 지금의 사회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섬세하게 청취하고 공들여 분석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여전히 그들이 창출하였던 ‘87년 체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30년간 지속되었던 그 체제는 이제 수명을 다해간다. 과거의 이상향(utopia)이 비현실적인(utopian) 것으로 판명된 이 시점에 사회는 새로운 이상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김지현의 은 오늘날의 청년들에 의해 새롭게 구성될 ‘UTOPIA’의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계기로서 시의성을 획득한다. 특히 오랜 퇴행 끝에 반등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는 현시점의 우리사회에 김지현의 전시는 의미심장한 현실인식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본다.

강 정 호


김지현의 작업

총알맨, 존재론적 자의식과 부조리의식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사람들은 나를 총알맨 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에게 붙여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다. 실은 눈 코 귀 다 있지만,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은회색의 투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어서 앞을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으면 나는 편안해진다. 총알처럼 생긴 형태가 공격적인 성향을 띠며 외부와의 불필요한 마찰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남근을 연상시켜서 나를 꽤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한다. 나는 나를 비방하는 소리들, 근거 없는 험담과 야유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총알맨으로, 그리고 남근맨으로 무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총알처럼 생긴, 남근처럼 생긴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는 동안 나는 편안하면서도 불안하다. 나를 야유하는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희미하게 들리는 그 소리는 상상력과 더불어 쉽사리 각색되고 종래에는 걷잡을 수 없이 마구 부풀려진다. 게다가 소리의 진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불안감이 더 증폭된다. 처음에 여러분들은 나를 두려워하지만, 이내 그 두려움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아채고는 자신들을 속인 나를 벌주기 위해 공격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공격을 예감하는 나는 도망치기 위해 허둥대고, 내 속에서 여러분의 비웃음은 더 커져만 간다. 어쩌면 공격도 그렇거니와 비방조차도 사실은 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한갓 환상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환상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비방과 공격을 예감하고, 이로 인해 심각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해서 나는 그 투구를 벗을 수도, 그렇다고 그대로 쓰고 있을 수도 없다.

김지현은 번쩍번쩍 빛나는 은회색의 투구를 머리에 쓰고서, 앞이 보이질 않아 허둥대는 퍼포먼스를 펼쳐 보인다. 일명 총알맨으로 명명된 그는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이나 혼란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시대적 아이콘이나 캐릭터로 정의할 만하다.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강요받고 있는 그는 있을 법한 공격을 예감하고, 그 예상되는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주변에 철옹성을 둘러친다. 미처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그의 내면에 불안감을 심어주고 공포감을 내재화한 것이다. 이런 내재화의 과정이 외관상으론 개인이 불러들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제도의 기획에 의한 것이다. 제도는 도덕적으로 험결이 없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완전무결한 인간, 동시대가 요구하는 엘리트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는 인간, 동료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소위 선택 받은 인간, 전인적 인간(?), 정상적 인간(?) 등의 환상을 개인에게 심어주는 한편, 그 조건에 함량미달일 경우에는 언제라도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여기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란 실존주의에서의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저들만의 리그에 기꺼이 동참하든지 아니면 모른 체 하든지 하는 문제로 축소된다. 이렇게 해서 개인은 정상적 인간 아니면 비정상적 인간, 완전한 인간 아니면 불완전한 인간 중 어느 한쪽에 서도록 강요받는다. 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소위 편집증의 논리며, 정체성의 논리다. 개인에게 끊임없이 특정의 정체성을 요구하고, 일단 입력된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 정체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논리다. 이런 제도의 논리에 맞서는 것이 정신분열증의 논리며, 차이의 논리다. 모든 정본으로 인정받은 것들, 정통성을 부여 받은 것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들, 관습적인 것들의 틀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행위를 통해 소위 종(種)다양성을 확보하고 확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하한 경우에도 그 리그를 모른 척 하기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저들의 정의가 모두의 정의와 동일시되며, 따라서 그 집단의 논리로부터 개별주체의 특수성(차이)을 지켜내기란 상당히 어렵다. 정체성 상실과 혼란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우람한 근육질의 몸과 강철투구로 무장한 나는 집단의 이름으로는 강하지만(집단의 이름 뒤에 숨을 수 있지만), 홀로 되는 순간(나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앞도 가늠하지 못하는 안쓰러운 모습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각하기를 포기하고 기꺼이 제도가 요구하는 기계부품이 되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어 보인다(또 다른 모던 타임스).
저들의 리그에 동참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도에 동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집단의 논리로 나를 채색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심지어는 생각(자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의 선택의 귀로에 선 나는 삐딱한 세상처럼 기우뚱한 침대에 누워 가위 눌린 채 그동안 내가 쌓아올린 신전이 무너지는 꿈을 꾼다(신전을 꿈꾸다). 이로써 김지현은 정체성 상실과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종의 판단불능증(선택과 판단을 의도적으로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택하고 판단할 수 없는 병적 징후 혹은 증상)의 질병을 앓는 현대인의 왜곡된 초상과 대면케 한다.

이렇듯 김지현의 작업은 제도와 개인, 집단과 개별주체와의 관계에 맞춰져 있다. 이와 더불어 강요된 선택이 정체성 상실과 혼란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관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작품 <유니폼>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자잘한 인간군상이 모여 얼룩무늬 위장복으로 재구성된 이 작품은 마치 박제된 유물처럼 유리 케이스에 진열돼 있다. 이로써 제도가 다름 아닌 권력의 주체임을 증언하며, 이때 권력은 집단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군대, 감옥, 기숙사 등 개별주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특수사회(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서, 인간이 기계부품으로 비유되는 모던 타임스의 상황논리와도 통하는)를 미셀 푸코는 부재하는 장소, 없는 장소, 초월사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란 말로써 명명한 바 있다.
작가는 그 특수사회의 유니폼을 통해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그 연장선에 있는 현대사회(권력이 미시화된 현대사회에서의 개별주체는 오히려 전보다 더 억압적이고 고질적인 상황에 처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연루된 집단무의식과 집단공모에 의해 추동되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전체주의는 모든 건전한 제도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 제도의 형상으로부터 일말의 기념비적인 인상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이러한 관계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망치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타자다. 나의 머릿속은 온통 타자들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내가 모르는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한 비전들로 점령돼 있다. 두상(자잘한 인간군상이 모여 재구성된)과 실물 망치가 서로 마주 보게끔 배치하고, 이를 <망치다>라는 말로 명명한 것은 일견 말장난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선 이처럼 타자들에 점령당한 나머지 정작 부재하는 주체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뒤늦은 자의식의 표출이 엿보인다.
관계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 문제는 김지현의 작업을 지배하는 핵심논리다. 작가는 유학시절에 이미 이런 정체성 문제에 눈을 떴다. 각각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의 영어버전과 독일어버전, 그리고 문법이 틀린 영어를 매개로 한 퍼포먼스를 기록한 비디오 작품 로 촉발된 정체성 문제는 이후 제도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 그리고 마침내 타자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와 두려움을 내재화한 총알맨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적어도 외관상 전혀 쓸모가 없어져버린 기표(가부장적 유산인 남근과 피 흘리지 않는 전쟁에 자리를 내준 총알)를 관성 때문에 버리지도, 그렇다고 고수하지도 못한 채 허둥대는 총알맨이 연민을 자아낸다. 그 이면에선 실존주의에 연유한 존재론적 자의식과 함께 부조리의식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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