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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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호

작가 작품

Restoration Image 13-05

37×18×60cm, Copper, 2013

Restoration Image 12-11

38×19×55cm, Copper, 2012

Restoration Image 10-18

59×43×7cm, Copper, 2010

Restoration Image 10-02

61×46×4cm, Copper, 2010

Restoration Image 14-03

40×38×28cm, Marble,Copper, 2013

Restoration Image 14-01

40×27×25cm, Marble,Copper, 2013

Restoration Image 13-10

80×40×60cm, Copper, 2013

Restoration Image 13-13

27×25×130cm, Ganit,Copper, 2013

Restoration Image 12-01

24×17×72cm, Marble,Copper, 2012

Restoration Image 15-02

474×18×26cm, wood, 2015

Restoration Image-두얼굴

250×250×250cm, 스테인리스스틸,화강석
2011 부천시 약대동 두산위브 아파트

가족이야기

240x240x500cm, 화강석, 스테인리스스틸
2007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 신도아파트

Restoration Image 18-18

2,400x1,200x3,100mm, 스테인리스스틸, 화강석
2018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래미안미드카운티

Wave Of Dream

300×300×1380cm, 브론즈, 화강석, LED조명
2017 서울 마포구 공덕동 경의선 공덕역사

비오는 날

3,000x2,000x2,800cm 스테인리스스틸,브론즈, 폴리카보에이트
부산 감천마을 공공미술작품

작가 프로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 대학원 조각과 졸업
개인전 3회(서울)
한일현대조각전(일본,서울)
한국현대조각회전(미술회관)
서울현대미술제(미술회관))
87청년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
살롱 그랑에존느(파리, 프랑스)
‘06,’07 북경아트페어(베이징, 중국)
‘06-10 말레이시아 아트엑스포(말라카, 쿠알라룸프르, 말레이지아)
‘08 ART METS(메츠시, 프랑스)
‘08 한-스페인조각교류전(마드리드, 스페인)
‘08 SICAF(코엑스,서울)
'08 꽁파레종(파리. 프랑스)
‘09-18, 아시아탑갤러리호텔아트페어(서울, 홍콩)
‘10 한중현대미술아트페어(북경, 중국)
‘11 칭다오한중현대미술전(칭다오, 중국)

■ 수 상
1985 제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1988 제3회 서울현대조각공모전 대상
1987 제6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1987, 8 제10,11회 중앙미술대전 특선
2002. 1 예총예술문화상 수상
2008. 12 국무총리 표창

■ 작품소장
제주조각공원, 광주시립미술관, 화곡고등학교, 호텔롯데월드,
명지국민학교, 한국은행, 목암미술관. 토탈미술관, 모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 현 재
한국현대조각회 회원, 홍익조각회 회원, 대한민국조각포럼 운영위원,
(사)한국미술협회 이사, 김포공공미술발전소 자문위원

작가 노트

								

평론


                    신달호의 조각

유년의 상징들, 집과 미루나무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신달호의 조각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은 ‘환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환원은 모더니즘 조각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작가의 조각에서는 상당부분 그 개념에 기생하고 공감하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모더니즘 조각의 세례를 받은 세대에 속하며, 그 개념을 자기화하는 과정 속에서 조각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고 있으며, 또한 그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환원이란 말에는 소급시킨다, 되돌린다, 란 의미가 내재돼 있다. 즉 조각으로 하여금 조각이게 해주는 장르적 특수성에로, 조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본질적 요소에로 조각의 존재성을 소급시키고 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양감(속이 꽉 찬 덩어리)과, 질감(흔히 줄여서 물성으로 알려진 개념으로서 재료 고유의 물질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구조와 공간감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특질은 작가의 근작보다는 전작에 더 잘 드러나 있는데, 이를테면 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인 구조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 보인다든가, 재료 고유의 물질적인 성질을 극대화한다든가, 이질적인 재료들을 하나의 조각 속에다 조화시킨다든가 하는 식이다. 전작에서는 이처럼 근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재료와 구조에 대한 관심에 경도돼 있으며, 이에 대해선 소위 물성조각이란 말로서 개념화하고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근작 또한 이런 모더니즘 조각개념에 대한 공감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그리고 여전히 환원이란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주제의식이 드러나 보이는 양상은 서로 다르다. 기본적으론 전작이나 근작이나 재료의 물질적인 성질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서 대상을 최소한의 구조적 요소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근작이 전작에 비해 더 심플해진 점이 눈에 띤다. 재료의 물성에 대한 관심에 비해 대상의 구조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더 증대돼 있으며, 이는 그대로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각적 외관을 띠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근작에서의 특징적인 사실은 환원의 개념을 형식논리로만 취급하지 않고, 이를 내용적이고 의미론적인 측면에로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근작에서의 환원 개념은 조각의 특정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상을 추상화하는 과정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집이나 건축물을 암시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말하자면 집이나 건축물의 구체적인 대상을 그 최소한의 구조로 축약하고 환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문이나 창틀과 같은 구멍이 나 있기조차 하다. 이렇게 조각의 특정성을 지향하는 환원주의 논리와 함께 대상을 암시하는 재현의지가 하나의 결로 짜여져 있으며, 이로부터는 일종의 서사성과 함께 풍경조각의 요소마저 느껴진다.

신달호의 근작에 나타난 환원 개념은 이처럼 조각의 특정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존재론적 의미마저 획득하고 있다. 즉 그 형상이 존재의 감각적 형상을 넘어 존재의 근원, 시원, 원형을 암시하며, 이로써 존재를 그 존재가 유래한 근원적 시점에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므로 집이나 그 구조물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은 집 자체보다는 이러한 근원존재, 근원형상을 암시하는 일종의 상징, 메타포의 한 형식으로서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집은 집의 감각적 닮은꼴로도 나타나고, 최소한의 구조만으로 축약된 암시적인 형태로도 나타나고, 사각형이나 원형의 관념적인 형태로도 나타난다. 도상학적으로 사각형이나 원형은 완전한 형상을 상징하며, 흔히 만다라의 형상을 위해 곧잘 차용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우주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에서의 집의 형상은 그 존재론적 의미가 근원형상에 맞닿아 있으며, 그 상징적 의미가 우주를 아우르는 것으로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존재론적 의미는 작가의 유아기에로 소급되며, 나아가 작가의 존재마저도 넘어서는 아득한 과거, 원형적 과거에로 되돌려진다. 구조물 속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미루나무는 이처럼 작가 자신의 유아기적 추억의 저장고로부터 회상해낸 것이며, 존재론적 지평으로부터 추상해낸 것이다.
도심지에서는 보기가 어렵지만, 미루나무는 흔한 나무들 중 하나이며, 심지어는 가로수를 위한 수종으로도 친근한 나무였다. 아마 모르긴 해도 작가는 어린 시절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미루나무를 기억해냈을 것이고, 이를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닌 것이다. 실상 작가는 나무들 중 하나에다가 금박을 입혀 그 나무가 예사롭지 않은 나무임을 주지시킨다. 즉 그 나무는 작가 자신의 개인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나무, 자기 반성적인 계기로서 작용하는 나무, 자기 최면과 암시로서 작용하는 나무, 상실된 유년을 되돌려주는(환기시켜주는) 나무, 주술적인 나무인 것이다. 그 상징적 의미는 작가의 유년을 흔들어주던 요람에로 소급되며, 작가의 존재가 유래한 우주론적 자궁에로 소급되며, 세계의 근원신화(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령한 나무)에로 소급된다. 이처럼 미루나무 자체는 비록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그 존재론적인 의미는 보편적인 서사를 획득하는 것으로서, 보편상징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처럼 신달호의 작품에서는 조각의 특정성에 대한 관심이 존재론적 관심과 만나고 있으며, 개인적 상징이 보편적 상징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공간구조에 대한 관심은 집과 미루나무로 나타난 대상적 모티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구체성을 획득한다. 그럼으로써 형식논리에 한정된 조각의 논의를 서사적인 논의로까지 확장시킨다. 집에 난 창문(일종의 투각의 형식을 빌린)은 작가의 조각이 이러한 서사와 자기 반성적인 계기에 맞닿아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 창은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들여다보는 창이며, 피곤한 현재를 치유 받고 위안 받는 주술적인 창이다. 그리고 그 자체 작가가 지나쳐온(건너온) 삶의 계기들을 가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그 경계의 문턱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겪었을 여러 형태의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매끈하게 마무리된 구조물과 함께, 그 표면에 여러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각인 된 구조물을 대비시키기도 하고 중첩시키기도 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때의 스크래치를 그저 조형적인 한 요소만으로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이는 정체성과 동격으로 나타난 집(집은 정체성을 상징한다)과, 그리고 작가의 유년을 암시하는 미루나무와 중첩됨으로써 그 의미가 증폭돼 보인다. 그러니까 스크래치는 작가의 무의식의 지층에 새겨진 상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남긴 상흔, 치유 불가능한 상처의 흔적인 양 보이는 것이다.

신달호는 자신의 조각을 통해 조형적 환원과 의미론적 환원을 수행하고, 이를 자신의 조각 속에다 통합시킨다. 즉 작가의 조각은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장르적 특수성에 한정된 모더니즘 조각의 형식논리를 떠올리게 하며, 집과 미루나무, 창문과 스크래치(상처)와 같은 암시적인 모티브의 도입으로 인해 서사적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형식논리와 서사적 논리가 충돌하는가 하면, 추상의지와 재현의지가 대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론 이 계기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겉돌기보다는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성질을 획득한다. 무엇보다도 대상을 최소한으로만 환기시키는 심플한 구조와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형상을 통해서 이를 실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사를 넘어선 유년의 보편적 상징이 읽혀지고, 그 상징에 연유한 존재론적 근원형상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2006년 10월 제2회 개인전 서문(전시장소 : 인사동 큐브스페이스)


공간에 새겨진 시간의 주름

이선영(미술평론가)
신달호의 작품은 사각형의 안정된 건축적 구조 안에 창이나 문 같은 또 다른 사각형을 뚫어놓고 그 안에 나무인 듯한 사람인 듯한 형상들을 배치한다. 그 바깥으로는 안을 향하는 계단이 어김없이 연결되어 있다. 돌아가며 관람할 수 있는 조각의 특성상, 계단은 뒤쪽에도 있다. 그의 작품은 우주 및 삶을 지배하는 엥트로피의 법칙에 대항하듯, 질서 잡혀진 구조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느껴진다. 회복이나 복원을 가리키는, 작품 제목으로 사용하는 ‘Restoration-Image'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더울 그렇다. 순리에 어긋나지 않는 자연적 법칙으로의 환원에 예술이라는 인간적 규칙이 결합된다. 그것응 계단으로 나타나듯이, 좁게 난 길이고 상승하며 궁극적인 목적이다. 사람 또는 자연을 둘러싸는 구조는 건축적이지만, 특정한 건축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작품은 건축을 이루는 전형적인 요소들만 발췌된다.
그 안의 인간을 보호해 주면서 바깥으로 뚫린 사각형 공간, 그리고 안/밖, 위/아래를 구별하는 계단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들을 둘러싸는 사각 틀은 여러차원(주로 크기)에서 반복되면서 기계처럼 인간을 외계로 확장한 것이 바로 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동판을 용접하거나 대리석, 화강석 등으로 만들어진 집-인간이라는 소우주는 영원히 그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신달호의 조각에서 공간적 고착화에 대항하는 시간성의 흐름은 표면의 회화적 효과로부터 온다. 이것은 작가가 공을 많이 들이는 부분이며, 관객들로부터도 호응을 받는 부분이다. 동판용접 작푼의 경우 금속 표면에 플라즈마를 고온으로 쏴서 녹아 생겨난 질감을 통해 표면의 미묘한 색이 나온다. 2mm의 얇은 동판이기 때문에 금방 뜨거워 졌다가 식는 재료의 성셕상, 판 전체가 고르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표면의 스크래치는 공간을 공략하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시간의 주른은 나무와 중첩된 인간상에도 반복된다. 나무와 인간은 모두 주름으로 둘러싸인 유기체인 것이다. 돌작품의 경우 그라인더로 스크래치를 낸다. 신달호의 이전 작품에서는 작품외곽선이 쥐가 뜻어 먹은듯한 우툴두툴한 형태가 발견되곤 하는데, 작품 표면의 스크래치 또한 그러한 표현방식의 변주로 보인다. 스크래치는 작품 안팎에 모두 있으며, 때로 강한 스크래치는 금속 표면에 구멍을 내어 안의 공간을 보이게 한다. 그 안에 조명을 설치하여 구멍사이로 빛이 스며나와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효과를 준다. 작품 [Restoration - Image 10-08]은 두 개의 판이 연결된 건축적 구조안에 세 명의 사람이 서있다. 계단은 사람이 있는 창을 향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작품[Restoration - Image 11-01]에는 여러 시간대에 걸쳐 바람이 스쳐간 자국이 벽에 새겨진다.
돌작품의 경우, 실제 건축적 크기로 확대되기도 한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작품 [Restoration - Image 11-18]은 계단에 올라갈 수도 있고, 앉을 수 있는 단도 있다. 작품은 꽃과같이 유기적인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기도 하는데, 여전히 사람, 계단, 창문이라는 구조는 반복된다. 작품 [Restoration - Image 10-18]의 경우, 사각형 액자 안에 창문이 뚫려있고 그 안에 사람과 계단이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 꽃이 드리워진다. 작품 [Restoration - Image 10-14]는 거대한 꽃잎 안쪽에 사각형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 회화적 효과는 가는 선으로 꽃잎을 반복하여 그림자를 작품에 끌어들인 것이다. 신달호의 작품에서 구조, 또는 틀의 핵심에는 사람 또는 나무가 있다. 그것들은 미루나무면서 사람이다. 가까이 붙어있는 두 그루는 연인 같고, 세 그루는 가족같은 분위기가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거친 자연이 아니라, 정원이나 집처럼 질서화된 구조위에 자리잡고 뿌리내린다.
미루나무는 빨리 크게 자라서 1970년대에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나무로, 작가의 기억속에 대표적인 나무로 깊이 새겨져 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머리를 하늘로 두는 나무는 인간과의 비유를 멈춘적이 없다. 나무는 기둥형식의 조각적 기념비의 원형이 되었으며, 신달호의 작품에서 미니어쳐처럼 재생된다. 삼계를 연결하는 나무의 상징주의는 신격을 부여받았으며, 이와 비유되는 인간역시 그냔 인간이 아니라, 신인동형론이 말하는 바처럼, 신인(神人)이다. 나무로 비유되어 중심에 놓여진 인간, 또는 인간의 삶은 신성함이 깃들어있다. 벽으로 비유되는 판에 새겨진 시간의 주름이 나무-인간에게도 반복되지만, 그것은 처음과 끝이 연결된 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종교사 개론]에서 나무를 ‘끊임업이 재생하는 살아있는 우주를 구현한다’고 보았듯이 나무는 ‘불멸의 생의 나무’가 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무궁한 삶은 또한 고대의 존재론에서 절대적 현실이라는 개념의 표현이므로, 나무는 구 경우 이 절대적 현실의 상징, 즉 세계의 중심이 된다. 신달호의 나무-인간은 우주목처럼 세계의 중심에 성스러운 곳에, 실재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있는 존재나 행위가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물이 하늘의 원형을 지니거나 행위가 원초의 우주론적 행위를 반복할 때에 한한다. 그리하여 개별성은 보편성으로 승화된다. 하늘쪽에 머리를 두고 아래의 것들을 위로 끌어올리는 나무의 구조와 생태는 인간의 정신적 초월과 비유되며, 이러한 움직임은 상승지향적인 계단을 통해서 반복된다. 계단들은 거의 세 개다. 작가에 의하면 두 개는 너무 적고 네 개는 너무 복잡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계단이 건축의 재현이 아니라, 일종의 상징주의로 작동함을 알려준다.
안네마리 쉼멜은 [수의 신비와 마법]에서 심리학자는 ‘3은 2가 갈라놓은 것을 다시 복원시킨다’고 인용한다. 2에 의한 대립을 넘어서는 3은 분열을 부정하고 극복한다. 쉼멜은 그것이 마치 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결합시켜주는 제3의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 본다. 계단이 향하는 나무-인간들이 연인, 또는 부부의 이미지이며, 그것이 번번히 가족의 이미지로 연결되는 3이라는 수비학적 싱징주의로도 설명된다. [수의 신비와 마법]에 의하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절대적인 하나가 대립된 두 힘으로 분리되면서 세계가 창조되고 두 힘이 셋으로 화합하면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단테는 3을 사랑의 원리로 이해했다. 여기에서 사랑은 곧 종합의 힘이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일체가 되는 삼위일체 같은 종교적 상징주의로 구체화되곤 하였다. 3은 일체를 이루는 포괄적인 수로, 통일감과 안정감이 주조를 이루는 신달호의 작품에 깊이 새겨져 있다.
- 미술과비평 34호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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