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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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명규

작가 작품

담양군 창평면 상징탑

목포하당 롯데시네마

부산 명지지구 미술작품

장성 조각공원-서재필 시비

코오롱하늘채 특화장식품 外

개인전

2014. 12.15 - 01.15 광주

집단창작촌 프로젝트

작가 프로필

학 력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New York University 대학원 졸업
조선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 12회
2014 Erehwon 호선갤러리, 광주
2012 The arts as physical endurance, 무등갤러리, 광주
2011 동상이몽, 갤러리 Light, 서울 외 9회
단체초대전
1997 - 2002 입체그룹 PASS
2000 - 2001 그룹 점.선.면 전
2001 - 2019 광장조각회 전
2001 - 2018 21c 정신전
2005 - 2009 환경미술협회전
2001 - 2013 소리와 그림전
2005 - 2018 백학조각회전
2004 - 2019 그룹새벽전
2002 - 2017 에뽀끄전
부산비엔날레 그 외 다수 국내외 그룹전 180여회
작품소장
광주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부산 천마산 조각공원
장성호 문화예술공원
담양군 창평 슬로우시티 상징조형물
목포시 하당 롯데시네마 조형물
광주수완지구 코오롱 하늘채 아파트
나주혁신도시 중흥S클래스 미술작품
부산명지지구 중흥S클래스 미술작품
경기 동탄 중흥S클래스 미술작품 外 다수
수상
1992전국무등미술대전 대상
2003하정웅 청년작가상
2004제10회 광주미술상
2014 부산.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심사위원
2015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제 6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자문위원 역임
현재
조각그룹광장, 21c정신전, 입체그룹PASS, 그룹 점.선.면, 사)에뽀끄회, 그룹새벽,
백학조각회, 광주미술협회, 전국조각가협회원, 광주교육대학교 출강

작가 노트

				에레혼(Erehwon)전에 부쳐…….
김병헌

나명규 작가의 작품들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이번 전시의 제목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시다시피 에레혼이란 말은 영국 소설가인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1835-1902)가 1872년에 익명으로 내놓은 소설의 제목에서 온 것이다. 버틀러가 자신이 살던 빅토리아 시기의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쓴 이 소설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의 ‘nowhere’에서 ‘w’와 ‘h’만 바꾸어 철자를 거꾸로 뒤집은 말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유토피아(utopia)와 같은 뜻을 갖는 것이라 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질병을 죄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범죄자로 취급하며, 기계를 잠재적인 위험물로 인식하여 오래 전에 기계를 없애버리는 등 일반적인 유토피아로서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어서 제목과 내용이 상반되는 일종의 이중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나명규 작가의 작업들 역시, 물론 소설과의 차이는 있지만, 거대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중성들과 관계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동상이몽>전에서처럼 변화와 정체, 안과 밖, 낮과 밤, 자연과 도시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면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문제들을 폭넓게 작업을 해왔다. 때로는 보다 직접적으로 그와 같은 사회와 자신의 신체(body)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주목하여 매일 바뀌는 환경에 변화하는 자신의 몸을 작품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띠를 나타내는 양을 소재로 설치를 하기도 하며 자신이 다녀온 여행지 등을 영상에 담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가 항상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주로 자신의 신체를 테마로 작업을 해왔다는 점에 있어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명인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1908-1961)를 떠올리게 한다. 실존주의적 사고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퐁티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와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신체의 현상학을 다루는 그에게 신체란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자 가장 구체적인 실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체와 사고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인식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고는 머리에서 하고 감각은 오관에서 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는 신체 자체가 사고의 주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잔느(P. Cézanne, 1839-1906)의 ‘눈으로 생각하라’라는 말처럼 철학이란 머릿속에서 구성되기 이전의 신체의 세계를 파악하여 기술하는 것이라고 보며 따라서 학문 내지 과학을 반대한다. 그는 과학이 개입하기 이전의 사물과 인간의 구별이 안 되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즉 신체의 세계를 미술이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퐁티의 신체의 현상학과 나명규 작가의 신체가, 일부 비슷한 면도 있겠지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명규의 작업이 세잔느가 추구하는 그와 같은 사물과 맨 처음 접촉했을 때의 오관이 구별되기 이전의 눈과 귀와 코 등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그러한 신체의 세계는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는 퐁티에게 영향을 주고 실존철학의 근거를 마련했던 독일의 철학자 하이덱거(M. Heidegger, 1889-1976)의 사상에서 나명규의 작업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고 보인다. 하이덱거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존재(Sein, Being)일 것이다. 그는 이전 서구의 전통적인 철학에서 존재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전통적인 존재론들이 간과해왔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란 ‘존재자(beings)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자란 우리 주변의 돌, 나무, 책, 핸드폰 등의 사물뿐만 아니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같은 사람 등 모든 있는 것들을 일컫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한다면 ‘존재란 어떤 하나의 존재자와 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의미와 관계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존재를 파악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로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존재자와 달리 인간만이 이와 같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한다고 하이덱거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를 그는 현존재(Dasein)라 부르는 것이다.
나명규 작가의 작업들은 하이덱거가 가리키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라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해왔던 작업들처럼 우리는 그를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가장 큰 문젯거리로 삼는 그러한 태도를 지닌다는 점에 있어서, 하이덱거가 말하는, 실존(Existence)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물음들의 형식에 있어서도 영상, 사진, 조각, 설치 등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매체들을 총동원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 있어서 오늘날처럼 복잡다단한 거대한 사회에서의, 즉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 더 이상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상실하며 살아가는 비본래적인 실존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과 한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파악하고서 그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본래적인 실존으로 되돌아가고자 함을 엿볼 수 있다. 나명규 작가의 작업노트의 일부로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언젠가 TV에서 본 푸른 초원의 평온한 듯 한 양의 모습은 불현듯 차갑고 비장한 도시 속에 살고 있는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음을 느꼈다. 양 특유의 평온한 모습이지만 민감하고 놀라면 민첩해지는 특성은 나와 동일시하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나의 작업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렇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번 작업이 내 목소리로 내 생각을 세상으로 크게 울려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작업노트 中

평론


                                        
선(禪) 수행의 지침서중 십우도(十牛圖)라는 것이 있다. 수행자가 추구하는 본래면목을 ‘소’로 상징하고 그를 찾아나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열 단계의 그림으로 표현한 이 고전적인 텍스트는 비단 선 수행뿐만이 아니라 세속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그 비유의 적절성이 돋보인다. 처음 목동으로 등장하는 수행자는 소를 찾아 온 산을 헤매다 소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소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며, 그 다음 소를 목격하고 마침내 소를 잡게 되지만 그 소는 아직 목동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오랜 노력 끝에 소를 길들여 등에 타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어느 순간 소도 사람도 사라지고 그야말로 텅 빈 허공이 되었다가. 다시 화면엔 꽃피고 새우는 세상의 자연스런 일상이 펼쳐진다. 결국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망상의 티끌을 말끔히 걷어내고 눈앞의 일상에 명백히 한 몸이 되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진정한 실존을 경험하는 일임을 이 책은 상징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예술이 인간이 이룩한 정신적인 발달사라 한다면 그 역사는 독특한 감성의 소유자들인 예술가들이 그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실존의 문제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도전했던 궤적들이 아닌가싶다. 대개 알려져 있듯 20세기의 벽두 서양의 격변기에 기존의 철학과 종교적 규범이 도전받으면서 예술가들은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려 존재를 파괴했던 사실이 있다. 그 이후 거의 백년이 지났지만 예술은 아직 존재라는 개념의 유령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나명규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신체적’이란 개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초기 현대미술속의 Body Art의 개념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위적 활동기에 행해졌던 바디아트가 표현행위의 다변화와 기존 예술개념에 대한 저항, 사회적 센세이셔널리즘등을 표방하였다면 나명규의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신체는 좀더 사색적이며 수행(修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90년대 중반,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세상의 한복판 뉴욕에서 처음 누구나처럼 심한 문화적 충돌을 경험했던 것 같다. 초기 파라핀을 주조한 가족의 신체작품들에서는 마치 예술의 근본에 대한 질문과 아울러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피부적으로 실감하려는 시도를 한 것 같아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이는 예술적 행위 이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확인하려는 그의 수행자적인 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후 그는 적극적으로 자아와 환경, 작가와 관객, 소통과 단절, 예술과 현실, 인간 속성의 문제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하면서 그가 인식하는 세상과의 다양한 교감을 위해 노력하였고 기존의 관념적 미술환경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그는 작업을 위해 매우 다양한 매체와 재료들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가 비록 조각을 전공했으나 전통적 개념의 조각적 텍스츄어와는 이미 결별했음을 뜻한다. 그는 허리에 잔뜩 연장을 차고 다니는 장인이기보다는 그가 만나는 세상의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간섭자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무거운 연장대신에 자유로운 정신으로 소요하면서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만나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약간의 뒤섞음이나 반전이나 비틀림의 요소로 사람들의 타성적 일상에 일침을 가하거나 그들이 잃어버린 줄도 모르던 본래적인 삶의 모습들을 새삼 일깨우는 소명을 그 자신 삶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듯 하다. 최근의 작업들에서 그는 마치 다이어리를 펼쳐보이듯 단편적인 이야기 상자들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일상적이거나 혹은 세상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관조적이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서 나는 그가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과 화해하며 경직된 표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의 경지처럼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 생명의 나눔과 관심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임을 작가 스스로 체득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아직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별 내색 없이 작업에 대한 열정의 끈을 추호도 놓지 않는 그가 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이 결코 거짓으로 꾸며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2004년 8월 김 인 경

조각가 조선대 교수


신체(body) 개념을 통해본 나명규의 작품세계

현대미술에 있어서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 크게 반영되기 마련이다. 나명규는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활용과 실험을 통해 그 자신만의 조형적 언어를 창출하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 대부분은 신체(body)의 개념이 등장한다.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에 신체에 대한 개념은 줄곧 등장해오고 있다. 그 표현방법은 다음과 같다. 작품 속의 전통적인 구상적 형태로서의 body, 움직임의 자취인 흔적으로서의 body,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자신의 신체적 역할,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 신체의 역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20세기 초 이전까지의 전통적 서구 회화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철학의 이상을 구현했으며, 이후 데카르트 관점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현대미술의 출발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회화를 신체에 대한 단순하고 고정된 객관적 형상으로서의 재현으로 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 것이다. 신체(body)의 개념은 이젠 기억과 경험, 소망, 전환, 초월, 변동, 다원성으로 묘사되고 시각적 문화 안에서 body의 개념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롭게 재생산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나명규의 작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명규 작품의 신체 개념은 데카르트적인 재현 대상으로서의 신체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20세기 초반에, 전위예술의 형태로서 기존 예술에 대한 저항의 관점에 등장하였던 바디아트(Body Art)의 관점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나명규가 신체에 관심을 갖고 직접 작품제작을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의 유학시절이었다. 작가 자신과 그의 가족이 뉴욕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을 테스트한 실험적 작품인 파라핀을 주조한 가족의 신체작품 <육체적 내구성에 관한 테스트>였다. 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신의 신체를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신체가 표현의 매개자가 되어 자신의 몸짓, 자세 등의 자발적 요소를 표현했다. 7회 개인전 서문 발췌
김민경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나명규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신체적’이란 개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초기 현대미술
속의 Body Art의 개념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위적 활동기에 행해졌던 바디아트가 표현행위의 다변화와 기존 예술개념에 대한 저항, 사회적 센세이셔널리즘등을 표방하였다면 나명규의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신체는 좀더 사색적이며 수행(修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90년대 중반,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세상의 한복판 뉴욕에서 처음 누구나처럼 심한 문화적 충돌을 경험했던 것 같다. 초기 파라핀을 주조한 가족의 신체작품들에서는 마치 예술의 근본에 대한 질문과 아울러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피부적으로 실감하려는 시도를 한 것 같아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이는 예술적 행위 이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확인하려는 그의 수행자적인 의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후 그는 적극적으로 자아와 환경, 작가와 관객, 소통과 단절, 예술과 현실, 인간 속성의 문제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하면서 그가 인식하는 세상과의 다양한 교감을 위해 노력하였고 기존의 관념적 미술환경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그는 작업을 위해 매우 다양한 매체와 재료들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가 비록 조각을 전공했으나 전통적 개념의 조각적 텍스츄어와는 이미 결별했음을 뜻한다. 그는 허리에 잔뜩 연장을 차고 다니는 장인이기보다는 그가 만나는 세상의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간섭자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5회 개인전 서문 발췌
2004년 8월 김인경 조각가 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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