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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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익훈

작가 작품

강아지 풀을 든 소년(a boy with a foxtail)

steel, LED, urethane paint_200_490_490mm(H)_2019

균형잡기(balancing)

steel, LED,urethane paint_280_520_535mm(H)_2020

나무와 소년 (a boy hanging from a tree)

steel, LED,urethane paint_230_480_440mm(H)_2020

모래시계와 소녀(a sandglass and a girl)

steel, LED,urethane paint_260_520_490mm(H)_2020

바이올린 켜는 소년(a boy playing the violin)

steel, LED,urethane paint_220_500_510mm(H)_2020

새와 마주하는 소녀(a girl facing a bird))

steel, LED, urethane paint_320_500_600mm(H)_2018

장난감 비행기를 든 소년(a boy with a toy airplane)

steel, LED, urethane paint_260_570_550mm(H)_2019

춤추는 소녀(a dancing girl)

steel, LED_urethane paint_230_520_530mm(H)_2020

풍선을 부는 소녀(a girl blowing balloons)

steel, LED, urethane paint_260_500_530(H)mm_2019

하트무늬 치마를 입은 소녀(a girl in a heart skirt)

steel, LED, urethane paint_270_500_580mm(H)_2018

Propagation(야경)

stainless steel, LED_3000_3000_3300mm(H)_2013

Propagation(주경)

stainless steel, LED_3000_3000_3300mm(H)_2013

SPACE_C

stainless steel, LED_Installation of variable_2017

SPACE_I

stainless steel, LED_Installation of variable_2020

작가 프로필

<학력>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조소전공) 박사과정 수료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소과 졸업
강원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조소전공) 졸업
​<개인전>
2020 Illusion of sculpture: ‘The moment in life’ (김세중미술관, 서울)
Illusion of sculpture: ‘Between material and shadow’ (코사스페이스, 서울)
2019 Illusion of sculpture: ‘Between material and shadow’ (스트리트뮤지엄, 서울)
2018 Illusion of sculpture: ‘Between material and shadow’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17 Illusion of sculpture: ‘Infinity Space’ (키미아트, 서울)외 7회
​<2인전>
2018 피어나는 동심 – 엄익훈, 빅터조 (리나갤러리, 서울)
​​<기획, 초대전>
​​2020
이른 봄나들이 – ‘예술가의 작업실’ (여주미술관, 여주)
자선 + 프리미엄 경매 (K옥션, 서울)
예술섬의 사색∥ (예술의 섬 장도 야외 일대, 여수)
아빠, 미술관 가자! – 미술과 과학, 그리고 형식의 융합 (여주시미술관 아트뮤지엄 려, 여주)
2019
제주도립미술관 10주년 기념전 – ‘생활’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Just Enjoy It (포스코미술관, 서울)
상반된 측면의 공존 (표갤러리, 서울)
보통의 거짓말 (서울미술관, 서울)
AHAF (파라다이스호텔, 부산)
미디어시티 (양평군립미술관, 양평)
숨은그림찾기 (GS칼텍스 예울마루, 여수)
청주공예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 청주)
2018
Art Hsin Chu (Qing Art gallery, Taiwan)
Hommage to POSCO (포스코미술관, 서울)
양평에 온 라틴미술 (양평군립미술관, 양평)
납작한 가장자리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청주)
AHAF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파르나스, 서울)
32회 한국현대조각초대전 (MBC, 춘천)
조각, 세상만사 (금보성아트센터, 서울)
아트광주18 (김대중컨벤션센터, 광주)
2017
Art Lab (표갤러리, 서울)
Steel material & Immaterial (포스코 갤러리, 포항시립미술관, 포항)
Summer Group Show (아트모라, 뉴저지)
AHAF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파르나스, 서울)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 ‘Hello steel’ (영일대해수욕장 일원, 포항)
대청호 프로젝트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청주)
3회 국제교류예술제 (63아트스페이스, 창원)
2016
Light Mapping (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 뉴욕)

The Illusion of Mind (키미아트, 서울)
Spoon Art Show (KINTEX, 일산)
다시, 빛을 말하다 (BNK 아트갤러리, 부산)
2015
KIAF (COEX, 서울)
Affordable art fair (DDP, 서울)
Sculptures & New contemporary (쥴리아나 갤러리, 서울)
Art Busan (BEXCO, 부산)
​한국현대조각 아카이브 -2 (코사스페이스, 서울)
SUMMER, 도시와 이미지 (아라아트센터, 서울)
공간의 조율 (유중아트센터, 서울)외 200여 회.
<수상>
2019 문화예술유공표창 (경기도)
2016 고등미술 창작교과서 _ ‘SPACE_No.2’작 수록 <주>천재교육
2014 고등미술 창작교과서 _ ‘큐피트’작 수록 135p <주>교학사
2013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 _ 지원금 (버몬트스튜디오센터)
2012 제26회 한국현대조각초대전 _ 작품상 (춘천 MBC)
2011 경인미술대전 _ 우수상 (부천문화재단)
2007 갤러리 J1 _ 선정작가 _ 지원금 (갤러리 J1)
2002 3회 청년작가 야외조각전 _ 선정작가 (경기문화재단)
2001 전국대학미전 _ 동상 (교육부)
<레지던시>
2013 버몬트스튜디오센터 레지던시 프로그램 (버몬트 주, 미국)
<소장품> (개인소장 제외)
포항시립미술관, 수원월드컵경기장, 이천온천국제조각공원, DMZ 두타연, (주)하이플렉스, 이샘병원,
키미아트, 포항문화재단, Unique Technology Integral, 양평군립미술관, 여주시미술관 아트뮤지엄 려,
갤러리 J1, 갤러리 위
<현재>
한국미술협회, 한국조각가협회, 한국미학예술학회 회원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 추진위원, 강원대학교 강사

작가 노트

				"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드는 사람 만이 가장 원대한 현실을 창조해낼 것이다."
역사 적으로 볼 때 예술은 작가의 상상 혹은 비현실 속의 무언가를 현실 속에 존재 시키기 위해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시 시대의 동굴 벽화는 주술적 힘을 담아 형상 이미지를 통해 욕망을
실현 시키는 수단 이었으며, 이집트 미술은 삶과 죽음 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영원성의 실현을
위해 발전 시켰다. 그리스 미술 역시 조화와 균형이라는 개념을 이상화 시키기 위해 형상의 비례에
집중하였으며, 중세시대는 현실 사회의 형상보다 종교적 차원에서 미술이 큰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외에, 이후 많은 사조 들이 결국 현실에서 현물로서의 존재에 집중했다기 보다는 예술 자체의 고민과
같은 본질, 진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 철학의 탐구와 발전으로 그 모습을 변화시켜왔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미술은 그 결과물의 형상으로 인해 현실의 어떤 물질을 재현 한다고 여겨지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그 목적은 예술 차체가 그 자신의 본질, 비현실의 개념을 현실로 실현 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 이라는 것 차체가 현실 속에 물질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에서 상품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예술가는 비현실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영혼을 상품화한다. 작가가
비현실을 현실로 바꾸는 과정에서, 모든 비현실이나 상상은 최초의 그 원대했던 가능성을 물질화
시키는 동시에 제한해 버릴 수 밖에 없는 딜레마를 지니며, 그것은 결국에 상품으로서 가치가
매겨지게 된다.
이 지점에서 본인은 예술, 작가, 혹은 예술 작품이 어떤 차원에 머물고 있는 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는데 결론은 이들은 기존의 특정한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닌,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하나의
차원으로 규정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이미지의 홍수를 넘어선 현대 사회에서 다른 장르에
비해 태생적으로 더 물질적 형태를 지니는 시각미술 이미지는 이제 어디에서 혹은 어떤 모습으로 그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일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말처럼 그림자는 그것을 만들어낸 물체와 인접해
있으므로 그 물체가 현존하고 있음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물체가 실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부재를
내포한다. 즉, 그림자는 사물과 닮아 있으면서 사물에 인접해 있지만, 사물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사물이 남겨놓은 일종의 흔적으로 그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다. 이런 면에서 그림자는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현재의 영역에서 사라져 버린 실재가 우리들의 머릿속에 남겨놓은
흔적인 기억과 닮아 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에서 증명하듯 하나의 형상 이미지는 더 이상 그만의 독자적인 아우라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기술의 발전은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을 무한히 복제해버렸다. 나아가 가상
공간은 현실 세계의 현물을 가상 세계의 수치로 변환시켜 버렸다. 우리는 이제 가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점에서 살고 있으며, 근래에는 증강 현실이라는 또 다른 차원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이미 다양한
정보와 이미지들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인간의 의식구조 속에 자리잡은 시점에 각종 정보와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의미와 내용 전달은 점점 소멸되고 사라져 실재와 구분을 하기
어려워졌다. 여기서 본인은 ‘실재하지만 부재하는 것 사이의 경계’ 지점에 관한 의문과 더불어 개개인의
의식과 모호한 시각적 차이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이러한 물음이 작업을 하는 목적인 동시에
이론적인 내용이 되었다. 또한 현시대의 미술은 어떤 모습으로 여타의 이미지와 구별되어 그 존재를
확인 받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한다. 앞서 언급한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직 현실 세계에
물질 영역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미술, 특히 입체미술인 조각은 이 세계에서 물질로써 존재 할 수 밖에
없다고 가정 할 때, 현 시대에서 작품이 그 예술적 가치를 영속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본인은
이러한 여타의 질문들을 그림자라는 모호하지만 뚜렷한 매개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평론


                    실재의 꼴, 조각의 미래

​​

고충환 (Kho, Chung-Hwan 미술평론)

​ 동판이나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자잘하게 자른 다음 접다시피 구부리면 도르르 말린 낙엽처럼도
보이고, 표면에 흰색을 입히면 뼛조각처럼도 보이고, 집적된 형태를 멀리서 보면 물방울처럼도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만든 철물들을 단위구조 삼아 용접으로 덧붙여나가는 방법으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반복과 증식이 만든 형상이랄 수 있겠고,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가 만든
조각이랄 수 있겠다. 처음에 전체 형상은 정형의 평면이었다. 원이나 사각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적 포맷을 따른 것이었다. 비록 정형이라고는 하나, 똑같은 단위구조의 세포들이 전체 형상을
일궈내고 있어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세포들의 집적이 일정한 방향성을 띄고 있어서 마치 조형의
내부로부터 미묘한 파동이나 움직임이 이는 것 같은 시각적이고 광학적인 일루전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이를 바탕으로 정형의 입체를 만들었다. 주로 구와 같은 원형의 형태를 한 조형물들은
세포와 같은 단위구조를 집적해 만든 것인 만큼 속이 비어있고, 보기에 따라선 집적된 뼈의
단면처럼도 보이고 추상적인 빗살문양처럼도 보이는,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린, 분방한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조각에 빛을 도입했다. 구 형태의 조형물
안에 조명을 장착한 것인데,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와 벽면이며 공간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판타지를 연출해 보였다. 그렇게 조각의 영역이며 범주를 공간설치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에 낮과 밤이 도래했다. 조각은 낮과 밤이 다르다. 조명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판이하다. 작가의 조각으로 하여금 이처럼 낮과 밤을 판이하게 만들어준 것은 바로 빛이었고
그림자였다. 빛의 도입이 작가의 조각에 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러나 그 전기가 본격화하기
위해선 좀 더 다른, 좀 더 섬세한 무엇인가와의 접속을 기다려야 했다.
작가의 조각에서 전기와 관련해 보다 흥미로운 경우로는 정형보다는 비정형조각 쪽이다. 똑 같은
단위구조를 모듈 삼아 반복해서 증식해나가는 과정이나 방법은 매 한가지이지만, 이 단위구조들이
모여 일궈내는 전체 형상이 다르다. 정형의 경우엔 원이나 사각형 그리고 구와 같은 기하학적 포맷을
따르고 있어서 그 정형화된 형식을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지만, 비정형의 경우엔 도대체 뭘 겨냥한
건지 아님 알만한 모델을 전제하고 있는지가 오리무중이다. 그저 머리를 비운 채 다만 노동에 충실할
뿐인, 그런 추상조각처럼 보인다. 반복과 증식,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물성과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충실하게 따른, 그런 추상조각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단위구조들이 세포를 이루고 있어서, 그리고 더욱이 세포들의 집적이 일정한 방향성을
견지하고 있어서 어떤 움직임이 감지되고 일말의 재현적인 형상이 연상된다. 이를테면 미래파
조각에서의 동시성의 표현에서처럼 이행중인 형태를 연상시키고,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을
연상시키고, 한 방향으로 감기면서 휘도는 회오리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특히 살바도르 달리의
해체되고 있는 사물을 연상시킨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그리고 정형이든 비정형이든 대개 어떤 형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처럼 해체되고 있는 사물은 이런 전형적인
경우와는 배리 되고 역류되는 경우로서 조형에 대한 태도며 입장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만든다(달리
외에도 입체파 그림에서 이런 해체되는 사물대상의 경우를 엿볼 수가 있는데, 전체 형상을 자잘한
조각들로 분화시켜놓고 있는 것이 작가의 조각과도 통한다).
이런 재고는 작가의 조각이 단위구조들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어서 가능해진 착상이며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하기에 따라서 형태의 구축을 향할 수도 그리고 형태의 해체를 향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해체를 지향하는 조각 아님 조형에 대해선 차후로도 좀 더 심화시켜나갈 수 있는 대목이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이런 예의 연상이 가능한 것은 작가의 조각이 갖는 회화적인 성질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의 조각은 말하자면 조각이면서 동시에 회화적이다. 회화적인 조각이라고나
할까. 평면과 입체, 조각과 회화적 일루전, 나아가 실재와 이미지, 실체와 반영 혹은 그림자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허무는 소위 탈 경계의 인식이 작가의 조각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조각에 빛을 끌어들이는 식의 소위 빛 조각을 경유해, 조각에 그림자를
끌어들이는 그림자 조각 쪽으로 이행한다. 빛이 어떤 물질 내지는 물체(작가의 경우에는 조형)를
매개로 반영을 만들고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이행, 이를테면 빛

조각으로부터 그림자 조각 쪽으로의 이행은 자연스럽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의 비정형 조각 자체는
추상조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조명을 장착하면, 조형물 그대로의 실루엣이 벽면이며 공간에
투사된다. 조형물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조형물의 전면에서 벽 쪽으로 조명을 쏘이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동원된 광원 수만큼의 그림자를 만들 수도 있고, 여기에 조명의 강도며 각도 여하에 따라서
그림자를 원하는 형태로 왜곡시킬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 비록 그림자이지만 가변적인 형태를
실현할 수 있고, 그림자인 탓에 그림자다운 허상에 걸 맞는 비결정적인 형태를 실현할 수가 있다.
허상에 정해진 형식이며 결정적인 형태가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을 미혹시키는 이미지가
허상이며(이미지란 원래 귀신이며 허깨비를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이런 허상 자체는 이미지가
존재하는 방식과 관련한 허다한,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잠자고 있을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여하튼, 전통적으로 조각은 추상이든 구상이든 할 것 없이 고정된 한 순간의 포착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처럼 가변적이고 비결정적인 형태며 더욱이 그 실체가 희박한 형태를 실현하고 있는 그림자
조각은 이번에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만든다. 추상조각 자체를 통해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그림자 조각을 통해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반성하게 한다. 변증법으로
치자면 하나의 조형 속에 정과 반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추상조각과 그림자조각이
한 공간에서 같이 제시되는 것을 통해 합에 이른 상태를 예시해준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조각의
개념에 대한 논평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타조각을 실현하고 있고, 여기에 조각의
개념을 일종의 변증법적 알레고리로, 이를테면 실재와 일루전, 실상과 허상의 관계라고 하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까지 확장 심화시켜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림자가 만들어놓고 있는 형태며 그 의미를 보자. 보통 조명으로 치자면,
그림자를 없애고 조형물 자체를 오롯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때론 조형물에 어떤 극적인
대비효과나 은근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한마디로 조형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연출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쓰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가는 거꾸로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조명을
동원한다. 더욱이 그렇게 드러나 보인 그림자의 실상이 알만한 구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서 정작
그림자의 원인에 해당하는 추상조각과는 배리 되고 배치된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신화를 다룬 전작에서의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론과 다프네, 피그말리온,
밀로의 비너스, 아프로디테의 탄생, 큐피드, 승리의 여신 니케,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그리고 나비와 같은. 그리고 대중문화를 테마로 한 근작에서의
팝아트의 아이콘 앤디 워홀,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 대중문화의 아이콘 마릴린 몬로와 같은. 이
테마며 소재들 가운데 특히 나비는 현실과 꿈, 현실과 비현실의 미묘한 경계를 다룬 장자몽을
암시하고 있고, 그 암시는 추상적 형태와 구상적 형태가 실재감을 놓고 다투는 작가의 작업과도
통하는 점이 있어서 작가의 작업을 상징적으로 대변해주는 경우로 볼만 하다. 여하튼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정작 감각적 실재의 흔들릴 수 없는 근거가 되고 있는 질료 부분은 추상으로 드러나고, 그
실체감이 희박한 의심스러운 일루전 부분은 감각적 실재를 닮았다. 감각적 실재를 모방하는 그림자?
구상은 추상의 미래? 추상이 그 속에 숨겨놓고 있는 구상? 추상적 형태가 잉태하고 있는 형상?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감각적 실재와 일루전, 질료와 이미지, 실재와 허상과의 관계와 관련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 차이며 경계는 선입견에서처럼 그렇게 분명하지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그 관계는 아예 가역적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실재인가. 아님 최소한 실재에 가까운가.
추상조각인가 아님 추상조각이 만들어준 그림자조각인가. 물질로 치자면 추상조각이 실재에 가깝고,
알만한 감각적 형상으로 치자면 그림자조각이 실재에 가깝다. 여기에 추상조각이 모더니즘을
실현한다면, 그렇다면 그림자조각은 무엇을 실현하는가. 무엇을 예시해주는가.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실재의 꼴을 더듬게 만들고, 조각의 미래를 더듬게 만든다.

감각의 변환을 통해 동시적으로 표현되는 실재와 환영

하계훈 (미술평론가)

엄익훈의 작품이 관람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주된 요소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철조
재료의 용접과 성형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의 밀도와 조형성,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유기적으로
증식되어 가는듯한 작품이 점유하는 공간에 창출되는 움직임의 확장이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즉물적
작품이 조명의 개입에 의해 그림자라는 평면적 허상을 만들어내는데, 최근작에서 그 그림자의 형상은
철조 작품의 형상과는 사뭇 다르게 (주로) 인물의 실루엣을 표현해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에는
조각과 화화라는 3차원과 2차원의 대비, 추상성과 구체성, 그리고 실재와 허상의 결합이라는
대조적인 요소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절묘함이 있는 것이다.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엄익훈의 관심이 재료의 물성과 그 재료들 사이의
연결과 접합이 만들어내는 유기체적 확장, 그리고 그러한 물질적 증식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아가는
모종의 내러티브 및 정신적 서사와 사유를 시각적으로 전개시켜 나아가는데 있다는 점이다. 동판이나
스테인리스 스틸을 자르고 구부리고 다듬어서 용접하여 형상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용접이라는
접합행위에 의해 확장되는 작품이 비정형의 유기체적 증식을 진행시키면서 점유하는 공간은 작가뿐
아니라 관람객들의 상상과 사유가 담겨지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엄익훈은 이렇게 창조되는 공간을
비현실이 현실화되는 과정으로 보았고 그 역할이 바로 작가의 소명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철조 용접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빛과의 결합에 의해 더욱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조형의 지평을
전개시킨다. 엄익훈의 작품이 처음으로 빛과 결합되는 계기는 일정한 볼륨을 갖도록 용접되고 연마된
작품 내부에 자리 잡은 광원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 전시장 벽 위에 그려내는, 폭발성을 머금은
그림자 드로잉이었다. 볼륨을 가진 오브제가 내부로부터 발산하여 투과되는 빛을 인접한 벽면 위에
그림자와 빛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적 요소로 그려내는 작품에서는 입체와 평면, 실제와 허상이
공존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공간에 충만한 작품의 아우라는 관람자들을 현실의 세계에서 초현실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이행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되는 벽면 그림자 드로잉의 특징은 채색 도구나 필기구로 그리는 드로잉과 다르게 벽면에
안료가 물질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과 그 이미지의 성질에 있어서 광원의 위치나 밝기, 벽면과
광원 사이에 개입하는 간섭물체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초점의 명확도 등이 달라지면서 일반
드로잉이 갖기 힘든 역동성과 환상적 일루젼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벽면이나 바닥에 비추는 빛은 조도의 저하와 초점 흐리기 현상이 일어나기도 함으로써 그것이
화면의 표현성을 다채롭게 해주고 시각적 감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조명의 개입이 전제되는 상황에서만 가능할 뿐, 조명이 꺼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상황으로부터 받게 되는 감각의 충격도 예비 되어 있는 셈이다.
서양의 18세기 예술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회화의 기원’이었다. 물론 이 문제는
이보다 훨씬 오래 전인 로마시대 박물학자 플리니(Pliny the Elder)의 궁금증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까지 동의했던 것은 먼 곳으로 떠나는 연인의 모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벽에 그의 그림자 윤곽을 따라 모습을 그려 넣은 에피소드로부터 회화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실재와 허상이 우리의 상상력에 의해 실재와 동일시되는
신화적 차원의 상징성이다. 이와 비슷하게 엄익훈은 자신의 그림자 작품에 대하여 ‘실재하지만
부재하는’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회화의 기원에 관련된 그림자 에피소드와 자신의 작품과의 접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엄익훈의 작품에서 그림자에 집중해보자. 그의 그림자 작품에서는 주로 인물들의 옆모습이 표현이
된다. 인물의 옆모습을 표현하는 전통은 로마시대 동전에 황제의 옆모습을 표현하는 관례에서
시작하여 14세기까지 초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표현형식으로 자리잡아 왔다. 르네상스시기에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정면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물 표현법이 등장하여 초상화의 표현이
자연스러워지고, 18세기 유럽의 상류사회에서 화려함의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초상화의 인물 표현도
화려해지고 그에 따라 제작비용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경제적 이유에서 인물의
옆모습을 윤곽에 따라 그리고 내부를 검게 채우는 간단한 인물 초상화 기법이 도입되게 된 것이다.
엄익훈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실루엣 초상의 속성이 발견된다. 다만 작가의 작품에서는 빛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개입 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엄익훈의 철조 용접 조각은 그
자체로서도 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작가는 여기에 일정 지점으로부터 빛을 내는 조명을 가미하여
철조 조각의 그림자가 인접한 벽면에 비춰지도록 작품을 복합화 시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업의 결과 엄익훈의 조각 작품은 실재하는 물성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그 존재가 감지되지 않는
인물의 허상이 광원의 개입에 의해 그림자 형태로 벽면에 드러나면서 비로소 그 존재감을 암시하게
만들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작업의 성격상 색채의 다채로움이나 디테일의 묘사의 제한성, 인물이나 사물의 측면에 한정된 표현의
제한, 그리고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의 환경적 제한이 따르기는 하지만 엄익훈의 작품이 갖는
호소력은 성실한 손노동으로 창조해내는 철조 오브제의 견고함과 역동성이 빛의 개입에 의해
관람자들의 시선을 또 다른 그림자 이미지로 유도하고 있음으로 해서 관람자들에게 두 방향으로
시선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람자들은 엄익훈의 작품을 선택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고, 또는
동시에 두 가지 감각의 변환을 통해 동시적으로 감상하면서 실제와 허상, 3차원과 2차원, 추상과
구상 등의 대조적 요소들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사유하는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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