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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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

작가 작품

SPACE EVE

35×33××65, 브론즈, 2012

GIGI

45×50×70, 브론즈, 2014

MY FAIR LADY

30×43×45, 브론즈, 2013

SWANLAKE

100×100×70, 브론즈, 2013

환희

45×45×77, 브론즈, 2015

LA GIOCONDA

25×28×50, 브론즈, 2013

BLACK SWAN

500×500×75, 브론즈, 2012

세계사의 4개 사과

3,000×3,000×45, FRP+브론즈, 2012

APHRODITE

40×30×50, 브론즈, 2012

DREAM

30×30×45, 대리석, 2016

THE VIRGIN

25×25×45

ADAM&EVE

225×150×100, FRP, 2015, 거창중앙고등학교

사과밭

1,000×1,000×80, 철사, 201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작가 프로필

1) 홍익대학교경영대학 학장(경제학 빅사)
2) 홍익대학교미스ᅟᅮᆯ대학원(조각전공)졸압
3) 개인전(3회)
가) 제1회조각전(2010.09.10.-13/홍익대학교경영대학휴게실)
나) 제[2회조각전(2013.11.13.-19/LEESEOUL갤러리(인사동)
다) 제3회조각전(2015.05.23.-07.23/마가미술관(용인)
4) 단체잔(힌국조각가협회전/구싱조각회전 등 다수)
5) 공모전수상
가 대한민국미술제(공모전/특선)
나) 목우회(공모전/특선2회)
라) 딘원미술제(특선2회/입선1회)
마) 기독교미술대전(공모전(특선1회)
바) 통일미술축자ᅟᅥᆫ(겅모전/우수상)
사) 기로미술대전(금상)
아) 우ᅟᅡᆯ산미스ᅟᅮᆯ대저ᅟᅡᆫ(특선1회)

작가 노트

								

평론


                    제1회 李 均 彫刻展
(<전시기간:2010년9월10일(금)-9월13일(월)/장소B동2층테라스>)

영혼을 되찾은 이균
글/ 정준모(미술비평, 국민대 초빙교수)

두 영혼을 지닌 로빈슨
‘영혼을 되찾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 균은 만학도인 동시에 청년 조각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강의실이었다. 첫 수업 일에 강의실을 찾은 나는 그곳에서 국제경제학자로 홍익대학교 무역학과 교수를 지낸 조각도 이균을 만난 것이다. 그는 여느 학생들과 달리 진지했고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수업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고, 리포트도 누구보다 먼저 상당한 내용을 제출하였다.
그는 이렇게 그의 이루지 못한 꿈에 다시 도전하고 있었다. 조각을 전공한다는 것은 이론적인 공부도 그렇지만 육체적인 노동을 수반하는 작업인지라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작업하고 이런 저런 것들을 내게 물었다. 대개는 새로운 미술, 즉 현대미술의 동향에 관한 것이었지만 전통 조각이나 미국이나 유럽의 좋은 공부가 될 만 한 미술관들을 이야기 할 때면 메모를 하며 경청을 하곤 했다.
그의 태도는 언제나 성실했다. 요즘 학생(?)이었지만 요즘의 학생들과는 달랐다. 더구나 조각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실기위주의 생각이나 수업태도와는 달리 이론과 미술사에 대한 공부도 매우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가끔 요즘 학생들이 그를 닮아 주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경제학이라는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예술에, 그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기이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조각을 감상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직접 해보자고 나섰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자 아름다운 도전이다. 사실 그의 조각에 대한 애정은 오래 된 것이었다. 그의 조각에 대한 애정은 처음에는 미술전시장 순례이며, 그 순례에서 작품을 소장하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4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그는 만들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평면적인 회화보다는 평면을 입체로 보이게 하는 눈속임이라는 전제가 따르지만 3차원적인 조각은 그런 점에서 회화보다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하지만 입체적인 사고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는 근 40여년을 자신의 말처럼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 무인도(경제학)에서 살면서도 조각이라는 미술이라는 육지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머나먼 항해 끝에 뭍에 올라 드디어 조각칼을 손에 들었고 점토를 만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조각의 세계를 동경했던 그는 이 일을 두고 영혼을 되찾았다고 술회하지만 실은 그에게 경제학이 일모작이었다면 조각은 이모작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가 영혼을 빼앗겼던 경제학에서도 괄목할 학자로서의 업적, 교수로서의 성과를 쌓았기 때문이다. 미술관 관람에서 비롯된 그의 조각에 대한 열정은 그런 점에서 아마추어적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작품과 작품을 대하는 이 점이 매우 좋다. 아무추어 적이라는 말을 우리는 조금 서툴다는 의미로 새기지만, 나는 그의 작업을 대하는 순수함, 진지함 그리고 조각에 대한 무한한 외경심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섣부른 기교나 아이디어에 의존하거나 미디어나 기계류를 사용해서 내용보다는 재미에 방점을 찍는 작업들이 횡행하는 요즘 그의 작업은 마치 기본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기본이 없는 외형만 그럴 듯한 작품보다는 순수하고 성실한 그의 진지한 작업의 과정이 작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난해한 이론이나 미학을 동원하기보다는 참으로 명료한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화두를 전한다. 그런 점에서 어려운 단어로 포장하거나 작품보다 말이 앞서는 그런 미술에 식상한 나로서는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런 점이 좋은 것이다.
그에게 아름다운이란 매우 단순하다. 미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 보통 사람들이 느끼고 사랑하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치장하고 만들어진 아름다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마치 ‘생얼’같은 아름다움이 그의 작품을 감싸고 있다.

사과, 인생을 말하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사과는 매우 상징적이다. 너무 익숙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라서 우리 모두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해 보라면 머뭇거리게 되는 단편적인 지식일 뿐이다. 인간의 역사를 바꾼 사과는 흔히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과 3개를 들라면 첫째 이브의 사과, 두 번째 뉴턴의 사과를 떠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화가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사과를 든다.
하지만 이 균은 ‘이브의 사과’에 이어 ‘파리스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뉴턴의 사과’를 들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고 있다. 그냥 각각의 사고에 얽힌 일화를 소재로 작업을 하고 있지만 격랑의 역사, 전쟁의 고통,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까지 살아온 그 세대로서 정년을 맞으면서 어찌 회안이 없었을까. 나는 그의 사과에서 인간들이 느끼고 발견했던 가치들을 인생의 전환점 또는 청년기 장년기 그리고 정년과 정년 이후의 자신의 그리고 자신과 동년배들이 겪고 경험했고 그리고 그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가 깨치고 발견했던 삶의 체험과 정신적, 학문적 여정을 보여준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서 진정성이 보이는 것은 그의 이런 여정이 그의 것인 동시에 대한민국을 그와 함께 살아낸 모든 이들의 체험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비 고비를 각각의 사과는 의미하고 상징한다. 그리고 그는 삶에서 진리란 늘 이렇게 다르지만 같은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추억을 기억하다
그에게 오드리 헵번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는 오드리 헵번을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오직 대학시절 영화로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오드리 헵번은 자신이 만든 여성상이자 이상인 동시에 실제의 오드리 햅번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못하던 간에 이것이 현대미술의 키워드라는 사실이다.
미술에서 어떤 대상도 작가의 눈과 손을 통해 새롭게 탄생된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실재하는 작품의 대상을 떠 올리지만 그것은 이미 그 대상이 아닌 작품으로 또 다른 의미를 갖는 오브제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작품을 통해 그 작품의 대상이 된 사물이나 자연의 재현된 이미지를 본 것이지 그것 자체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오드리 헵번도 그만의 독창적인 이균의 오드리 햅번인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영화 속에서 본 오드리 헵번의 경우 한 날 한 시에 같은 극장에서 보았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오드리 헵번에 대한 인상을 각각 다를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추억이나 기억 속의 상징들을 통해 자신의 당시, 또는 동시대를 살아 낸 동년배들의 공유하는 추억을 작품으로 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회고나 연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무감각과 애정의 부재 그리고 상상력의 고갈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지난 시간의 아우라가 드리워져있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토슈즈가 오드리 헵번의 부재를 일깨워 준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변, 감성의 부재로 인해 오드리 헵번을 잊었고 이제 어디에서도 오드리 헵번을 찾아 볼 수 없다. 그 안타까운 삭막한 오늘을 쓸쓸히 골목 입구에서 현실이라 체념하듯 지켜보고 있는 이 균의 어깨가 왠지 오늘따라 안타깝다.
무던하게, 무소의 뿔처럼
하지만 더욱 감동적인 것은 그가 아들의 결혼을 기념해서 제작해서 며느리에게 선물했다는 작품이다. 어찌 보면 브랑쿠지의 키스나 이런 작품들을 모방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차용해서 아들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가족을 맞아하는 아비의 마음을 담은 이 작품을 보면서 필자는 가슴이 뭉클했다, 이 보다 값지고 숭고하고 순수한 선물의 작품이 어디에 있을까. 멋 부리지 않고 재주피우지 않고 장인의 마음과 정성으로 만들어 낸 조금은 투박하고 서툴지만 바로 그 땀과 진지함, 성실함이 찡하게 전해온다. 작품이란 무릇 이런 것이 아닐까. 만약 미술이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 보다 더 한 작품이 어디 있을까.
멋 부리고 나대는 세상에 작품과 예술마저도 변해버린 세태에 그의 느리지만 무던한, 늦었지만 부지런한 행보에 갈채를 보내는 이유이다.
이제 그에게 하나의 사과를 더 발견하라고 권하면서 졸고를 마치고자 한다. 바로 세잔의 사과이다. 그가 사과를 통해 자연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질서를 찾아 이를 그림에 적용시켰다. 인상파화가들이 대상들의 빛에 의해 드러나는 찰나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던데 반하여, 불변의 원칙, 사물과 자연의 기본질서를 찾아내어 그것을 화폭에 재현함으로서 견고하고 탄탄한 구조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제 이 균도 세잔느처럼 삶의 경륜과 학자로서의 튼실한 이론 그리고 늦깎이 조각가로서 삶과 예술의 본질 그리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종합하여 무겁고 거창한 것이 아닌 일상의 진리를 꾸준하게 조각해 줄 것이라 믿는다. 아직도 갈 길이 먼 후학이 주제넘게 드리는 말이지만.


제2회 李 均 彫刻展
(<전시기간:2013년11월1일(수)-11월19일(화)/장소:LEESEOUL GALLERY(인사동))
나이브한 매력과 정통의 권위 사이에서
글/오상일(홍익대학교미술대학원 교수

1. 앙리 루소(Henri Rousseau, 세관원, 프랑스, 1844-1910)
2. 로버트 모세(Robert E. Moses, 주부, 미국, 1860-1961)
3. 세라핀 루이(Séraphine Louis, , 가정부, 프랑스, 1864-1942)
4. 헨리 다져(Henri Darger, 수퍼마켓 직원, 미국, 1892-1973)

모더니즘의 역사는 세계와 인간의 본 모습을 과학과 이성중심의 가치관 위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고 정의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모더니스트 예술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예술의 본질적 조건을 질료적 특성으로 이해하려 했다. 예술이 진정 독자적으로 예술일 수 있도록 담보해주는 것은 예술을 떠받치는 하부구조, 즉 지지체(support)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교조주의는 표현대상을 물질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담고 있는 단순추상형태로 한원 시킬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 형식주의는 그 역사적 당위성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모더니즘이라는 기나긴 형식주의의 대열에서 위에 열거한 작가들은 국외자들이었다. 이들은 미술학교에 다닌 적도, 그럴듯한 전시회에 참여한 적도, 나아가 자신의 예술적 이념을 주장한 적은 더더욱 없다. 형식이니, 물성이니, 환원이니 하는 단어들은 공부 많이 한 엘리트 작가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이들은 그저 그림이 좋아서 그렸을 뿐이다. 교양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어 투박하고 촌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아이같이 솔직한 시각과 참신한 표현 때문에 기성 권위도 귀엽게 보아 준 아마추어들이었다. 그리고 미술사는 이들을 작품의 성향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소박파(素朴派naïve artist)라는 명칭으로 뭉뚱그렸다. 우리말에서 소박하다는 말은 대개 칭찬의 뜻으로 쓰이지만 영-불에서의 나이브는 천지 분간 못하는 순진함이라는, 경멸의 뉘앙스가 더 강한 단어다. 그러니까 나이브 아트는 모더니스트 예술에서 완전한 서자였던 셈이다.
신진 작가 이균을 보면 바로 연상되는 것이 젊음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유일한 밑천으로 삼아 미술사에서의 일가를 이루어낸 소박파 예술가들이다. 그가 자신의 작가 노트에서 술회하였듯이 78세에 그림을 시작한 모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이제 와서 조각을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그 실천으로 어느 해 봄 필자의 <조각조형연구>라는 강의 시간에 불현듯 나타났다. 정년을 한 학기 남겨둔 홍익대학교 무역학과의 교수가 아니라 미술대학원 신입생의 자격으로 들어온 것이다. 원로교수이며 동시에 학생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에서 비롯된 불편을 감수하며 막내 조카 또래의 동급생들 가운데서 보여준 진지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가 성공적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을지, 나아가 작가로서의 경력을 구축해 갈 수 있을지,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없었다. 미술계라는 곳이 들어오기는 쉬워도 그 안에 자리잡고 앉기는 힘든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 이상의 추진력으로 일련의 과정들을 수행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가 남다른 뚝심을 지닌 사람이란 걸 재차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문화센터 등록하듯이 대학원에 지원했던 것이 아님을 당당히 증명한 셈이 된다.
필자가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의 면면을 보면서 느낀 인상은 쉽고도 순박함이다. 이들은 억지로 꾸미지 않아 솔직하고, 난삽한 개념과 개인적 트라우마(trauma)를 이해해달라고 들이대지 않아서 편안하다. 전시 작품은 거의가 누드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다.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의 흉상을 토슈즈를 신은 그녀의 발들과 함께 배치한 조각설치 작품이다. 그가 대학 시절부터 좋아했던 불멸의 스타, 헵번의 매력을 고전 발레에 유비시킨 작품이다. 헵번의 맵시와 고고한 자세는 발레 수업을 통해서 습득된 것이기에 토 슈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제유(synecdoche)가 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특기할 것은 토 슈즈를 신고 있는 발이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생략되고 파편으로서만 남아있는 발들은 이때 하나의 페티시(fetish)가 되어 전체로서의 신체를 대신하게 된다. 이러한 신체의 파편은 에서도 등장한다. 작가는 차이콥스키의 발레‘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과, 거기에서 주연한 나탈리 포트만의 뛰어난 연기에 감동하여 이 작업을 시작하였다. 무대 앞쪽에 배치되어 있는 세 명의 White Swan과 한 명의 Black Swan 뒤에서 배경을 이루고 있는 Corps de Ballet가 그것이다. 열두 명으로 하나의 조를 이루는 이들 무용단은 앞에 나와있는 주역들과 달리 골반 위부터 잘려나가 허벅지 아래만 남아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도 파편으로서의 신체, 즉 부분대상으로서의 하반신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대목이 필자의 주의를 끄는 지점인데, 바로 부분 신체가 주는 언케니(uncany)와 페티시(fetisch)가 만나서 이루어내는 기묘한 에로티시즘 때문이다. 전족(纏足)한 여인의 신발을 벗겨 거기에 술을 따라 마셨다는 중국 남자들의 기방설화라든가, 그네 타는 여인의 벗겨진 신발을 그린 프라고나르(Jean H. Fragonard)의 로코코회화는 이러한 페티시즘의 한 가지 전형이 아니겠는가? 예술에서 에로티시즘은 음식에서 양념과 같은 것이다. 누드는 에로티시즘의 산물이고, 서양의 미술사는 곧 누드의 미술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균은 이러한 전통 위에 자신의 예술을 세우고 싶어 한다. 따라서 그의 주요 모티브는 단연코 누드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아르키펭코(Alexander Archipenko)의 입체주의 조각을 연상하게 하는 . 토르소의 허리를 절단하여 상부와 하부 사이에 턱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사과를 올려놓음으로써 초현실주의적 전치(displacement)와 메타포(metaphor)를 시도한 . 하나의 토르소 모티브를 동일한 형태의 브론즈, 대리석, 화강석의 토르소로 변주함으로써 재료와 형태 사이의 긴장관계를 실험한 .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히고 있는 발레리나의 실루엣을 평면으로 오려낸 후 다시 여려 겹의 층으로 겹침으로써 생기는 이미지의 중첩효과를 실험한 작업 등이 모두 누드이다. 또한 지금은 장성하여 출가한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을 대리석으로 재현한 , 그가 좋아하는 축구선수 베컴(David Beckham)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흉상, 여인의 두상을 단순화시켜 대상의 특징만 남긴 등도 함께 전시된다. 조각 단독상으로서, 또 어떤 것은 단독상들이 모여 하나의 무리를 이루는 이균 조각의 모티브는 모두가 그가 사랑하는 생활 주변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모더니즘이 계몽주의 시대 이후 견지해 왔던 로고스중심주의와 이분법적 세계관을 해체한 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래서 대상세계를 구분 짓던 경계와 차이가 모호해지면서 중심과 주변, 성스러움과 비속함,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것이라고 요약한다면, 나이브 아트야말로 다시금 조명해야 할 포스트모던의 징후가 될 것이다. 모더니스트 시대가 세운 가치의 위계질서가 붕괴되면서 엘리트 예술과 저급예술, 즉 적서(嫡庶)의 차별도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예술의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예술의 책무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종전과 다른 방식으로 이 세계와 삶을 바라보게 하고, 사유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오늘의 예술가는 미의 생산자가 아니라 담론의 생산자인 것이다. 따라서 미의 생산자로서의 예술가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던 기술(technique)은 철학과 태도(attitude)로 대체되기에 이르렀고 예술가는 그럴 듯한 개념만 제시하거나, 영화감독처럼 상황에 따라 필요한 전문가를 데려다 쓰면 되게 되었다.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월드 아티스트들 중에 미술 비전공자가 적지 않은 것도 변화의 한 방증이다. 이러한 탈경계(脫境界) 상황은 워홀(Andy Warhole)의 말대로 모든 것이 예술일 수 있게 하였고 누구나 예술가일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아이처럼 유치하거나 서툰 표현 방식이 오히려 환영 받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개벽의 시대에 이균이 새삼 제도권 미술교육을 선택함으로써 정통을 찾아가고자 애쓰는 것을 볼 때 필자는 지도교수로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필자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여러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가 없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승화와 정제를 거부함으로써, 우리 몸의 비천한 구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지나친 사변이나 노출증적 자기고백으로 시끄러운, 퇴행의 예술이다. 단토(Arthur Danto)는 그의 주저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포스트모던 예술이 미학적 수행으로부터 해방되어 철학과 내러티브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을 새로운 자유와 가능성의 확장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는 그것이 정박점(碇泊点)을 잃고 표류해야 하는 정체성 상실의 또 다른 위기는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가 이균이 추적하고 있는 소박한 예술, 즉 생활에서 비롯하여 생활로 회귀하는 예술, 예술의 효용과 책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예술, 그래서 너무나 명백하고도 단순한 예술이 시사하는 바는 작금의 예술이 안고 있는 부정적 측면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또한 그가 이제 와서 소박파의 조각가가 아닌 정통파의 조각가로 나선 이상, 자신의 작업을 떠받칠 형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 자기만의 것으로 양식화할 것인지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2013년 11월 1일


제3회 개인전: 새로운 구상
(전시기간:2015.05.23.-07.23/전시장소:마가미술관)
짐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보다, 이 균의 조각을 보면서
글/정준모(前국립현대미술관학예연구실장,국립아시아문화전당전시협력감독)

아! 아버지
이 균이 또 다시 마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갖는 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필자는 문득 영화 ‘국제시장’을 떠 올렸다. 오늘의 풍요로운 시대를 견인해 온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 속 우리 시대의 아버지 ‘덕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들에게 아들딸에게 ‘괜찮다’ 웃어 보이고 ‘다행이다’고 되새기며 눈물 훔치며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을 오직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이균에게서 우리시대의 아버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평생을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친 수년 전 정년퇴직을 하고 요즘은 조각실에서 작품을 만지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가 뒤늦게 조각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그가 직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홍익대학교라는 환경 탓도 있지만 그 즈음의 또래들에게 누구나 희망처럼 평생을 간직하고 살아온 젊은 시절의 꿈이 있었던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연배들의 삶은 그들의 삶이 아니었다. 오롯이 그들의 삶은 나라를 위한 삶이었고, 자식과 아내와 가족을 위한 생활이었으며, 쇠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집안의 기둥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문학이나 예술 또는 어학 등의 공부를 접고 법학이나 의학 아니면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해야했다. 자신의 의지와 희망과는 전혀 관계없이 말이다. 물론 그들 연배에서 당시 대학물을 먹었다는 것도 실은 세상으로 부여받은 큰 특권이었다. 하지만 그 권리를 구가하는 만큼 세상에 더 많은 빚을 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채의식을 때문에 남 보다 더 많은 시간과 품을 들여 자신의 역량이상을 발휘해야 했다.
그들 세대는 아버지 어머니 세대를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된다는 사명감, 그리고 아들딸들에게 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했던 세대이다. 또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동북아시아 변방에 있는 나라를 집안을 일으켜 세우듯 번성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명령을 몸으로 마음으로 받았던 세대이다. 이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사치이자 호사였다. 그들 세대는 아버지라는 이름 때문에 혼자 울 수 도 없었고, 외로워도 독한 소주 한 잔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의 친구들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원양어선을 타고 사모아로 떠나야했으며, 따른 친구들은 대졸이라는 당시로서는 귀한 학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광부로 나가야 했다. 또 그의 누나나 여동생들은 고향을 등 뒤로 하고 이역만리 독일로 간호부로 일하러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생은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아버지의 눈물은 힘들고 고단했던 지난날의 독백이자 참고 또 참으며 살아온 아니 살아낸 아버지의 독백이자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들이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무게였다. 이제 그는 그 무계를 벗어 내리고 조각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마치 밀렸던 생업에, 가족에, 제자들에게 쏟았던 시간을 메우기라도 할 듯이 말이다. 지난번 개인전에서도 작업의 양에서 만만치 않은 작품들을 내 놓아 주위를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 제작한 작품들은 양은 물론 질에 있어서도 가히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기량이 놀랍게 늘었다.

생을 곱씹어 삶을 돌아보다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그의 작업은 역시 현실적이다. 아니 사실적이며 구상적이다. 실물경제에 바탕을 둔 그의 전공 탓도 있겠지만 그에게 예술이란 실질적이며 직접적으로 기능하고 작용할 것으로 전제로 한다.
그의 사과는 이제 큰 사과를 중심으로 작은 사과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정년퇴직과 함께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가정적 과업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평생을 몸에 지니고 살아온 아버지로서, 조국근대화의 역군으로서의 책무를 여전히 느끼고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작은 사과들에 둘러싸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하면서도 짐짓 작은 사과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짓고 만들고 각각 의미를 갖도록 방관(?)한다. 가족이라는 틀 속에 가두기보다는 각각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전체이면서 각각인 오늘날의 자유스러운 사회, 가정의 모습을 상정한다.
스스로의 인생을 던져 자식들의, 후학들의 인생에 밑거름이 되었을망정 자신을 강요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기보다는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두고 짐짓 방관하는 듯 자신들의 두 다리로 세상을 마주하고 설 것을 은근히 종용한다.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혼자 걷도록 내버려두면서 어딘가에 숨어서 넘어질까 봐 걱정되어 지켜보는 듯 말이다.
그의 작업에서 사과는 매우 상징적이다. 사과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과일이지만 막상 그 의미를 되새겨보라고 하면 오히려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듯 주저하게 된다. 그에게 사관 일상적인 것이기보다는 그의 추억과 기억을 형상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이다. 마치 무당이 신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어 주는 것처럼 그는 ‘이브의 사과’, ‘파리스의 사과’, ‘빌 헬름 텔의 사과’, ‘뉴턴의 사과’의 예를 원용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하지만 요즘 그의 사과는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뿌리에 기원을 둔 사과를 통해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요즘의 세상을 보여준다. 나와 다른 생각이 틀린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온갖 억측과 추측을 통해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편을 가르는 요즘의 세태는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자신보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와 그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모습을 되돌아오면 왜 회한이 없을까 만은 그는 요즘의 그의 사과들을 통해 다르지만 공존하고 화해하고 서로 이해하는 세상을 그리고자한다.
그들 세대가 자신을 접고 버리고 뛰어들었던 세상에 대해 오늘 날 왜 할 이야기가 없을까마는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는 회안을 누구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은 채 묵묵하게 각기 다른 그러나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과를 통해 같은 곳에 사는 ‘우리’를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사과는 모양과 크기와 색채는 모두 다르지만 사과라는 점에서 같다. 진리란 늘 이렇게 다르지만 같은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미 그는 설파한바 있다.
그들 세대에게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93)은 선망의 대상이자 우리나라가 궁극적으로 상정했던 잘사는 나라, 선진국의 표상이었다. 그에게 헵번은 절대 타락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연약한 성인이자 다치기 쉬운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사람이었다. 여려 보이지만 결코 압력에 짓눌려 무너지는 법이 없었고 배우에서 은퇴하고 유니세프(Unicef)대사가 되어 확고한 몰두와 헌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 이렇게 헵번은 그에게 선진조국의 표상이자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인간의 표상이었다. 우리가 선망하던 잘사는 나라, 인본이 갖추어진 도덕적 세상의 징표였다. 그것이 그들 세대에게 단순하게 영화적 이미지로 다가왔어도 말이다. 그에게 헵번은 천사이자 여유로움의 상징이었다. 잘 살고자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그에게 헵번은여전이 그의 연인이자 인간적인, 인간다운 삶의 표상이다. 그에게 헵번은 이상적인 인간상이자 그가 그리고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영화 속에서 보는 것 보다 더 큰 170cm의 키 때문에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다던가. 마치 그가 화가나 조각가가 되려고 했지만 주어진 처지와 부모님들의 기대, 세상의 요구로 인해 그 꿈을 접었던 것처럼 꿈을 접는 불행을 그는 헵번과 함께 한다. 물론 그들 세대의 모든 이들은 게리쿠퍼(Gary Cooper, 1901~61)나 헵번, 험프리 보가트, 게리 쿠퍼, 그레고리 펙, 헨리폰더, 케리 그란트, 피터 오툴 같은 이들은 잘 사는 나라의 상징이자 잘사는 나라가 표방하는 시각적 실체이자 행복한 가정 또는 사람들의 현현이었다.
이렇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추억이나 기억 속 상징이나 추억의 단편들을 통해 자신의 당시, 또는 동시대를 살아 낸 동년배들이 공유하는 추억 또는 기억을 형상화 한다. 하지만 그는 복고적인 사람도, 회고에 잠겨있는 추억을 먹고 사는 인물도 아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헝그리 파이터로서 잘 살아보고자 혼신을 다했던 자신들 세대의 잃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사물의 존재, 상황의 인식, 엄중한 역사적 요구에 대한 무감각과 애정의 부재 그리고 상상력의 고갈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시간의 아우라가 존재한다. 그러나 헵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보이지 dlsgrh 세상을 떠났다하더라도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우리의 그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마치 회상이라는 버튼을 누르면 비디오테이프가 재생되듯 햅번은 스스로 일어나 우리의 주변 또는 마음속을 내 닫는다.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우리곁을 지키고자하는 그들 세대의 열망의 그의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독백, 무겁지만 즐거운
우리에게 예술을 너무 무겁다. 아니 그 이상이다. 심오하고 어렵고 때로는 난해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그 바람에 지레 겁을 먹고 예술과 문화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술이란 현대예술이란 그렇게 심오하고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한사람의 삶이나 인생역정이 때로는 그만의 독특한 경험과 추론에 의해 형태 지어지기 때문에 그와 세상을 다른 관점과 방향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똑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림을 보고 세상을 접하는 이런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세상이 바뀌고 사람도 바뀌었건만 우리에게 여전히 문화와 예술은 계몽주의 시대의 독해법, 감상법에 여전히 머물러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왜 우리는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이균의 작업은 처음에는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보편적이며 상식이자 실물경제와 관련이 깊은 학문을 공부한 그에게 예술이란 전체보다는 부분을, 공통점보다는 작은 차이를 중시할 수 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이란 우리에게는 무겁고 버겁고 의미심장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균의 작업이 기능적이며 사실적이고 보편적인 미학용어를 사용해서 작업을 한다하더라도 매우 진지하다는 점에서 예사로이 넘기기는 어렵다. 세상의 어떤 생명체가 더 귀하고 중하지 않은 것처럼 예술품이란 그 형식과 내용이 어떻다 하더라도 예사롭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균은 예사로움을 통해서 그의 작업에 대한 상징과 해석, 은유와 비유보다는 직접적으로 작업을 통해 스스로에게 스스로 말을 걸고 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혼잣말로 독백을 하듯 말이다. 하지만 연극배우에게 독백이란 것이 오직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뿐 일까.
사실 연극배우의 독백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의 독백은 배우에게는 일상적인 연기일지 모르지만 듣는 이, 관객에게는 무겁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독백에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세대의 공통적인 독백, 염원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이제야 비로소 조각이라는 또 다른 생소하고 생경한 도구를 통해 스스로의 속내를 말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그에게 길고 지난했던 시대를 관통하며 아버지로, 교수로, 근대화라는 컴컴한 터널을 지나오며 느꼈던 모든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서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으로 전해 주길 기대한다. 그가 스스로 아버지라는 짐을 잠시 벗고 비켜서서 조각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삶의 무게를 벗었다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이 그와 그들 세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세상의, 가족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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