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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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준진

작가 작품

거북이 오석

250x180x250mm

거북이 오석

600x300x300mm

고슴도치 임페리얼브라운

350x250x350mm

숲속정원-고양이

380x170x390mm 오석

숲속정원-부엉이

250x150x350mm 오석

숲속정원-새

770x500x700mm 오석

숲속정원-카멜레온

300x90x480mm 오석

숲속정원-코끼리

320x150x630mm 오석

자연을그리다

화강석, 오석 800x200x1600mm

자연을그리다

화강석,오석 600x250x1550mm

강을건너는거북이

화강석, 10000x5000x2500mm

강을건너는거북이

화강석, 가변설치

달과토끼

화강석,스텐,브론즈,우레탄도색 , 7000x6000x5000mm

도토리동산

화강석,스텐레스스틸,브론즈 6000x5000x5000mm

수달의꿈

화강석, 10000x5000x2500mm

작가 프로필

함창고등학교 졸업
전주대학교 미술학과 조소전공 졸업
성신여자대학교 조형대학원 조소과 졸업
2006 제1회 개인전 (우림갤러리)
2010 제2회 개인전 (관훈갤러리)
2011 제3회 개인전 (인사아트센터)
2012 제4회 개인전 (아트스패이스H)
2017 제5회 개인전 (아트스패이스H)
단체전
2020 양평 청년미술의 오늘 THE ART POWER (양평군립미술관)
문경코로나19기부전 (공유아트갤러리)
조형아트서울 (코엑스)
2019 탈리스만전 (아타비타갤러리)
특별한전 (정수아트센터)
한국국제조각페스타 (예술의 전당)
아리랑전 (문경 시민회관)
양평 신화전 (양평군립미술관)
당인리발전소 개관전 (당인리발전소)
해태 견생전 (여주 강천섬)
양평청년 작가전 (양평종합운동장)
THE PERFUMES `향수` 야외설치미술(양평군립미술관)
조형아트서울 (코엑스)
경남국제아트페어(창원컨벤션)
아트부산 (벡스코)
한국미술협회전 (양평군립미술관)
성남조각회전 (앤갤러리)
FTA전시(양평문화원)
하우징브랜드페어 (코엑스)
삶이야기조각전 (앤갤러리)
2018 삶이야기조각전 (갤러리M)
춘천mbc야외조각전 (춘천mbc광장)
붉은스틸만전 (아트스패이스H)
부산조각가협회전 초대작가
성남조각회전 (성남아트센터)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아리랑전 (문경 시민회관)
고양조각회전초대작가(호수공원)
한국국제조각페스타 (예술의 전당)
조형아트서울 (코엑스)
장흥아트벨리(BH갤러리&까페)야외조각전
전자에 감성을더하다 (수원삼성야외광장)
해태떼조각전 (코엑스)
핑크아트페어 (인터컨티네탈호텔)
2017 위드아트페어 (인터콘티넨탈호텔)
조형아트서울 (코엑스)
성남조각회전 (암웨이갤러리)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Now&Forever초대전 (Far Beyond 갤러리)
세미원 야외전시 (양평 세미원)
돌로생각하다 (일호갤러리)
삶이야기 마르뗄로 전시 (빨간벽돌 갤러리)
해태 중랑구 야외조각전 (중랑구체육 공원)
해태 노원구 야외조각전 (북서울시립미술관 공원)
베어트리파트 기획초대전
핑크아트페어 (인터컨티네탈호텔)
아리랑전 (문경 시민회관)
밀양예술회관 개관기념전 (밀양예술회관)
2016 해태 종로구 야외조각전 (마로니에공원)
KOREA SCULPTURE 5人展(동경, 석천화랑)
춘천mbc야외조각전 (춘천mbc광장)
성남조각회전 (암웨이갤러리)
한국조각가협회 제주 교류 초청전 (제주문예회관)
한국국제조각페스타 (예술의 전당)
국회아트페스티발 (국회야외마당)
삶-이야기전 (세미원야외광장)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아트부산 (부산 벡스코)
조형아트 (코엑스)
돌로생각하다 (일호갤러리)
서른들의 다른이야기 (전주 소리문화의전당)
성남조각회전 (코사갤러리)
행복나눔전 (아트스페이스 H)
전주조각회전 (인사아트센터)
2015 싱가포르뱅크아트페어 (싱가포르Pan pacific hatel)
행복나눔전 (아트스페이스 H)
세계군인체육대회 야외조각전 (문경시청앞중앙분리대)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돌로생각하다 (일호갤러리)
춘천mbc야외조각전
성남조각회전 (암웨이갤러리)
2014 행복나눔전 (아트스페이스 H)
싱가포르뱅크아트페어 (싱가포르Pan pacific hatel)
수원정자동교좌성당 (교좌동성당)
여수국제아트페스티발
발리나무조각프로젝트 (AP갤러리)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미술시장과 100개의미술 (갤러리엘르)
이포갤러리 (경기도여주)
개군산수유축제 야외조각전
돌로생각하다 (일호갤러리)
2013 붉은수수밭사이로 (중국북격쑨좡예술구-경(鏡)갤러리)
홍콩뱅크아트페어 (홍콩 HOTEL)
한탄강 흐름전 (전곡리선사유적지)
삶이야기전 (청작화랑)
단원미술대전 우수상
낙동강유역 조형물설치전 (영주아트파크광장)
2012 부천현대조각회전 (복사골문화센터)
제주도 삼달리 레지던시 프로그램 (곳간 쉼)
레고레타 그의공간을품다(제주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위킴스 조각전
서울모던아트쇼 (AT 센터)
중국청도 서울조각공원 심포지움 (중국청도)
2011 4인석조각전(인사아트센터)
돌이야기전 -돌의 맛과멋 (스페이스H갤러리)
중국 칭다오현대미술 아트페어(중국청도)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새로운지평-평창동계올림픽전(코사갤러리,아트유저)
하이쿠 대만전시 (국립대만예술대학교)
진경의 맥-영남의 청년작가 (포항시립미술관)
울진문경미술교류전 (문경시민회관)
2010 조각의산책 (힐튼호텔)
삶이야기전 (아이갤러리)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꿈꾸는돌 (군포sk벤티움)
울진문경미술교류전(울진청소년수련관)
2009 한국미술협회전 문경지부 (문경시민회관)
부천현대조각회전 (부천시청갤러리)
2008 부천현대조각회전(부천시청광장)
동산전 (상주시민문화회관)
stone road (한갤러리)
삶 이야기전 (수갤러리)
꿈꾸는돌 (안양롯데백화점)
동두천 전 (동두천 시민화관)
백화점 속 동물원 (신세계 갤러리 인천점, 광주점)
중국 하얼빈 빙등제 조각 (중국 하얼빈 조린공원)
2007 한국-터키 수교50주년 기념전 (터키 이스탄불)
한국-터키 현대미술의 단면전 (당림 미술관)
분지의 바람전 (대구)
전주조각회전 (전주 푸른 안과)
상주낙동강 설치미술제 (상주 후천교 주변일대)
부천현대조각회전 (부천시청로비)
동감전 (규브갤러리)
전展시장 그리고 轉시장 (상봉 영업소)
전展시장 그리고 轉시장 (용현 영업소)
돌에 피어나는 삶 (서울 동대문 구청 광장)
함창고 동문전 (상주 문화회관)
2030기획전 (바움 갤러리)
중국 하얼빈 빙등제 조각 (중국 하얼빈 조린공원)

2006 중국 국제 아트 페스티발 (중국 위해시)
대한민국 청년미술제 (세종문화회관)
전주조각회전 (전북예술회관)
석조10인전 (연동교회)
브레이크&브레이크 (한 갤러리)
한국 구상조각대전 (성남 문화 센터)

2005 포항 아트 페스티발 -빛으로 미래로-
서울 청년작가 초대전 (서울 청년 비엔날레)
서울 리빙 아트 엑스포 (서울 무역 센타)
홍익 야외조각대전 (조치원 캠퍼스)
도시환경과 조형예술의 탐색
2004 한국석조각의 흐름전 (도올 갤러리)
돌의 숨결전 (삼청각 야외 공간)
5인전 (올 갤러리)
전주조각회전 (전주예술회관)
함께여는 아침전 (목암 미술관)
2003 벽돌로 부터의 확장 (인사문화마당)
삶-이야기전 (청작화랑)
도거리회전 (이브갤러리)
전주 조각회전 (전주 예술회관)
2002 신진작가 발언전 (예술의 전당)
성신대학원전 (종로 갤러리)
강화 종합 예술회관 개관기념전 (강화 종합예술회관)
전주 조각회전 (전주예술회관)
전북 우수 졸업생전 (전주 시청앞 광장)



* 경남대학교 강사역임 , 성신여자대학교 강사 역임

작가 노트

								

평론


                    달에 살고 있는 토끼

벽을 물끄러미 보노라면, 벽지에 새겨진 온갖 무늬들이 구름처럼 갖가지 모양으로 바뀌는 것을 겪을 수 있다. 처음에 그것은 어떤 특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니다. 보는 이의 눈이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가 본 것들이 역사와 문화에 의한 세뇌 효과로 나타난 것이라 해도 자연스럽게 겪을 수 있는 형상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눈은 머릿속에 겪은 만큼의 형상을 새겨 놓고, 밖으로 던질 때마다 이런 방법, 저런 각도로 뒤섞어서 우연한 모양을 다시 감각한다. 마치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지구처럼, 우주처럼 커질 때까지 끈질기게 점을 응시하며 자기 세계의 어떤 모양들을 잇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은 특별한 모양을 만드는 형태소가 될 수 있다.
형태를 깊이 살피는 사람들 중에서 그 형태들이 본디 가지고 있던 형질을 가볍게 다루는 사람은 없다. 형상을 넓게 더듬은 사람들 중에서 그 모양의 원천이나 다양한 변형 가능성을 살피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모양에 대한 갖가지 경험과 이것을 연구하고 사례집을 만들어 기정사실화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상상력보다는 연상력에 기댄 이야기로 문제를 풀어간다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이 그랬고, 서양의 현대가 그랬듯이, 형상과 생각의 관계는 문화를 짜는 중요한 갈래의 하나이다. 그로부터 예술이 나눠지고, 예술가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예술가는 눈에 보이도록 형태를 만들거나 눈에 보이는 형태를 다른 모양으로 보이도록 하는 존재가 아닌가. 악마를 물리치는 데에 필요한 형태나, 착한 존재를 구현하기 위한 형태는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예술가는 연상력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존재라 할 만하다. 거꾸로 보면 어떤 예술가도 연상력의 풍부한 자극을 피하기 어렵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추리할 수 있는 능력의 크고 작음을 따지기에 앞서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게 연상이라면, 연상한다는 것은 예술의 기초적인 단계이자 표현의 첫 걸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이따금씩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데에 필요한 분야로서, 손꼽는 현상학적인 생각들을 따질 때 생긴다. 머릿속에서 밖으로 나와 사물과 형상들에 부딪고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모양과 생각, 그리고 머릿속에 없었지만 밖으로부터 들어와 생기는 새로운 모양과 생각들은 주로 현상학의 투사에서 다루는 방식인데, 이것이 연상과 밀접하다. 여기서 밖으로부터 침투하여 생기는 모양이나 생각들조차, 주체(사람)의 경험을 잣대로 하여 만들었음을 문제 삼는다. 노준진의 조각품이 세상의 문제의식을 껴안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이러한 방향에서 볼 필요는 있다. 그의 형상들은 그의 어떤 경험들과 연관된 것이다.

조각가는 짜임새나 생김새를 끄집어내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들의 시간은 곧 노동의 시간이다. 망치를 들고, 용접을 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계획한 짜임새와 생김새를 드러내는 데에 충분한 노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예술 행위는 상상력보다 연상력을 펼치는 과정과 아주 가깝다. 수리적인 훈련이나 디자인의 감각을 꾸준히 기르는 것도 관계가 깊다.
물론 이것을 알았더라도 이것만으로 조각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보는 것만으로 끝내기 아쉬운 미련이 조각품에서는 더욱 특별하다. 쪼고 깎은 돌이나 나무가 거기 발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감상의 여분을 채우기는 더욱 어렵다. 작업복을 여미고, 신발 끈을 단단히 묶으며, 입마개를 챙긴 뒤, 그의 팔뚝에 불끈거리는 힘줄이 꿈틀거릴 즈음의 조각가를 연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전시장에 놓인 조각품의 얌전한 분위기 때문이다. 만일 조각품에서, 돌가루와 톱밥으로 머리카락의 뿌리까지 하얗게 바랜 조각가의 그을린 표정과 살갗을 읽었더라도 조각가가 선택한 재료들에 대한 관심이 모자라면 보는 이의 눈은 조각품 속에 담긴 것을 찾아내기 어렵다.
노준진의 조각품을 보고, 노준진이 선택한 재료, 노준진이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다. 이러한 생각은 감상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그가 연상 훈련에 땀 흘렸다는 사실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그 역시 조각품의 분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재료를 왜 선택하였고, 그로부터 무엇을 만들고자 하였는지에 관한 사실은 조금 더 차분하게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가 젊다는 사실은 보는 이를 안심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조각품들이 많은 구설수에 오른다 해도 전시는 유쾌한 경험이 될 것이다. 보는 이들은 그의 조각품을 본 대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노준진은 동물 형상으로 끝을 볼 생각이 없다. 앞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동물들이 그의 머리와 마음, 눈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주마등에 비춘 세상처럼 온갖 사물과 형상의 하나일 뿐이다. 그가 주재료로 쓴 오석에 대한 가치도, 지금 발견한 형상들에 알맞기에 선택한 재료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보는 이들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가 선택한 오석의 이름값이나 특성이 그가 만든 모양들의 생김새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산뜻한 느낌 정도의 이야기는 가능하다. 자연의 돌과 형상의 어울림을 자연스럽게 느낀다면, 노준진이 많은 돌들과 뒹굴었기에 자유로운 재료 선택을 하였다는 유추도 가능하다.
노준진은 자연성을 찾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가 말하는 자연성의 개념이 얼마만한 크기로, 얼마마한 너비로 짜인 것인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가 찾는 자연성이 막연한 것이라도 문제될 것은 없으니 굳이 따질 일은 아니다. 그가 자연성을 찾는 작업에 평생을 바친다면 그때 다시 따져도 될 일이다. 오늘 그의 방향들과 그가 낼 많은 결론들은 다른 낱말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본 작품이 달팽이였고, 그 다음 작품이 거북이였다. 두 조각품이 눈에 선뜻 들어온 것은 달팽이와 거북이의 등에 달린 돌의 무게가 무척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흔한 소설이나 시구에서 읽은 삶의 애틋함이 느껴졌다고 보아도 맞는 말이다. 자연의 돌로부터 다듬은 형상들이 자유롭기는커녕 오히려 자연의 돌에 깔려 움직임조차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에 선뜻 들어온 그 형상들을 다시 보니, 달팽이와 거북이는 그런 존재들이다. 무겁고 느린 걸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깃거리이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이것이 그가 찾은 자연성의 성과일 듯하다.
노준진의 조각품을 모두 모아 놓고 보면, 무거운 돌에 깔린 것 같은 형상들과 달리 날아갈 것처럼 경쾌한 형상들도 여럿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그가 생각하는 자연성이 만일 여러 형상들이 가진 성격의 어울림에서 오는 것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낱낱이 보면 자연의 돌에서 얻은 형상들은 인공적인 자연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말하는 자연성은 결코 실현할 수 없다. 그가 면벽수도승처럼 자연의 돌을 마주하고 한낱 점에서 세상을 보듯이 자신을 덮친 형상을 찾은 것이라면, 그 또한 자연의 영감이 아니라 그가 겪고 그의 머리와 마음에 새긴 세계의 방향성이 이끈 결과라 하는 게 맞다. 이러한 생각을 부추기는 중요한 계기는 하마를 만드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 있다. 물에 있든, 땅에 있든 보는 이의 눈에 그것은 느릿하게 헤엄치는 풍경이자, 공간의 느낌으로 다가선다. 땅에 박혀있는 것이라 해도 그 모습은 홍세섭의 오리 그림과 같은 움직임을 갖고 있으니 풍경이나 공간을 느낄 요소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물에 젖은 오석의 빛깔이 주는 느낌을, 돌가루에 묻혀 있는 하마, 수달, 그리고 달팽이에게서 더 진하게 느낀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시각과 지각의 반응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노준진의 조각 과정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조각품들이 어떻게 어떤 생김새로 놓여 있든 그 결과의 재미는, 그가 자연의 돌에서 끄집어낸 형상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재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시지각의 반응과 형상의 관계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노준진이 갈고 닦은 모양들이 뿜어내는 평화로운 자연 환경의 느낌들은 그의 형상들을 만듦이 아니라 태어남에 비유해도 허락할 것이다.
두 팔을 크게 벌려도 다 껴안을 수 없는 바위, 빛깔과 성질이 다른 여러 돌들이 그의 과제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지만, 거칠어지기 시작한 살갗만큼 조각 행위의 재미가 깊어지는 것을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느긋해진다. 어떤 동물이 놓여 있고, 어떤 형상이 전시장에서 뛰어놀고 있는지 하나하나의 이름을 헤아리는 것은 보는 이들의 관심거리 중 하나이니, 이 글에서 그것까지 두루 새기지는 않겠다. 그 동물들이 필연적인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자연을 닮은 인공적인 생김새들 속에서 그가 좇은 자연성이 어떻게 풍기는가이다. 이 모든 게 문제가 아니라면, 의인화한 자연성일지라도 그의 마음이 가꾼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노준진의 작업에 관한 여지는, ‘자연을 겨냥하고 자연의 돌에서 툭 튀어나온 무엇을 발견하여 형상을 만들었다’는 그의 이야기와 그가 자신의 목표에 의해 쉬이 지치지는 않을 것이란 인상에서 찾았다. 잔뜩 긴장한 그의 힘줄과 팔뚝도 그것을 아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그가 전시를 통하여 발견할지도 모를 자연성의 위배라는 모순과 전시장에 나온 형상들의 꿈틀거림이 그를 어떻게 몰아붙일지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 노준진의 조각품들이 야생을 위한 자연성을 담았거나 숲에서 발견한 발자국을 좇는 게 아니어도 좋겠다는 생각은 재미있는 감상에서 얻을 일이다. 그의 작업은 구름이 만든 형상이 아니라,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바뀌는 형상들을 좇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고 말하고 있을 때, 그는 달 표면에 방아를 찧는 토끼를 새길 것이다. 그가 새긴 방아 찧는 토끼의 생김새가 그의 모든 가능성을 막았다면, 그것을 해결할 사람은 그 자신뿐이다.

이기만 / 평론가, 성균관대학교


순수한 돌
웃는 돌
명상하는 돌
- 노준진의 석조각 읽기


김종길 | 미술평론가


인류가 최초의 조각적 행위를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다. 구석기인들의 석기문화는 그것이 다소 거칠고 문명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할지 모르나 사실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매력적이다. 그들은 ‘두리새김’과 ‘돋을새김’의 조각 형식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조각은 회화에도 적용되어 생동감이 넘치는 벽화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때의 조각은 동물형상이나 인체가 주를 이뤘다. 돋을새김이후에는 선영線影의 날씬한 조각이 나타났고 그것은 선화線畵로 발전되었다.
수 만 년 전의 예술가들은 동물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새겨 넣음으로써 사실주의에 도달했다. 그들의 사실주의는 현재와 같은 미적인 경향이나 개념이 아니다. 원시 벽화와 조각을 연구했던 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주술적인 맥락에서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거나 형이상학적인 어떤 상징물로 해석되는 ‘사실성’이다. 그러므로 구석기인들이 만든 동물형상의 사실적 표현은 단순히 어떤 동물에 대한 재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동물들은 그들의 토템totem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애니미즘animism적인 종교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준진의 조각은 인류가 오랫동안 수행해 왔던 조각의 원초적인 미술행위를 느끼게 한다. 구석기인들이 돌을 만지고 다듬으면서 돌의 생명력을 예지했던 마음과 큰 차이도 발견하기 힘들다. 오래전의 인류는 돌을 돌로 다뤘던 것이 아니고 ‘돌’이라는 응결된 자연성을 채굴하려 했다. 그들이 돌에 하나의 선을 긋는 순간은 돌에 갇힌 지구의 혹은 우주의 숨결을 트는 행위였을 것이다. 노준진이 돌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조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딱딱한 물성의 돌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돌은 돌이 탄생한 순간으로부터 지금 여기에 이르는 시간까지 수많은 시간의 결을 품에 안았다. 아름다운 사계와 숲, 바람, 계곡, 강의 세찬 물결, 해와 달, 그리고 온갖 짐승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 돌은 무수한 시간을 구르면서 자신의 육체를 달구질하지 않았겠는가! 노준진이 추구하는 돌조각도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돌이라는 자연, 돌이라는 자연의 얼굴, 돌이라는 그 실체적 영성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돌의 자연성을 쉽게 토템이나 애니미즘으로 부르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의 조각이 원시 조각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돌에서 신비한 종교성이 아닌 하나의 조각적 덩어리로서 돌에 내재된 자연의 형상성을 찾는데 주력해 왔다.

그는 조각을 하기 전의 순수한 돌을 바라본다. ‘순수한 돌’은 아무 것도 없는 돌 그 자체의 형상이지만 조각가에게 그것은 모든 형상을 담지한 돌이기도 하다. 돌이 어떤 과정, 어떤 시간을 거쳐 그 앞에 서게 되었는지에 따라 교감은 달라질 수 있다. 아마도 노준진은 돌의 생김과 색, 질감에 따라 다양한 형상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돌은 보란 듯이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을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속내’의 형상을 찾아 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시대의 현대적 춤꾼 홍신자는 인도의 한 강가에서 ‘웃는 돌’을 만나 자아를 깨우쳤다. 그 이후로 그는 오랫동안 무대 위에 돌 하나를 놓고 춤을 췄다. 웃는 돌과 홍신자의 춤은 기이하고 낯선 하모니였으나 서구인들은 그들의 세계 밖에서 건너온 이 춤꾼에 열광했다. 선사禪寺의 마당에 놓인 돌은 침묵하는 자아이며, 현실의 시간을 초월하는 우주적 시간, 대자연의 시간을 표상한다. 돌과 명상은 이승의 질서 가장 안쪽에서 첫 파동을 시작한다. 그것은 고요한 폭풍의 눈과 다르지 않다. 거대한 나무가 자라는 속도를 사유해 보라. 한 세기의 문명이 피고 지는 동안 주목나무는 겨우 1센티미터의 키를 올린다. 구루는 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노준진이 돌에서 찾아 낸 ‘거북이’들이 속도전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큰 울림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거기에 있다. 그는 돌에 부분적인 손질만을 가해 거북이를 끄집어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는 돌 속에 사는 거북이들을 불러냈다. 그의 거북이들은 시간의 수레 같기도 하고 바퀴살 같기도 하다. 거북이들은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노준진이 추구하는 조각적 세계는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동시대 미술과 다른 곳에 위치한다. 그는 미학적 진보를 꿈꾸거나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선 예술가이기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의 조각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고, 그 과거는 더 먼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고자 하는 것이다. 거북이에서 시작된 형상들이 다른 동물 형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들’의 초상에서 인간의 초상을 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파괴자의 얼굴로 돌아서는 인간의 초상은 그들 앞에서 가장 초라하다. 그들은 곧 자연의 얼굴이지 않은가!
그런데 몇 몇 작품들은 그가 의도하는 바와 다른 쪽에 있는 듯 하고 때로는 조각적 대상으로 전락한 동물의 초상도 엿보인다. 그가 재현해 놓은 조각들이 그저 조각의 대상에 그친다면 여느 동물 조각들과 하등 다를 게 없을 터이다. 뿐만 아니라 굳이 돌이라는 재료를 써야 하는 가에 대한 명분도 상실한다. 그것은 기념비적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그가 돌에 대한 더 근원적이며 심리적인 사유를 갖기를 바란다. 애초에 그가 돌을 선택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자연과의 교감에 더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래야만 그의 조각들이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돌, 웃는 돌, 명상하는 돌, 깊어지는 돌은 멀리 있지 않다. 이미 그가 첫 개인전에서 보여주었던 작품들에 그런 돌의 성격이 표현되어 있다. 그 느낌, 돌의 소리를 놓지 않아야 한다.


形과 神을 통한 자연 찾기

동양사상에서 세상만물은 자신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왔다. 자연이 지닌 본질적 고유성은 특정의 상징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모든 사물이 지닌 고유성은 완전성 보다는 불완전성이 강하여 이를 때로는 보강하고 때로는 비워주는 기운이 필요하다 하였다. 이를 두고 동양회화에서는 기운(氣韻)이라 하여 대상의 개성이나 기질, 생동감을 강조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노준진의 작품은 氣韻에 대한 조각의 운용 혹은 결합이라 말할 수 있다. 자연물 그대로에서 사물의 상징성을 찾아낸 후, 사물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기하학적 선과 문양으로 완성하기 때문이다.
석조각의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내적 감성에 대한 상징성을 중심에 두고 있다. 돌 모양이 지닌 자연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마음에서 일어난 감성을 어떤 형상을 지닌 대상으로 재현한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어떤 모양을 만들어 내는 조각의 특성과 사물의 재현이라는 회화적 특성이 결합된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석 조각 작품에 대한 접근은 돌덩어리에서 작가의 마음과 형을 조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노준진의 접근방식은 여기에 회화적 접근을 한번 더 투여한다. 자연 그대로의 사물의 외형과 여기에 자신의 마음에 숨겨진 조형적 특성으로 접근한다. 이것은 동양화론에서 말하는 形과 神에 대한 접근과 유사하다. 예술이란 어떤 대상 속에 숨겨진 정신을 찾는 일로서 神을 그리는 일이라고 말한 중국 동진 때의 화가 고개지의 傳神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노준진의 작품은 자연을 만든다기 보다는 자연의 근본을 그린다는 말이 더 합당하다.

따라서 이전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지난 전시의 ‘劃’시리즈에서 한층 변화된 돌덩이와 관계 설정이 중요한 연결점이 된다. 지난 전시를 동양회화에서 말하는 線과 劃에 대한 철학적 접근으로서 돌에 숨어있는 형상을 찾아내기였다면 이번 작품들은 자연성 회복을 위한 이미지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에서 채취된 돌덩이에 대한 정신적 접근이다. 지금까지 그는 돌에 숨겨진 형을 찾아내기 위하여 동양회화의 劃과 같이 망치와 정을 붓과 물감삼아 그림 그리듯이 조각하였다.
최근 작품들은 숨겨진 형을 찾기 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무한의 생명과 역사가 함께하는 무생명의 돌덩이 숨겨져 있는 자연을 끄집어낸다. 선과 문양으로 생명을 제공한 후 거기에 새로운 감성과 감정의 표현을 시도한다. 작품들의 외관에 무엇인가를 끄적이며 흔적을 남기는 일은 인간의 본능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파도가 막 쓸고 지나간 촉촉한 모래위에 기다란 막대를 들고 흔적을 남기는 풋사랑의 기억과도 같다.

기하학적 선과 문양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한다. 자신에 대한 기록은 가로줄과 세로줄로 표현되며, 가로줄과 세로줄은 자연을 짜는 씨줄과 날줄로 전이된다. 검은 돌 위에 선을 긋는 행위는 자유로운 구성으로서 돌이라는 주제는 선의 출처가 될 뿐이며 자연을 찾는 시발점이다. 본질적으로는 자연이 지닌 무작위적 자연스러움을 통제하는 예술가의 감각이며 감성적 접근으로 볼 수 있다. 단순화된 짐승의 위에 선을 그음으로서 대상의 형태를 명확히 하고 반복되는 그라인더의 행위에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

무엇처럼 생긴 돌에 흔적을 남김으로서 있는 그대로 모양에서 어떠한 형태를 찾고 거기에 선을 그음으로서 무엇이 완성된다. 돌덩이에서 얼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찾아낸다. 어렴풋한 형태를 만들고 정형화 되지 않은 수많은 선들을 그린다. 돌을 갉아내는 일이지만 불규칙한 선과 면으로 눈이 만들어지고 눈동자가 살아난다. 오래된 화석 암모나이트와 흡사한 형이 발견된다. 달팽이일수도 있는 형에는 각양각색의 선과 얽히고 설킨다. 선이 뭉쳐지면서 눈이 되고 선이 흐르면서 살아있는 생물로 진화한다. 흐르는 원들의 흔적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새의 두상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코끼리가 되고 코주부원숭이가 되었음 직하다. 카멜레온의 모습을 한 작품을 제외하면 선이나 기하학적 문양들을 특별한 긴장감을 지니지 않는다. 긴장감은 없으나 자연스러운 행위에 의한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안정적이다.
지금 현재의 작품들에는 이미 무엇을 지니고 있는데 무엇이 무엇임을 알게 해 주는 연결자로서의 역할이다. 완전함을 갖지 못하고 있는 질료에 대해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하는 삶의 가치를 완성해 주는 멘토와도 같다. 상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지니고 있었던 형태를 찾아간다. 기하학적 선과 문양은 어떠한 메시지를 제공하기 보다는 자연의 삶에 녹아 있는 인간 본성의 행위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노준진이 주장하는 자연성 회복과 자연의 가치가 발견된다. 역사를 품은 암석에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기초로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던 형을 찾아낸다. 말을 건내어 설득하기 보다는 말을 들어주면서 고민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박정수(미술평론가. 아트피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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