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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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완

작가 작품

땅의 기억 - 순환

1100x450x250 자연석, 브론즈, 투명폴리, 2005

땅의 기억-강위의 달(江上月)

250x350x1100 자연석, 대리석, 브론즈, 2005

사람 인

아크릴, 450x350x250mm6회 개인전

삼인행(三仁行)

acrylic 300x250x700mm, 2015

천지불인(天地不仁)

스테인레스 스틸 하이브러시우레단도장3000x1800x1000, 4회개인전(2009)

천지불인1

스테인레스 스틸 우레탄도장, 250x200x380mm, 4회 개인전

천지불인2(天地不仁)

스테인레스 스틸 하이브러시우레단도장 1300x1300x2000, 4회개인전(2009)

평면성 비판 - 천진불인

스테인레스 스틸, 한지배접, 아교포수, 분채, 250x220x400mm, 2019

평면성 비판3

아크릴, 한지배접, 아교포수, 1300x600x110mm, 2019

평면성 비판-숭고(The sublime)

스테인레스 스틸,한지배접,아교포수, 600x1000x2000mm, 7회 개인전(2019)

작가 프로필

◆ 학력
1997년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졸업
2006년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원 환경조형학과 졸업
2016년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입체미술전공 박사과정수료

◆ 현재
협성대학교 생활공간디자인학과 조교수

◆ 개인전
2004년 06월 1 회 개인전 (서울시립미술관)
2005년 08월 2 회 개인전 (모란갤러리)
2007년 02월 3 회 개인전 (일본 키타큐슈 서일본연합전시장)
2009년 04월 4 회 개인전 (서울 백송화랑- 초대전)
2012년 07월 5 회 개인전 (Danmark Kulturhuset - Bernhard)
2015년 04월 6 회 개인전 (코사 스페이스 갤러리)
2019년 10월 7 회 개인전 (서울 백송갤러리)

◆ 기획전 및 단체전
2009년 제15회 현대미술한일교류전 (한전프라자갤러리)
2011년 제17회 현대미술한일교류전 (공평아트센타)
2014년 KOREAN ATRSHOW IN MIAMI BEACH - SCOPE Miami Beach (백송화랑)
2016년 PLAS 2016 – 조형아트서울2016전 (COEX HALL) 외 다수

◆ 평택시, 오산시, 인천광역시 경관심의위원회 위원 (2016-현)
광진구, 중랑구, 금천구 도시디자인 심의위원 (2016 – 2019)
경기도 건축위원회 위원 (2016- 2019)
경기도 건축물 미술작품 심의 위원( 2016- 2019)
서울시 건축물 미술작품 심사위원 역임, (2007-2010)

작가 노트

				 입체적 공간연구를 통한 그린버그의 ‘평면성’ 비판연구
(Criticism of Greenberg's 'Flatness' through Three-dimensional Space Research)


일반적으로 비판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는 뜻으로 쓰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비판은 대상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능력들의 한계를 규정하여 가능태를 도출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본 전시는 현대 모더니즘 미술의 1940-50년대를 지배했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이론의 중요 개념인 ‘평면성(flatness)’에 대한 한계와 이후 가능성 및 전개방향을 통해 새로운 예술의 방향성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린버그는 새로운 미술의 아방가르드로서 회화의 독자성은 평면의 이차원성에서 나온다고 강조하였고, 회화의 순수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차원적 평면성은 관념적인 개념으로서 현실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개념이다. 캔버스의 표면에 붓으로 물감을 찍는 순간 회화는 더 이상 이차원이 아닌 삼차원에 존재하게 되며, 표면에 칠해진 물감은 하나의 입체로서 기능한다. 결국 회화의 평면은 그 안에 ‘공간으로서의 입체’를 내포하게 되며, 이는 하나의 ‘장소’로서의 서사를 가지게 된다. 시각예술이 숙명적으로 가지게 되는 -그것이 구상이던 추상이던- ‘공간의 환영’에 대한, 추상표현주의로 출발한 미국 모더니즘이 고민한 미학적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출연한 미니멀리즘의 여러 작품들이 입체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본인의 앞선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면에서의 미니멀리즘의 전개방식과 달리 환영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관계성의 단절과 예술작품을 ‘사물’로 환원하고자 한 미니멀리스트들의 시도는 공허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미술로서 입체성에 대해 막연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환영의 극복이라는 미국 모더니즘 회화의 내용적 명제에 매몰되어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미학에 대한 형식실험이라는 한계성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현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대한 동시대 예술작업에서의 대안은 오히려 그린버그와 추종자들에 의해 추상표현으로 분류되었던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같은 ‘숭고주의자’들에 의해 구현되었다. 형식이 아닌 주제를 지향한 이들의 주장은 오랜 기간 의도적으로 외면되었다. 왜냐하면 현대에 있어 진정한 금기는 오히려 ‘종교적 초월체험’ 내지는 ‘비과학적 관념’ 즉 ‘숭고체험’이기 때문이다.

앞서의 시각에서 평면성으로 대표되는 형식주의 미학에 대한 새로운 아방가르드적인 대안은 과연 무엇일까? 미국 모더니즘 기획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 ‘미니멀리즘’과 엘리트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팝아트’를 추상표현주의가 제기한 미술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수긍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그린버그의 ‘평면성’의 원리란 서구의 산업화와 대중문화시대가 낳은 물질 문화의 변화 속도를 비물질 문화가 따르지 못한 일종의 ‘문화지체(cultural lag)현상’일 지도 모른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를 넘어선 ‘초월적 체험’을 주장한 색면추상을 중심으로 다루어진, 오늘날의 새로운 미술의 대안으로서, 본인이 생각하는 ‘숭고체험’은 서구권에서는 이후 리오타르에 의해 미학적 논거로서 논의되었지만 실제 예술적 시도는 뉴먼과 로스코를 끝으로 더 이상 시도되지 않았다.

서구에서 단절된 숭고체험에 대한 작업은 아이러니하게도 환영주의적 전통이 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에서 문화변용(acculturation)의 형태로 시도되었는데 이것이 ‘단색화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모던아트를 대변하는 추상미술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어져온 자연을 모방하고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전통적 ‘환영주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독일 현대회화의 거장 파울 클레의 말처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고자 하는데 미술의 목적을 두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서구의 추상미술은 과거의 환영주의적 전통 속에서 배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단색화운동이 미국의 모더니즘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환영주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구상적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추상회화의 평평한 색면에서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거대한 물(事物)적 공간인 색면에서 그들은 동양의 전통적인 문인화의 여백( 餘白 , white space)에서 느껴지는 사의(寫意)적 공간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여백은 화면에 두루 퍼져있는 기의 표상이며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수법으로 종교적 이념, 즉 초월성을 표명하는 것으로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이는 서구에서 물적 공간이었던 평면이 동양에서 정신적 공간으로 변용되어 재해석되는 순간이기도 하며, 단색화는 이를 ‘정신적 초월성’과 ‘촉각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초월적 공간’으로 전이(轉移)된 가능태(Dynamis)으로서 ‘포스트 단색화(Post Dansaekhwa)’

매체이론의 예언자인 마샬 맥루언은 구테베르크 은하계의 종말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문자텍스트로 대표되는 시각중심문화의 종말과 다양한 감각들이 상호작용하는 열린 감각체계로의 ‘촉각’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에게 촉각이란 “감각들의 역동적인 통일” 즉 일종의 공감각을 말한다. 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그린비, 2012. p.147
그린버그의 미학적 물음인 평면성에 대한 대안적 시도로서 ‘단색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맥루언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글의 서두에 평면의 관념성과 입체성에 대한 언급을 하였지만 평면이란 개념은 문자 텍스트와 같이 지극히 시각 중심의 개념일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례인 원근법을 차치하고도 우리 눈은 공간을 입체적으로 보는듯해도 결국 대상을 평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대상을 입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오감의 총합인 촉각적 감각을 통해야 공감각적으로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립된 예로서 협의의 미술사가 아닌 지구 단위의 미술사적 관점에서 미술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20c는 미술이 평면에서 공간으로의 전이된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매체 시대는 공간의 무한한 확장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인간의 인지 영역 즉 정신적 공간의 확장이기도 하다.

빌렘 플루서는 원본과 시뮬라크르로서 현실과 가상의 차이는 단지 ‘해상도’의 차이일 뿐이며 현실과 허구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다가올 가상공간이라는 새로이 확장된 공간을 긍정하였다. 그의 주장을 근거로 평면에서 입체로 그리고 입체적 가상공간으로의 전이를 본다면 이러한 공간적 전이를 단순히 물적 공간의 전이로만 파악할 수 없고 새롭게 감각되어지는 ‘인지 공간-정신적 공간’으로서 ‘가상공간-초월적 공간’을 규정해야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색화의 전위성과 한계를 볼 수 있다. 단색화는 평면에서 입체로의 전환이라는 모던의 목표를 수행하여 이를 ‘촉각성’이라는 현실태로서 나타내었고, 포스트모던적 전환을 ‘정신적 초월’을 통한 극복으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형식에 있어서는 ‘촉각성-공감각’을 회화적 평면에 시각적으로 가둠으로써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추상표현주의가 ‘입체적 방식-물감을 화면에 묻히는 행위’로 평면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행위와 같은 한계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초월적 공간’에 맞는 새로운 표현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의 시작점은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최근 양자컴퓨터의 출현에서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지각방식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컴퓨터가 0과1의 교차를 통해 평면적으로 정보를 처리한다면 양자컴퓨터는 디지털 0과 1을 동시에 표현하는 '중첩' 원리와 양자의 동시 움직임을 의미하는 '얽힘' 성질을 이용한 병렬처리로 기존 슈퍼컴퓨터보다 수백만 배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지각방식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캠버스에서 파란색과 붉은색이 만나 혼합되어 보라색으로 바뀌는 현상을 보자. 평형공간에서 두 개 존재가 만나 새로운 존재로 변이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상실-부정해야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입체적 공간에서의 두 개의 존재의 만남은 굳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마치 두 개의 색유리를 겹쳐 새로운 색을 표현하듯이 ‘중첩’과 ‘얽힘’을 통해서 자기부정이 없이도 새로운 존재의 탄생이라는 확장성을 가질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앞서 단색화의 한계로 지적한 회화적 ‘평면성’에 갇혀진 ‘촉각성’이라는 공감각적 개념을 다면체의 공간구성으로 확장하여 해방시키는 동시에 한지의 배접이라는 전통적 방식을 통해 중첩과 얽힘이라는 개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일정한 크기의 한지를 풀을 이용하여 덧대는 배접 방식을 통해 ‘중첩’의 개념을 표현하였고, 작품의 표면을 그물 형태의 매트릭스 구조의 한지로 마감하여 ‘얽힘’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함과 동시에 촉각적 표현 방식을 구체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작품 표면의 매트릭스적 구조는 0과1의 무한한 반복과 중첩을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며, 무한한 공간의 확장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확장성을 표현한 표면의 모듈 구조는 서구의 캐논적 구조와는 사뭇 다른 형식성을 띠고 있다. 이집트부터 전래된 이상적 재현을 위한 격자형틀이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의 수학적 구조로서 규칙성을 나타내지만 본인의 작업에서의 표면형식은 다분히 우연적이며 양자적 확률성을 가진다. 그물형의 한지 조각들을 덧대거나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표면을 구성하다보면 표면의 모듈은 일정한 규칙성보다는 우연적이 조형의 흐름을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 (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늘은 넓은 것 같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라는 동양 특유의 공간개념과 가깝다.

한지라는 전통적 재료를 사용한 이유는 단색화의 작가들처럼 ‘한국적’이라는 정체성 내지는 지역성을 표현하기보다는 한지를 통해 고아한 정신적 공간(가상)을 표현하고자 한 동북아시아 예술의 조형의지라는 역사성의 차용이다. 서양에서 근대적 공간의 개념은 데카르트의 ‘연장’이라는 시공간의 이원론적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물질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간의 개념은 다분히 공시적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안에 서사적인 이야기가 내포된 정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공간을 물질적 개념인 동시에 정신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동양의 문화적인 토양은 지극히 현대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본인은 이러한 차용을 통해 새로운 인지공간으로의 진입을 위한 전제로서 ‘촉각적 정신성’을 작품에 나타내고자 하였다.

21c 디지털환경에서 가상성으로 대표되는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은 다시 말하지만 단순히 우리 현실세계를 가상공간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인지능력으로서 정신성의 확장 즉 ‘촉각적 정신성’이라는 개념으로 공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인이 이번 전시에서 제시하는 ‘포스트 단색화(Post Dansaekhwa)’가 완성된 현실태가 아닌 가능태인 이유이다.

결론
서양에서의 ‘평면성’이라는 개념이 내재하고 있는 관념적인 성격이 현실에서는 구현될 수 없고 입체적으로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개념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공간적 서사로서 정신성을 가진다는 역설을 가진다. 이러한 전제의 대안적 미술 실험이 실제적으로 전개가 된 것은 서구보다는 한국의 단색화라는 미술운동으로 동양에서 전개가 되었다. 그것의 이유는 서구에서 평면성이라는 개념이 형식실험으로서 재현의 전통에 반하는 실험으로 나타났다면, 오히려 환영주의적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색면추상에서 주장했던 초월성의 개념, 즉 ‘숭고’를 단색화에서는 동양적인 정신성으로 해석해 냈기에 하나의 대안으로서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단색화가 가지는 하나의 한계인 부분은 ‘촉각성’으로 대표되는 무한한 정신적 가능성으로서의 공간을 회화적인 평면에 가두어놓았다는 것이다.
본인의 이번 작업은 입체적인 면의 구성을 통해서 단색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초월적인 공간의 개념을 입체적인 공간속에서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시도로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시대에서 존재론적 의의를 가지는 것은 지구적 관점에서의 미술의 변화는 20c를 분기로 평면-시각중심-텍스트의 문화에서 촉각적-공간적-정신적 문화로 전이되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무한한 확장성을 내포한 ‘가상성’이라는 개념이 초월적 공간을 대표하는 예시라고 한다면 우리가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입장권은 무엇일까? 본인은 그것이 공간을 새롭게 인지할 수 있는 ‘촉각적 정신성’이라고 작품에서 주장하였다. 어쩌면 ‘촉각적 정신성’이야 말로 데카르트가 주장한 정신과 물질을 연결하는 진정한 송과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아직도 시작점에 선 가능태로서 ‘포스트 단색화’의 모습일 것이다.


- 2020.01.10. 작업노트에서


















Greetings

아직은 다양한 작업적 시도를 진행 중이라 내용이 조금 거칩니다. 하지만 하나씩 정리하면서 퍼즐을 맞추듯 작업과 사고를 일치시키는 과정이 주는 충만감 속에서 즐겁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즘 단색화에 대한 자료를 보고 있는데 앞글에서 말했듯이 그린버그의 ‘평면성’이라는 개념은 결국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그 자체로 이데아와 같은 관념성을 내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였으나 서구와 달리 환영주의적 전통이 약한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형식주의적 ‘평면’이 오히려 한국의 사의(寫意)적 전통과 만나면서 정신적인 작업으로 발전해가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접점을 입체적인 구조물을 통해 표현해 보는데 주안점을 두고 진행하였습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부족한 작업이지만 넓은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연구논문에서 발췌한거라 통상적인 기본 개념들은 인용표기를 제외한 점 양해바랍니다.

오늘날의 한국 미술시장의 상황은 60년대 팝아트가 유행하던 미국의 상황과 상당히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80-90년대 민중미술에서 주장하던 민중과의 소통과 계몽은 대중과의 인터렉티브한 교류로 전환되었습니다. 또한 미술의 형식면에서도 다양한 융합이 시도가 되고 있고 이러한 중심에는 팝아트적인 형식과 미학이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발전과 함께 디지털시대로의 전환기를 넘어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 환경 속에서 팝아트는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들은 또한 미디어를 통한 대중문화와의 영합을 통해 지나친 상업주의와 배금주의로 흐르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아도르노는 일찍이 이러한 현상을 문화산업이라는 말로 빗대어 문화예술이 상업화되는 현상을 풍자하였고 오늘날 대중문화와 팝아트에서 이야기하는 소통이 진정한 자신과 타자의 진솔한 대화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는 날로 어려워지는 한국 미술시장의 경제적인 여건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 환경에 대한 예술적 시도들에서도 가상이라는 공간의 본질보다는 현상이나 기술적 진보를 다루는 부분에 편중되어 있는 듯한 아쉬움을 느낍니다.

본인은 이러한 한국 미술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본인의 작품 연구를 통해 ‘미술의 존재론적 물음’과 ‘관객과의 새로운 소통방식’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에 대해 나름의 답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작품의 중요한 키워드인 ‘포스트 단색화’의 명칭은 백송화랑 백동열 관장님과 작업에 대한 논의를 하던 중 작업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끝에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론부를 고민하면서 얻게 된 ‘초월적 공간’에 대한 개념정리를 조언해주신 이웅배 교수님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 외 언급하면 오히려 부끄러워하실 모든 분들에게 조용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직은 정리하지 못한 리오타르의 숭고의 개념은 숙제로 남기며.

2019. 10. 23 백송에서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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