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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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작가 작품

Way back homeⅠ

ceramic. 20×25×33cm. 2019

교양있는 여자

ceramic. 22×17×25cm. 2018

꼭 안고 있어Ⅰ

ceramic. 21.5×18×36cm. 2017

포근한 꿈이었으면

ceramic. 33×26×13cm. 2017

내안의 모든 나

ceramic 38×20×37cm. 2017

찢어 버리자! 잊고 싶은 기억은

ceramic. 29×17×25cm. 2017

핑크드레스

ceramic. 13×23×24cm. 2017

trash talk. ceramic

혼합재료. 53×32.5×47cm, 설치. 2017

Banny

혼합재료. 58×53×185cm. 2006

다함께 꽥!꽥!꽥!

혼합재료 10m 이내 설치. 2004

작가 프로필

2020 쥐를 말하다, 갤러리 화인
IDENTITY, 한새갤러리

2019 Trash memory 킴스아트필드 초대개인전
2019BFAA 국제아트페어, BEXCO
부산조각제, 부산예술회관외 다수

2018 Doll’s Diary, 개인전, 예술공간 DOT
매직월드, 김천예술문화회관
2018 BFAA 아트페어, BEXCO외 다수

2017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VISION & PERSPECTIVE 1999-2017, 부산시립미술관외 다수

2006 젊은시각 새로운 시선, 부산 시립미술관 2006
바니展 박영선 개인전, 시민 갤러리
2006 청년작가 시대와 정신전, 타워갤러리, 포스코갤러리(포항)
비행기전, 프랑스 문화원


2005 제 2회 ...ing 그룹전, 대안공간 반디
부산시립미술관 인턴기획展,‘미니홈피 훔쳐보기,엿보기’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
Act - Out, 금정문화회관 대전시실
제 25회 부산미술제, 부산문화회관
동아대학교 동문전, 을숙도 문화회관
M전, 부산민주공원 전시실

2004 신인작가발굴전, 엄태익 갤러리
개인전 1st, Yes I am... , 부산대학교 미술관
제 5회 새천년 청년작가전, 타워갤러리
부산미술대전 입선 (조각 부문)

2003 제 1회 ...ing 그룹전, 타워갤러리

작가 노트

								

평론


                    내가 다가가서 네가 되는 – 일상이 은유가 될 때

강 선 학 (미술 평론)


책갈피를 이불처럼 말아서 접고 있는 아이 옆으로 책을 침대 매트리스 삼아 상체를 묻고 엎어져 있는 여아의 모습은 마치 동화를 읽으면서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이다.
허리쯤에 담요를 슬쩍 덮고 앞쪽으로 나머지 부분을 배치하여 웅크리고 누운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도 인상적이다. 피곤에 지쳐 혼곤히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잠시의 휴식이거나 오수의 나른함을 읽게 한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과 아이의 모습이 분명하지만 아이와 엄마가 하나가 된 형상들도 그의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된 시선이다. 일상의 비근한 모습들이자 어디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정황이다. 그래서 작품들은 다른 의미로 비껴나기보다 엄마, 혹은 여인, 아이, 일상이라는 경험 속으로 보는 이를 불러들인다. 그런 때문인지 익숙하고 친근한 분위기는 분명하지만 과도한 예술적 의미나 표현 과잉이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 있다. 경험의 익숙함이 안겨주는 세계, 놀이가 주는 행복이 거기 있는 셈이다.

편한하게 안기고, 드런부고, 엎어져 있는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얼굴이 주로 드러나지만 실은 표정이랄게 없다. 그저 밋밋하게 비어있거나 단순한 눈이나 입이 표시되어 있을 뿐. 그 대신 아이를 안거나, 넥타이가 강조되거나 머리띠가 두드러지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엄마를 안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꽃다발이나 손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은 단순하지만 표정과 이야기를 대신한다. 눈에 띠는 몇 작픔에서 드러나는 장면과 이야기들, 소재를 다루고 형상화 하는 태도는 색과 형태, 크기와 재질이 보여주는 친근함을 일상적 경험 속에 다시 드러냄으로 다가오는 ‘분위기에 대한 이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노랑, 분홍, 파랑, 연두, 조금 붉은 색상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시선을 끈다. 조금 거칠고 미완성인 듯한 형태,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촉감적인 채색안료(도자용 크레파스)를 활용하는 기법은 일상의 정황을 현실상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의 은유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다들 소품이라 등장인물들의 얼굴표정이나 손발과 몸짓이 정교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런 정도로도 충분하게 전달된다. 그만큼 알만한 장면들이다. 알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연출한 것인가 하고 긴장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자 소재들이라는 뜻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동감과 공감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비슷비슷한 형태와 색채들의 반복을 통해 창작이기보다 놀이에 가깝고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것에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웃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여자로서 자신을 뒤흔들었던 산고의 경험과 육아의 경험을 익숙함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흙으로 인형처럼 빗어내는 자신의 놀이이자 아이들의 놀이이며 작가로서의 새로운 전환이다.

“익숙함은 놀이로서 삶 속에 등장한다.” 우리의 최초의 행복은 아이답게 가 아니라 유치하게 놀이를 하는 것이다. 그건 자칫 위험하지만 분위기를 위한 키치적 수법의 채용으로 보인다. 키치는 예술로서의 언술이나 창의적 측면에서는 위험한 노출이지만 친근하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정서적 동의라는 면에서는 ‘묻지마’공감의 이점도 없지 않다. 키치로 작업의 특징을 잡는 것은 작가나 보는 이 모두에게 안일하게 지나가는 지점이 아니라 익숙함의 통로로 삼자는 의지다. 예술적 의지의 치열함이 주는 과도한 엄숙함보다 친근함이 주는 소통을 따른다는 면에서 이점이 있는 반면 상투적이고 예사롭다는 면에서 신중함보다 소재와 상황에 대한 느슨한 이해나 감득이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심상치 않은 부분이다.

거칠고 미완인 듯한 형상은 어린 아이들의 놀이와 연관되지만 사실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심상에 다르지 않다. 아이를 안고 있지만 안고있는 아이와 엄마가 하나가 된 표현은 어른의 심상이자 세계에 대한 태도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관계맺고 있는 것, 하나의 얼굴에 여럿의 아이들이 들러붙어 있는 형태들은 동심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다. 그것은 아이를 낳고 기른 몸으로써 경험한 세계다. 언어가 아니라 몸이 안겨주는 촉감과 시선의 결과다. 몸에 의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촉감적인 현전이야말로 드러내려즌 내용이다. 분위기는 감정을 사로잡는 힘으로 세계를 만나는데 있다. 전적으로 일상의 경험으로서 세계가 몸을 뿐임을 보여준다. 그것도 규정되지 않은 촉감으로서 몸, 니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전적으로 몸일 뿐,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몸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 는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가 번성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를 그저 바라볼 뿐이듯 한 여인으로서 내가 관계하고 있는 것들, 가장 가까이 있는 세계다.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이 다가가려는 아이들의 세계인 것이다. 형태와 색채와 구조는 그 자체로 다가오고, 그들이 가진 색은 색 그 자체로의 경험이다. 언어화되기 이전의 경험으로서 세계인 셈이다.

거칠고 미완인 듯한 형태와 색상들, 작고 비근한 정황이 보여주는 익숙함은 그것대로의 분명한 특징을 부정할 수 없지만 놀이나 어린이에 빗땐 소박함으로 충족되는 경험이 아니다. 자신을 뒤흔들었던 경험이라도 반복으로 익숙해 지면서 내재화 되듯 경험은 놀이로서 문화가 된다. 문화적 경험으로서, 전시로서의 진술이나 예술적 표현은 그 경험이 의식의 변화뿐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 진리의 기준을 변화시키는 고통으로서 경험이어야 한다. 소통이라는 나긋한 감언은 때로 나약한 타협에 지나지 않는다. 소통불능의 경험이기에 반복이 필요하고 놀이로서 승화되어야 하고 예술로서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품으로서 세계는 단조롭거나 자기설득으로 가능하지 않다. 작품 하나하나가 혹은 하나의 전시가 은유로서 작동해야 한다. 은유는 장식이나 효과적인 표현,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사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거나 불명료한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제시된 작품, 작품이 보여주는 형태와 색상 외로는 드러날 수 없는 것들이어야 한다. 작품으로서 은유란 일상의 경험에서 그가 작가로서 어떻게 실존하는가 하는 해명이어야 한다.


















상처에 대하여

큐레이터 장지원

우리는 끈임없이 말한다. 세상은 결코 조용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말들이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즐거움이나 기쁨, 슬픔, 놀라움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하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최근에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발달로 인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의 영향력이 커졌다. 오늘 무엇을 먹었고, 어디에 갔고,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람들은 일거수 일투족을 불특정 다수가 보는 공간에 쏘아 올린다. 그 중에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따뜻하고 훈훈한 미담도 있으며, 혐오 표현도 있다. 우리는 이런 말들 속에서 살고 있고, 영향을 주고 받는다. 말 때문에 어떤 이는 직장을 잃기도 하고, 법정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떤 말들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필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을 쓰레기 같다고 생각해 왔다. 필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고, 혐오감을 주는 것을 ‘쓰레기’라 부른다. 분리 수거도 되지 않고, 거름도 될 수 없는 썩지도 않아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는 그런 쓰레기 말이다.
그렇기에 박영선 작가의 작품 를 본 순간 ‘쓰레기 같은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가 입에서 쓰레기를 뱉아 내고 있다. 말은 종이 위에 쓰여지면 글이 된다. 말과 글은 속성을 같이 한다. 자기 표현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감정이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쓰레기 같은 말이 종이에 쓰여지면 쓰레기 같은 글이 된다. 소녀가 입에서 쓰레기를 뱉는 것처럼 책도 쓰레기를 뱉아 내고 있다.
오리 입을 가진 소녀가 있다. <꽤-액>에서는 오리 입을 통해 ‘입’의 형태가 강조됨을 볼 수 있다. 소녀는 사람을 잡아 먹는 것일까? 토해 내는 행위라고 본다면 이는 쓰레기를 토해 내는 작품들과 의미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주체는 인간이며, 이러한 인간 역시 쓰레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토해 내는 행위는 중의적이다. 쓰레기를 토하는 행위이기도, 쓰레기 같은 인간을 토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반대로 잡아 먹는 행위로 본다면, 징벌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입은 쓰레기 같은 말을 뱉기도 하지만, 그런 자를 벌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말과 글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혹은 상대방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가 꽂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누구나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성과 사유를 통해 그 반대편에 설 수도 있다. 박영선 작가의 소녀와 책은 쓰레기같은 말들을 토해내고 있지만, 이로 인해 상처 입은 자들을 대변하고 있기도 한다. 소녀는 비를 맞고 있는 것일까, 울고 있는 것일까? 소녀가 손에 들고 있는 ‘OUT’은 쓰레기 같은 말로 나의 공간을 침략한, 나의 마음을 어지럽힌 공격자들에 대한 거부의 표현일까? ‘CAUTION’, 즉 주의 표시를 두르고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취급주의’ 표시가 붙은 유리병처럼 보인다.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두 사람의 모습은 화산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거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나의 실존을 확인하기 위한 포옹이다. 틈 없이 꽉 껴안은 두 사람은 ‘CAUTION’테이프 안쪽으로 둘만의 공간, 연약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푸른 옷의 사람은 상처 입은 소녀를 가슴속에 품고, 기억한다.
작가의 작품은 마치 블랙 조크(Black Joke)같다. ‘뼈있는 농담’이라고 해야 할까? 얼핏 듣기에는 재미있는 농담이지만 웃고 넘기기에는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 작가의 작품들 역시 얼핏 보기에는 너무나 따스하기만 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험자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이자 치유의 과정이며, 한편으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경고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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