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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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숙

작가 작품

시간여행자 1808

흑.백 화강석.90x90x105cm. 2018

시간여행자 1508(Time Traveler- 1508)

대리석+현무암 35x25x70cm . 2015

만다라2014

Radianz ultra grey+10inch monitor+ Video 영상, 가변설치. 2014

시간여행 28수-천상열차분야지도

100x100x7cm 스텐레스스틸+LED+캔디도장 2012.

시간여행자-우주

40x15x45cm 마천석+스텐레스스틸. 2014

시간여행자 2009

브론즈+마천석 43x28x65cm 2009

시간여행자-1010

100x6x100cm 브론즈. 2010

시간의 문

90x90x130cm 오석. 2003

해탈문 Ⅰ

천안석 90×55×130㎝ 1989

시간의 문Ⅰ

170X84X190cm 임페리얼, 1999.

미술세계작가상 수상기념 초대개인전 전경

선화랑. 2010

미술세계작가상 수상기념 초대개인전 전경

선화랑. 2010

시간여행자 2016

350x120x260cm 마천석+포천석 홍천SONO Fellice. 2016

Tlme Traveler 2011

250x250x350 2011 -중국 청화대 2011

門-영혼의 자유

750X150X360cm, 천안석
1993 안양 평촌 중앙공원 내 보행자도로

시간여행자

350×240×350cm, 포천석+마천석
2009 이천 종합경기장

시간여행자 2005

1,500X1,500X2,800mm, 마천석 + 포천석
2005 서초 삼성트라펠리스

시간여행자2016

350x120x260cm 마천석+포천석 홍천SONO Fellice

수호신- 시간여행

860x230x350cm, 화강석+나무
2007 안산 고잔 대우 푸르지오

작가 프로필

작가 노트

								

평론


                    ‘보는 눈’, ‘보이는 눈’으로서의 영상

글/ 이 재 언 (미술평론가).

얼마 전 선화랑에서 있었던 미술세계 수상작가전을 가진 조각가 신은숙의 출품작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변화가 있었다. 미디어 영상이 결합된 조각작품들이 선보인 것이다. 사실 영상미디어라는 것이 흔하다면 흔한 것이지만, 30년 가까이 주로 돌만 가지고 작업을 해온 타고난 조각쟁이의 변신은 그리 단순하게 지나칠 일이 아닌 것 같다. 물론 30년 남짓한 세월동안 작업의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들은 대부분 조각이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재료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졌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영상미디어를 사역하고 있다는 것은 견고한 고체를 매개로 한 표현과 변화무쌍한 시간을 매개로 한 표현간의 공존 혹은 결합을 의미한다. 이는 보편화되어가는 추세의 수용이라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자기만의 조형세계를 굳건히 해 온 작가 입장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추구해 온 미의식 및 세계관과 관련하여 보다 의미심장한 모색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탐구도 그렇거니와, 작가는 그러한 주제를 수행하기 위한 치밀한 구성과 왕성한 창작 에너지 등에서 독보적이다. 특히 종교적 성찰과 수행을 자신이 선택한 돌이라는 재료와 현대적 창작 양식에 접목시켜야 하는 여러 가지 과제들을 종합적으로 완성해나가는 일은 사실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수행을 위해 작가는 부단히 탐구와 작업을 병행하면서 자기만의 확고한 조형세계를 일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출품된 작품들은 2천년대에 접어들어 지금까지 중심이 된 테마 ‘시간 여행자’, ‘만다라’, ‘시간의 문’ 등의 연장선에 있다. 예의 개념적이고 도식적이면서도 아우라와 신비로움이 감도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들, 그리고 사유와 체험의 깊이가 각별함을 개성으로 하는 것이 작가 특유의 세계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불교적인, 혹은 동양적인 사유를 근간으로 한 조형세계로 확고한 이미지를 굳혀 온 터이다.
‘시간여행자’ 연작의 경우는 밑도 끝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와 존재에 침윤되어 있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사유가 과즙처럼 분비되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시간의 비밀스런 본질을 전하고 있는 데는 돌만큼 적합한 재료도 없어 보인다. 이미 그것 자체가 억겁의 세월이 투영되고 각인된 고고학적이면서도 미래학적인 오브제인 것이다. 일견 작가는 돌의 자연상태나 매스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가공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 돌의 과육을 제거하고 씨앗, 그 존재의 핵으로 돌입하기 위한 오랜 수행일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하나의 아이콘을 발명했다. 두 개의 목을 가지면서도 자웅이 하나인 것 같은 인체, 럭비공 같기도 하고 캡슐 같기도 한 타원구체, 한 쪽에만 가슴이 있는 특이한 형상의 것이 그것이다.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타원형의 머리 부분이란 것이야말로 작가의 깨달음이 반영된 장치가 아닐까. 우리는 우주를 상징하는 작가의 아이콘이 바로 눈의 위치에 주어져 있는 사실을 통해, 바로 눈이 예의 가역성과 상호성 및 순환성의 접점이자 관문임을 읽어낼 수 있다.
우주의 원리와 본질이 반드시 천체망원경으로 관찰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과 상통하며, 주체의 내면 혹은 마음에 있음을 명제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체는 마땅히 객체의 거울이며, 또한 객체 역시 주체를 비쳐 볼 수 있는 거울이자 집인 것이다. 본질(理)과 현상(事)이 하나이며 주체와 객체, 시작과 끝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순환적 조건이 존재의 숙명이라는 명제이다. 또한 개체와 전체가 하나임을 역설하고 있는 명제가 짙게 각인되어 있다.
우리의 머리로 사유하거나 상상하기도 벅찬 우주의 광대무변한 질서와 본질, 그리고 그 에너지까지도 하나의 도상 속에 압축된 것이 바로 ‘만다라’이다. 작가의 조각작업 자체가 바로 돌에 새긴 만다라인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 만다라의 다양한 도식적 도상들을 부조로 새겨 상징적인 숫자의 포맷을 설정하고, 또한 수많은 수인(手印)들이 담긴 영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만다라의 핵심을 역설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도식성과 서술구조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입체 작품들이 만다라의 기능을 분유하거나 공유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대립자의 가역성이라는 것은 무한의 우주적 원리나 본질이 유한의 도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하여 훼손되거나 왜곡된다는 것은 기우가 아닐까. 이 점과 관련하여 작가 스스로 설정한 엄격한 도식성을 부수고자 하는 노력도 역시 의미 있는 깨달음일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과거 작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의 ‘원’ 양식을 많이 이야기하곤 한다. 대단히 단조로워 보이는 구조 속에서도 감각적이고 율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형식 속에 함축된 메시지 또한 적지 않으며, 무엇보다 조형적 완성도의 극치를 보여준 수작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필자 역시 이 점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가공적이고 도식적인 양식으로 비약해야 했던 이유를 수긍하기도 어렵지 않다. 작가 입장에서의 미의식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또한 ‘이해’를 넘어 체험, 그것도 생생한 법열(法悅)의 신비롭고도 불가해한 체험과 깨달음은 감각적인 요소조차도 순환의 질서를 거스를 수 없는 탈각이자 또 하나의 부정의 도정인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영상 미디어 작업이라는 모험적인 도전은 유행의 편승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진지한 성찰과 반성의 몸짓 혹은 ‘탈각’일 것이다. 각고의 모델링 수행의 결실인 조각의 독점적 공간에 영상이 가미된다는 것은 보수적인 작가들에게 그리 쉽게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느림의 상징인 돌, 반면에 디지털 혁명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속도의 상징인 영상은 정말 대조적이다. 작가의 깨달음 속에 내재된 변증법적 코드는 바로 이 대조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묶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수행의 연속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작가가 6개월여 촬영하고 편집한 영상은 자신이 오랜 기간 조각을 통해 표현해 온 시간의 의식을 보다 속도감 있는 생생한 영상으로 전달하고 있다. 우주 혹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유전적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만다라의 경우는 수인이라는 손동작을 통해 우주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 수인이야말로 불가의 절제된 퍼포먼스로서 사변적인 주제를 서술하고 해석함에 있어 함축성을 가진다. 또한 가슴 속의 영상 내용은 우주와 주체의 접점이자 관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작가 작품의 문맥에서 보면 모니터란 보이는 것이면서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우주 혹은 세계의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주체의 마음 속에 있으며, 사람 마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주체의 무한한 확장 혹은 초월이라는 궁극 역시 인간 스스로의 능동적인 수행이 갖는 의미를 말이다.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비로소 초월적인 무한의 실재에 접근하는 원리의 암시이다. 불교가 왜 휴머니즘인지를 강변하는 메시지로 들린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굳이 사변적인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작가의 이러한 결합적 모드는 전통적인 모델링 조각이 갖는 한계를 고뇌하는 조각계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느림이라는 것이 고도화된 문명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처방이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하나의 양식이나 모드가 독점하는 세계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고정적인 것이 해체되고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지만 이 역시 고정적인 공간이 전제된 상태에서 부가적으로 요구되는 가치의 덕목이 아니던가. 깨달음은 경전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경전 밖의 선문답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가치와 양식이 조화되고 융합되어야 함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되고 있는 내용이다.
이제 작가는 새롭게 도전한 장르에서 또 하나의 과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떤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역시 예술작품의 보편적 가치를 향해 요구되는 과제 말이다. 영상이란 것이 보다 감각과 현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보니 수다스러워지기 쉬운 한계를 안고 있다. 함축된 형식 속에 의미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갈 수 있는 보다 새로운 차원의 요구가 있는 점도 분명하다. 사실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화면 못지않게 의미를 준 것은 조명이 있는 별자리 요소들이다. 그렇게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빛나고 있는 별자리의 희미한 조도만으로도 조각의 색다른 경험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각과 보다 완벽하게 조화되는 ‘신은숙 표’ 영상의 백미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시간여행의 출발점과 구환점, 자기로부터의 해방

최태만/미술평론가


시간여행자

신은숙의 ‘시간여행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지구와 우주, 현실과 이상, 현세와 내세를 넘나들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희망을 표상한다. 인체로부터 추상화된 단순한 구조와 형태를 지닌 시간여행자는 이제 신은숙만의 고유한 도상이자 상징이며 앰블램이 되었다. 지면에 수직으로 세워진 몸통은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발사될 수 있는 로켓처럼 날렵하고 그 위에 얹어놓은 타원형의 머리는 우주로부터 발신된 신호를 포착하기 위한 안테나와도 같다. 타원형은 하늘, 세계, 우주 자체를 상징하는 도형이자 그가 상상하는 우주의 얼굴이기도 하다. 또한 그 머리는 먼 우주의 정기를 자신의 몸으로 빨아들이기 위해 작동하고 있는 두 개의 기관이 서로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이 눈은 반복교차하고 있는 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바 그것은 팽창하고 있는 우주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간여행자는 우주로의 유영을 꿈꾸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며 동시에 우주를 인간의 형상을 빌어 상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주의 바다에서 자신의 존재를 관조하는 이 시간여행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먼 과거이거나 그것보다 더 먼 미래의 세계일 수도 있고, 우주의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추진체가 기착할 곳은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마음속이다. 이 모험에 찬 비행을 위해 그는 종교적 명상과 초월, 형이상학의 도움을 받고 있다.
신은숙의 작품에서 떠올릴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은 질서, 조화, 안정, 균형 등이다. 이러한 특징은 기본적으로 돌을 재료로 하되 좌우대칭이 분명하다든지 마치 자로 잰 듯 비율을 계산한 형태, 깔끔한 마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나치게 정제된 형태에서 볼 수 있는 형식적 완결성이 작가의 손길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여백을 차단하고 작품을 장식적으로 만드는 한계는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지하고 심각한 의미와 내용은 그 한계조차 뛰어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의미가 형식을 추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윤회의 카르마를 넘어서서 자아와 우주가 합일된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열망이 작동하고 있다. 한 사물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그대로 우주일 수 있다는 생각은 만물과 융화하고 걸림이 없음을 의미하는 원융무애(圓融无涯)의 철학과 맞닿은 것으로 시간여행자가 최종적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세계가 바로 이러한 경지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 작가는 불교, 특히 밀교계열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이자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만다라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아주 작을 수도 있지만 우주이기도 한 자기 마음속으로의 여행을 위해 그는 지금까지 해왔던 전통적인 조각뿐만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라 부를만한 변화를 시도했다. 먼저 조각과 영상의 결합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마음의 영토

지금껏 조각, 그것도 석조에 전념해온 그에게 영상작업은 시도부터 모험일 수 있다. 그러나 의미의 소통을 위해 그가 영상을 선택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이미 이전에 제작한 바 있던 아홉 개의 판석에 음각으로 새긴 만다라의 도형을 새롭게 제작하고 그 가운데 수인(手印)을 촬영한 영상작업을 배치한 작업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원래 인도의 요가수행법을 기원으로 하는 수인은 선정인(禪定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초전법륜인(初轉法輪印)처럼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과 붓다의 재세시 행하셨던 일이나 사건을 나타내기 위한 손짓을 일컫기도 하지만 지권인(智拳印),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 경우 존상을 지시하는 기능도 있다. 그밖에도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 등은 중생구제란 불교의 근본원리를 나타내며, 연꽃이나 정병을 든 관음보살이나 검(劍)을 든 문수보살의 손동작도 계인(契印)에 해당한다. 신은숙은 손가락이 수려하고 손동작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연기자를 섭외해 불·보살의 깨달은 진리(內證)나 서원(誓願)의 덕을 여러 모양의 손동작이나 손가락으로 표현한 외상(外相)인 수인을 연기하도록 했다. 이렇게 촬영된 수인들을 두루 모아 편집한 영상을 좌우로 각각 아홉 개씩 나란히 배치된 만다라 도형 가운데 설치한 작품은 각자 독립된 만다라의 세계를 보여줌과 아울러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만다라로 통합되고 있다. 좌우의 대칭하는 아홉 개의 패널에 새겨진 기하학적 도형 속의 기호들이 천·지·인, 태극(太極), 핵(核), 우주의 중심, 에너지, 장엄한 공허 등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가운데 만다라를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표현한 패널 속에 매립된 모니터의 수인은 이 삼라만상의 온갖 것들을 사유하는 마음의 영역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면 복잡하지만 일정한 구성의 원칙에 따라 배열된 도형들은 이 수인의 열쇠에 의해 열릴 수 있는 비밀의 방이자 마음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무용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무드라와 흑백의 대조를 통해 표현한 세계, 그것은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여행을 하는 마음이 도달하고자 하는 청정한 땅인 마음의 영토인 것이다.

만다라

비디오작업은 만다라와 함께 상영되는 수인이나 시간여행자의 가슴에 설치된 모니터처럼 조각의 일부이거나 보조적 장치로 도입되기도 하지만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돼 싱글채널로 발표된다. 미궁처럼 긴 터널로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생성과 천체의 운행, 행성의 출현, 물·불·공기·흙의 사원소, 달의 참과 기움 등 자연현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이 비디오작업은 신은숙이 그동안 추구해왔던 시간여행이란 주제를 압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장의 한 벽면을 차지하는 이 싱글채널 비디오작업은 입체로 제작된 시간여행자가 운행할 시간과 공간을 시각화한 것이다. 전체작품을 하나의 구조로 볼 때 비디오작업은 작품의 주제가 만다라로 통합됨을 알려주는 표지(標識)라고 할 수 있다. 원, 삼각형, 시각형 등의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적 도형으로 구축된 조각작업이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완전함에의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천체를 암시하는 타원형 속에 갇힌 뫼비우스의 영원성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광대한 우주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한없이 나약하면서도 우주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깊이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작가는 이 작품들을 통해 마음이란 자아의 거울이기도 하지만 우주까지도 담아낼 수 있는 대양(大洋)과도 같은 것임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작품의 규격을 확대할 경우 기념비성이 두드러질 작품의 구조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고전적 천체관을 나타냄과 아울러 자기초월을 꿈꾸는 그가 도달해야 할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입구이자 출구이기도 하다. 각자 독립된 형태를 지닌 이 작품들을 통합하는 것이 바로 만다라의 세계이다. 신화와 상상, 종교와 형이상학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큰 구조가 이 만다라이다. 그것은 시간여행자가 여행하는 세계이자 그의 시간여행이 만들어낸 궤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들은 내부에 우주를 품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만다라란 구조를 구성하는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 속에서 시간여행자는 도처에 편재한다. 이것은 진리란 자연과 우주 모든 곳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역시 우주의 진리를 품을 수 있는 세계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예술의 심미성을 넘어서서 종교적 초월을 추구하고 있는 그의 작품의 출발점이 마음임을 알 수 있다. 관조와 사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조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기성의 표현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나 그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로부터 해방’일 것이다. 관상(觀想)의 대상인 만다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야말로 진정한 해방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깨달음은 그에게 여전히 과제이며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 그의 작품인 것이다.


마음의 전체성을 향한 상징으로서의 조각

임 두 빈 (미술평론가)
신은숙의 작업장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작품은 검은 색의 돌로 만들어 놓은
독특한 분위기의 조각작품들이었다. 마치 의 심리적 상징체(心理的 象徵體
)로서의 형상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기에 나는 혼잣말 하듯 작품들을 향해 나의 생각을
말했다. 나의 이 말에 신은숙은 반색을 하며 정확히 보았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검은 돌에 조각한 그리 크지않은 조각품들은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전체적인 형태구조로 보아 분명, 만다라(曼茶羅: Mandala)를 상징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만다라 형태가 아닌 신은숙에 의해 현대적인 조형어법으로 재창조된 만다라를 상징하는
조각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만다라는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본질, 진수(眞髓)를 뜻하는 Manda와 소유를 뜻하는 접미사
la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말로써, 본질을 소유하는 것이란 의미와 본질을 도해(圖解)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니는 말인데, 오래 전부터 불교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수많은 만다라가
그려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는 원과 사각형의 기하학적 구조에 의한
독특한 시각미로 유명하다.
현대의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이러한 동양의 만다라 형상에서 심리적
상징체로서의 핵심적 의미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연구의 중요한 대상으로
다루어왔다. 에 의해 연구된 만다라는 존재의 중심이자 목표이며 마음의
전체성으로서의 자아의 상징으로서 여겨지고 있다.
신은숙은 이러한 의 사상과 동양사상에 심취하고 그것을 그녀의 조각작품에
조형화시켜 놓은 것이다.
<시간의 문>, <본질의 문>, <시간행자>, <나비꿈>, 신은숙이 이번 조각전에 출품한
작품제목들이다.
<시간의 문>이란 이름이 붙은 작품은 2점인데, 하나는 직사각형의 육중한 석판 2장을
서로 비스듬히 마주보게 세우고, 석판의 중앙에서 약간 아래 쪽에 구멍을 뚫은 후, 석판
2장을 관통하여 돌 원기둥을 수평으로 걸쳐 놓은 작품이다. 수평으로 설치된 돌 원기둥의
가운데에는 두꺼운 원반 형태의 돌구조물이 만들어져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주술적 조형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또 다른 작품은 사각기둥 2개 위에 연이어 특이한
형태의 기하학적 구조물을 쌓아올려 문을 연상케 하는 돌 조각상을 세운 후, 사각기둥
사이에 길쭉한 원추형의 돌을 세워놓아 완성한 작품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이
작품에는 작가의 기하학적 형태구성미에 대한 강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신은숙은 80년대에는 주로 원(圓)을 기본형태로 하면서 그것에 다양한 변화를 주는
유기적인 자유곡면체의 작품을 만들었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미지의 생명체와도 같이
원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작품들은 부드럽게 대기를 진동시키며 시선을 끄는 조형적
긴장감을 지녔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녀의 작품세계에 변화가 오게 되었는데
부드러운 유기적 형태가 직선형의 기하학적 구조체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번 조각전의 작품들도 형태적으로는 가하학적 구조체에 대한 관심의 연장으로
보여진다. 그러면서도 강하게 변화가 느껴지는 것은 만다라상의 현대적 구체화이다. 특히
<본질의 문> 연작들은 계단식 형태와 사각 속의 태극무늬, 대칭적 구조 등이 어울려 심리적
상징체로서의 분위기를 띄면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장식미에 함몰된 위험성만
피한다면 앞으로의 연구결과에 따라 그녀의 조각세계에 새로운 독창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본질의 문>, 자아와 우주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구도의 문이다. 아니, 자아와
우주의 실상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우리에게 완전히 열려있던 것이나, 우리가
모르고 있었기에 은폐된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따라서 본질의 문은 우리의 무지를 여는
구도의 문이다. 신은숙은 이들 작품에서 자아의 깨달음을 찾아 내면적 구도의 길에 나선 그
자신의 영(靈)적 움직임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간여행자>는 인체를 추상화시켜 변형한 흰 돌 위에 갸름한 럭비공 형태의 무늬 돌을
마치 머리처럼 결합시켜 완성한 작품인데, 어떻게 보면 외계인 같기도 한 이 조각작품은
진리를 찾아 내적 구도의 여행길에 나선 구도자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속의 먼지와

오염된 일상인들에게 영원한 깨달음을 찾아 떠난 구도자는 항상 이방인이자 외계인처럼
느껴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라고 작가는 생각한 것일까?
<나비꿈>은 장자(莊子)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기하학적으로 변형한 태극의 두
원형을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결합하여 그 사이에 사각의 만다라 상징형을 조각해 넣은
작품이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생각하고 만든 작품일까?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작가의
생각을 앞서가고 있는 것인가?
“장주(莊周)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면서도 자기가 원래 장주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문득 깨어나 보니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일까”
신은숙의 작품들은 형태구조상 다양한 듯하면서도 의미내용적으로는 일관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가가 지닌 정신의 폭을 생각할 때, 앞으로 내면의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조각표현의 필연성을 보다 밀도있게 확보한다면 크게 비상할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1995년 10월 제3회 개인전 서문

초월적 시간과 공간이 함축된 추상조각
-<문(門)> 연작에 나타난 신화(神話)를 중심으로-

유재길 (미술평론가,홍익대학교 교수)
신은숙(申銀淑) 조각은 화강석의 견고한 볼륨으로 개인적 신화를 담고 있다. 이것은
엄격하게 계산된 형태와 대칭적 균형을 갖춘 아름다운 구성체로 초월적 시간과 공간의
함축이다. 사각형과 원, 원통, 원뿔 등 단순한 추상적 형태는 그의 조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로 절대적 순수미를 추구한다. 그 속에는 차가운 추상의 견고한
구축성과 불규칙한 표면의 뜨거운 감성적 표현이 어우러지고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추구하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초월적 시간과 공간표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그린 개인적인 신화는 ‘문(門)’이라는 구체적 형상을 통해 나타난다. 여기서
문은 현실적인 의미의 단순한 통로의 개념보다 신성한 공간으로 초월적 성격을 가진
연결 지점이다. 그의 신화에 신(神)들은 등장하지 않으나 상징적 문의 이미지를 통해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추상적 형상과 기념비들이 나타난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초현실이라는 두 차원의 연결고리로 문의 신화는 절대적 미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작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조각 예술로
이야기될 수 있다.
현재 그의 조각 개념은 ‘80년대 인체 이미지’ 변형과 ’90년대 초 ‘조각-건축’ 작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 그의 작업은 단순한 인체변형의 볼륨 작업이라기 보다 인간과
자연과의 상징적 이미지 추구였다. 여기서 작가는 원(圓)의 철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둥근 형태의 추상적 인체조각을 만든다. 통일된 원의 구성체로 초기 작업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였다. 여기서 구멍 뚫리고 변형된 구체(求體) 작업은
내부와 외부,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자아와 비자아의 양극을 분리하거나 합치시키는
조형적 특성을 갖는다. 점차 이러한 작업은 ’90년대로 넘어 들어오면서 ‘조각-
건축’이라는 구축적인 환경조각으로 변모하고 공간의 확장을 실험하게 된다.
’9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변형된 인체 이미지 조각을 거쳐 제3의 단계인 건축학적
구조로 발전, ‘조각-건축’의 개념조각으로 변모한다. 이는 작가의 자연과 삶의 깊이를
담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이며, 건축적 균형과 조각적 볼륨의 조형 모색이었다.
여기서도 그는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꿈꾸면서 투박하고 거친 돌과 오랜 시간 시름을
한다. 스스로 돌 쟁이라고 말하면서 고통스런 멍에를 짊어지듯 돌에 매달려 자신의
형상을 깎고 다듬는 작업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각-건축’작업은 ‘서구적인 기하학이 아니라 한국의 기하학- 전통적 건축, 공예에
나타난 것’이며 ‘수평적 형태와 수직적 형태를 결합한 것, 반아치 형태를 기대듯이
괴인 것, 두개의 네모진 형태 위에 엇갈리게 물려놓은 네모꼴 등이 돌의 곡예처럼
긴장감’을 주고 있다. 때로 ‘조각-건축’작업은 실제 환경에 맞춰 건축 조형물로
실현되기도 하였으며, 열려진 형태와 공간의 변화로 독창적인 조형미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라고 미술평론가 정병관씨는 지적한다.
’90년대 중반 이후의 변화는 초반보다 작품의 규모나 양적인 것이 축소된 느낌이며,
이를 극복하고자 작가는 작품하나하나에는 긴장감을 주는 구성력과 완성도를 초점을
맞춘다. 주제 면에 있어서는 전보다 더욱 확고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는 내용으로 종교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기하학적 추상조각으로 대칭적
균형의 아름다움을 재현시키고 주술적 성격의 신화를 그리고자 한 그의 작품은
살아있는 상상력,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근작인 <문(門)>의 연작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상상의 공간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문은 물리적 공간의 통로가 아니라 시간과 시간을 연결시켜주는 여러 차원의
통로이며,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상징적 추상 형태이다. 작가는 ‘문(門)’의 의미를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현재의 상황표현”이라고 하면서 “시간의 간극 속에서

존재하는 실체와 사물에서의 체험을 문이라는 형상으로 상징”하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조형적인 특성으로 <문>연작에는 만다라와 같은 이미지 묘사와 원이나 삼각형,
사각형이 중심이 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신은숙은 평면과 부조, 그리고 건축적 공간을
구축하면서 상상의 장(場)을 마련한다. 그곳은 “한 인간의 염원으로서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이며, 또한 과거의 장소이거나 현재의 삶에 나타나는 현장과 내일 우리가 가야
할 피안의 세계” 라고 작가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연작 조각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장소와 시점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우주의 음양(陰陽)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장소와 시간의 집합으로 확장된
공간을 만든다. 이러한 공간의 확장 작업은 환경조각으로 이루어져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광장의 이미지와 원이나 사각, 삼각형 등 기하학적 형태의 조각은
‘조각-건축’으로 주목 받았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오벨리스크 형태의 삼각형 수직 기둥의 석조작품과
벽면에 부착된 세개의 청동 부조일 것이다. 가운데는 신성한 공간으로 천(天), 지(地) ,
인(인)이 한곳에 모이는 상징적 기념물로 제1의 <문>이 구축되고, 벽면에는 청동으로
우주적 공간 속에서 인간 영성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만다라가 그려진다. 오석과
천안석의 재질을 살려 표면효과를 높인 이러한 작업은 ‘인간과 우주의 합일’을
구체적으로 조형화 시킨 것이며, 이후 작가는 기하학적 형태의 조형적 실험에서
벗어나 내면의 상징성과 함께 다양한 공간 표현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다.
<문(門)>연작은 하나의 덩어리로 형성된 단일성보다 여러 개의 작고 큰 덩어리가
조립식으로 결합된 모습을 갖는다. 마치 우리 고유의 석탑이나 석등, 건축에서 보듯
눈에 보이지 않는 역학적 힘을 쐐기 형태로 나타내는 등 시간의 축적과 공간의 축적이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작은 화강석 작품 역시, 현실적 공간과 무한의 공간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그려지는 독립된
그의 조각은 때로 작가의 의도와 달리 감상자에게 상상의 자유가 주어진다. 즉,
감상자는 자신이 마치 신화(神話) 속의 주인공이 되어 단순한 추상 형태의 침묵 속으로
끌려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상상적 공간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의 숙제는 좀더 확장된 공간 작업으로 환경조각과 심도 있는 상징적
조형세계의 구축이다. 또한 몇몇 개성적인 조형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형태들은 기하학적 추상조각이나 미니멀리즘관의 유사성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약해진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하기 위한 제작과 실험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자신감을 갖고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한 볼륨에서 벗어나는
청동 부조 작업이나 조립식 건축조각의 조형성에 더욱 애착을 갖고 독자적 성격을
키워나가야 한다.
조각가 신은숙은 무엇보다도 종교적이며 철학적 관념의 세계를 자신의 독자적
조형작업으로 이끌어내려 한다.그는 여러 차원을 넘나들면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상황,
그리고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조형적 특성에 있어서도
장식성이 모두 제거된 단순한 형태의 그의 화강석 조각은 그 자체가 완벽한 균형과
볼륨의 구성체로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그의 조각에 나타난 볼륨의 선적(線的)
움직임은 동적인 것을 거부하면서 조용히 정지된 듯 서있다. 감상자에게 무언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의 조각은 사색적이며, 이제 그의 작품은 개인적 신화를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 형태와 풍부한 감성으로 잘 표현된 조각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Starting point and returning point of time travel, and liberation from self
Choi Tae Man, Art Critic
Time Traveler
“Time Traveler”, a work of Shin, Eun Sook, presents a hope of the artist herself frequently crossing the earth and the
universe, reality and ideology, and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 future life after death while transcending time and
space. And now the time traveler with a simplified structure and shape abstracted from human body has become the
symbol and emblem of the artist own. The trunk of the body built up vertically from the surface of the land seems a
rocket that will be shot into the air immediately, and the elliptical head put up on the trunk looks like an antenna to
detect signals from the universe. Ellipse is a figure symbolizing heavens, world, and universe and also the face of the
universe that she imagines. And the head has a set of eyes, which are about to draw the spirit of the universe. The
eyes formed with circles are constantly intersecting each other to signify a universe space being expanded. Thus, the
time traveler becomes a reflection of the artist herself who dreams a travel in the space and also becomes a symbol of
the universe with a human figure. Where does the time traveler who contemplates himself in the sea of the universe
desire to arrive at? It could be a far past, a far world in future, or a mind of the universe. But a place where the
propeller will arrive at must be in the heart of the artist. The artist has expired from religious meditation,
transcendence, and metaphysics for her flight with full of adventures. The characteristics of this particular artist’s
works are order, harmony, stability, and equilibrium. The artist chooses stones as her basic material and sculptures it
with perfect symmetry, exact ratios, and clean finish to emphasize her unique style. The conventional completion of
excessively perfect symmetry doesn’t allow audience to share the feelings of the artist and limits the art work as only
a decoration, yet the significant meaning and contents in the sculpture still can be conveyed clearly to overcome the
limits. In other words, the meaning transcends the style. In her works, a desire is being operated to transcend the
rebirth of Karma and to present a universe in visual, which meets the ecumenical philosophy where should be the
time traveler’s final destination. And the artist has gone into the world of Mandala expressing the truth of the
universe and the figure of spiritual awakening in Buddhism especially Esoteric Buddhism. In order to travel in her
mind, which is very small but could be a universe, she tried a change that could be called as a conversion of thinking
and traditional sculpture that she has done until now. Her first challenge was fusion of sculpture and video.
Territory of mind
For the artist who has committed herself to do sculpture especially stone sculpture, it could be an adventure for her
from the very beginning of image working. But it was a right thing to do when she had selected video for
communication of ideas. She manufactured nine stone plates with 9 different engraved patterns of mandalas and
played the mudra (the Buddhist hand gestures) images, and it would be a good example of her new experiment. The
hand signs, which is originated from yoga in India, is called as mudra to present event, understanding and teaching of
Buddha as like as the Gesture of Meditation (Samadhi mudra), Earth-Touching Gesture (Bhumi-sparsha mudra) and
Turning the Dharma Wheel (dharmachakra mudra). But for the cases of Supreme Wisdom Mudra and Amitabha 9
Hand Gestures, they function as indicating respecting images as well. In addition, Abhaya Mudra and Varada Mudra,
they represent the principles of salvation in Buddhism. The artist selected many good hand performers and made
them to perform various kinds of hand motions virtues of the truth and offerings that Buddha had understood
spiritually, The hand images that were photographed like such way have been arranged in the figure of Mandala that
presents independent worlds of Mandalas with each other and an integrated world of that as well. The symbols in the
figure engraved with nine panels symbolize heaven, earth, mankind, the Great Absolute, nucleus, the center of the
universe, energy, grand vacant, etc. and the hand image of the monitor in expressed by simple geometrical figures in
the central Mandala could present the territory of a mind possessing all things in the universe. The figures that are
very complicated but arranged in an order could be secret room or mind map that can be opened the key of the hand
image. The world with dancing esthetic beauty and contrast of black and white which is the territory of clean mind
intending to arrive at the destination of travel transcending the boundaries of holiness and living.
Mandala
In some cases a video job is introduced as a part of sculpture as a monitor established in hand image or time traveler,
but it is presented independently as a single work as well. The video work showing a panorama of natural
phenomena including generation of the universe, operations of space objects, emerging of planets, the four elements
of water, fire, air, and soil, full of slant of the moon, etc. could be a summary of the subjects of time travel that have
been pursued by the artist. The single channel video work that occupies the whole wall is visualized for the time and
space where the subject of the work will travel. If the sculpture work constructed with geometrical figures including
basic circles, triangles, and rectangles could show a direction to the completeness that cannot be returned, the
eternality of Mobius confined in the ellipse that hints celestial bodies could symbolize the time and space of the
universe that has no starting point and not ending point. The artist could intend to express that mind is a mirror for
oneself and an ocean that can occupy the universe.
The structure of the work gives expression of classic celestial concept that is ‘the Day round place’ and also the
entrance and exit that someone must pass for in order to enter in the world where he desires to arrive at. An
integration of the works with independent styles is just the world of Mandala. The great structure that makes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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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s transcending myth, imagination, religion, and metaphysics to be stable is very Mandala, which could be the
world where a time traveler takes a journey and also the track that the time traveler forms. In the structure, time
travelers are unevenly distributed at every corner, where the truth exists in all places of the nature and the universe
and the mind of mankind can hold the truth of the world as well. Therefore we can come into understand that the
starting point of her works pursuing religious transcendence by passing over artistic esthetic beauty is just the mind of
mankind. In order to express a metaphysical world by using sculpture that can be attained through contemplation and
thinking, the artist follows the existing traditions of expressions, what the artist would desire to express in her works
could be “liberation from self”. The state free from to make a Mandala forcibly, which the object of contemplation
can give a promise of true liberation. Such great understanding is still a subject for the artist and what expresses the
desire to attain at the subject is a work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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